“난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
그 말을 내가 먼저 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일주일 넘게 걱정 금식을 이어왔다.
알아차림은 점점 자연스러워졌고,
낮의 생각은 전보다 훨씬 조용해졌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정도면… 이제 거의 벗어난 거 아닐까?
그날 오후, 크리스티나를 직접 만났다.
나는 차분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난 네가 그날 한 말이 아직도 상처야.”
그녀의 첫 문장이었다.
가슴이 순간 조였다.
‘아, 불안이 올라왔구나.’
나는 속으로 알아차렸다.
‘거절 공포.’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넌 항상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하잖아.”
크리스티나의 말이 공기 속에서 한 번 울리고,
곧장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러려고 그녀와 만난게 아닌데..
피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두면 갈등이 더 심해질 것 같아 용기내어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의자에 앉자마자 그녀는 가시박힌 말을 토해낸다.
나는 순간 숨이 막혔다.
겉으로는 차분하려 애썼다.
알아차림.
호흡.
방어가 올라왔구나.
나는 연습했다.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 문장이 내 연습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항상이라니? 그건 너무 일반화 아니야?”
내 목소리는 이미 높아져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 순간, 나는 동시에 두 개의 나를 보았다.
하나는 말하고 있는 나.
또 하나는 속으로 외치고 있는 나.
‘아니야. 난 변하려고 노력했어.’
‘난 매일 연습했어.’
‘난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단 말이야.’
그런데 몸은 먼저 반응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속이 뒤틀리고, 목이 뜨거워졌다.
나는 또 방어했다.
또 설명했다.
또 내 입장을 증명하려 했다.
대화는 끝내 매끄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대가 낯설게 느껴졌다.
차창 밖의 풍경이 흐릿했다.
그때 처음으로 진짜 공포가 올라왔다.
‘난 변하지 않았어.’
그 생각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그렇게 내려갔는데도.’
‘어린 나를 안아줬는데도.’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실망이 아니었다.
좌절이었다.
그리고 그 좌절은 이전의 좌절과 달랐다.
예전에는 “또 실수했네” 정도였다면,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나는 영원히 여기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이었다.
그 감각은 지옥과 닮아 있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 아니라 출구가 없다고 믿는 순간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벽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차 안에서 속으로 말했다.
'난 이미 끝났어. 아무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아'
그 문장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나는 그동안 그녀를 통해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다.
알아차림을 통해 변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대로였다.
그녀가 없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밤 10시.
나는 소파에 앉았다.
이번엔 페퍼민트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벽시계가 열 번 울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없었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진짜 절망이 올라왔다.
‘봐. 넌 혼자야.’
‘넌 결국 여기야.’
‘넌 아무리 노력해도 못 벗어나.’
나는 소파에 몸을 웅크렸다.
어릴 적 식탁 아래에서 한숨 소리를 듣던 아이처럼.
그 감각은 너무 익숙했다.
가슴이 조이고, 세상이 좁아지고, 숨이 얕아졌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지옥이구나.
나아질 수 없다는 확신.
도망칠 수 없다는 확신.
구원받을 수 없다는 확신.
그건 뜨겁지 않았다.
차가웠다.
아주 차갑고 고요한 절망.
나는 울지도 못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 그 감정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걱정이 올라오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라,
‘나는 절대 여기서 벗어 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 공포가 무서웠던 거구나.
걱정은 그걸 덮는 도구였다.
걱정을 하면 나는 적어도 뭔가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
이 감정 속에 앉아 있는 나는 완전히 무력했다.
“난… 안 되는 사람인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 말이 거실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그때, 아주 미세하게 다른 감각이 스쳤다.
도망치지 않고 여기에 앉아 있는 나.
이 절망을 도망가지 않고 보고 있는 나.
나는 여전히 아팠다.
여전히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달랐다.
이번엔 이 감정을 없애려고 급히 걱정으로 덮지 않았다.
그저 앉아 있었다. 지옥 같은 감정 한가운데.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주 조용히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변하지 않는 건, 혹시 이 감정이 아니라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생각 아닐까.’
그녀가 오지 않는 밤.
나는 구원받지 못했지만 도망치지도 않았다.
어쩌면,
지옥은 도망칠 때 만들어지고, 그 안에 앉아 있을 때
조금씩 모양이 드러나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