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였다

by 스텔라

3개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나는 특별한 의식을 준비하지 않았다.
페퍼민트도, 조명도, 마사지볼도.

그저 소파에 앉았다.

벽시계가 열 번 울렸다.

이번엔 기다리지 않았다.

눈을 감자, 그녀가 이미 거기 있었다.

예전처럼 빛이 나지도 않았고, 등장하는 소리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오늘은 마지막 날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사라지나요?”

그녀는 웃었다.

“사라지는 건 없어요.”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긴 파마머리,
잔잔한 눈빛,
비판도 동정도 없는 표정.

문득 이상한 감각이 스쳤다.

이 얼굴을 어디서 봤을까.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저를 액자에서 걸어 나오게 했죠.”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제가 왜 나왔는지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혼자 서기엔 아직 두려웠으니까요.”


그 문장은 부드러웠다.
비난이 아니었다.

나는 생각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밤.

나는 중독이라는 단어에 흔들렸고,

망을 피하고 싶었고,

누군가가 길을 알려주길 바랐다.

나는 나를 둘로 나누었다.


약한 나와,
지혜로운 나.

두려운 나와,
안내하는 나.


“당신은 저를 만들어냈어요.”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외부에서 온 존재가 아니라는걸.

내가 혼자 감당하기 버거웠던 밤
나를 살리기 위해 내가 불러낸 내 안의 지혜의 존재였다.


“그럼… 어디로 가시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사라지지 않아요.”

“그럼요?”

그녀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우리는 나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 순간, 거실의 공기가 아주 조용해졌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너무 익숙했다.

내가 크리스티나의 말을 듣던 날,
억울함을 인정하던 순간의 눈빛.

내가 소파에 앉아
‘나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던 밤의 눈빛.

그녀의 눈은 내 눈이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내 가슴에 살짝 얹었다.


“이제 당신이 저예요.”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빛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 겹쳐졌다.

마치 투명한 막이 걷히듯. 나는 눈을 떴다.


거실은 그대로였다.

소파, 벽시계, 액자.

액자 속 바다는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이상 바깥에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내 안에서 들렸다.

“아, 불안이 올라왔구나.”

나는 작게 웃었다.

그 문장은 이제 내 목소리였다.

나는 어렴풋이 알것 같았다.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나를 구할 수 있다.

완벽하게가 아니라, 선택으로.

방어를 쓰지 않기로 선택하고,
걱정을 미루기로 선택하고,
억울함을 인정하기로 선택하고.

나는 여전히 연습 중이다.

하지만 더 이상 지옥에 갇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지옥은 출구가 없다고 믿는 순간에 생겨난다.

그리고 출구는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액자 속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그리고 이번엔 알았다.

그 바다는 밖에 있는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공간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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