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10시
땡볕의 범어사역 7번 출구로 나오니 친구 둘이 보인다.
"오늘은 우리 세명뿐이네?"
"여섯 명이 함께 간다고 댓글 달았던데, 한 명은 코로나로 부인과 구만산으로 갔고, 둘은 무더위에 힘든 코스라면서 아마 실내 탁구로 바꾸었나 보다."
고교 밴드에 올려진 폭염 속 번개 산행,
달랑 세명의 친구만 썰렁하게 강한 햇살을 받으며 범어사 상마 마을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내게 첫 산행을 가르쳐 준 친구,
또 그 친구에게 산행의 기쁨을 알게 해 준 친구 등 3명이다.
많은 산을 함께 오르며 다정함이 쌓여 서로 태사부, 사부, 제자로 호칭하는 관계이다.
10년도 더 오래전
첫 산행을 접하는 날, 하산 후 술자리를 자정 넘어까지 길게 베풀어 주어 곧바로 아내에게 입산금지 조치를 당했지만, 오랫동안 자상한 사부로서 산행의 지혜를 많이 가르쳐 주셨다.
큰 산을 단숨에 오르며
호연지기를 보여주었던 태사부, 뒤풀이 술 한잔의 기분에 수차례 시시한 다툼(술 안 따라준다고, 노래실력 없다 했다고) 도 있었지만 지금은 더욱 원숙하고 노련한 인품이다.
잘생긴 나무는 다 베이고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우둔한 제자는 오늘도 스승의 그림자를 조금 떨어져 길을 따라 걷는다.
산 초입 평지 50m 앞에 잘 걷는 부부팀이 빠르게 앞서가고, 사부와 태사 부도 거리를 맞추고 그 뒤를 나도 뒤질세라 힘껏 따라 붙인다.
오직 시원한 곳에서 점심과 반주를 맛있게 먹을 생각으로 배낭을 메고 숲길을 당당하게 헤치며 힘 있게 올라 가는데, 평소보다 많은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2km쯤 오니 평지가 끝나고, 양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 급경사 산길과 오른쪽 오솔길)
"오늘 너무 더우니, 쉬운 길로 갑시다!"
"아니, 이 산만 넘으면 오르막은 거의 끝이 나니, 오히려 쉬울 수 있다."
태사부의 대답에 더는 반대를 못하고 뒤따라 산길을 오른다.
태사부는 저만치 앞서가고 사부는 바로 앞에 가며 보폭을 맞춰 준다. 내 숨소리가 거칠면 앞에서 외친다.
"보폭을 더 좁게 줄여라!" 하고 또
"물 한잔 마시고 가야겠다!"며 주저앉아 쉬고 있는 내게
"쉴 때는 서서 쉬어야 한다."
"절대 앞사람 따라가려고 오버 페이스 해서는 안된다!" 고 한다.
예전 초보때 도움이 된 사부의 금쪽같은 명언들이다. 피로를 푸는데 좋다며 노래도 틀어준다.
한참을 쉬었다가 또다시 오르는데 습기 찬 날씨 탓일까?
100m도 채 못 갔는데 비 오듯 땀이 나면서 이제 어지럽기까지 하다.
태사부는 고개를 넘어갔는지 보이지 않고, 사부는 내 바로 앞을 오르며 내 상태를 눈치로 점검하고 있는 듯하다.
'이대로 오르다가 만약 내가 쓰러진다면 어찌 될까?'
'여기까지 119가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는지?'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제 나도 결정을 해야겠다.
"친구야, 나 이제 더 이상 못 가겠으니,
둘이서 다녀와라."
나는 털썩하며 마침내 주저앉아 버렸다.
최근에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집사람과 다니며 산행대장 역할도 훌륭하게 잘 수행해 왔었는데~
초반 앞서 가는 부부를 쫓아가다가 페이스를 오버했는지도 모르겠고, 어제 먹은 돼지수육에 체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더 이상 걷기 어렵다는 사부의 정확한 판단과 보고에 한참을 되돌아 내려온 태사 부도 장고 끝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버금가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산행시간이 1시간도 되지 않았으니~ㅎ)
발걸음을 180도로 돌려 가까운 범어사 아래 계곡을 찾아서 자리를 잡으니 웬걸, 모두 더욱 즐거운 표정들이다.
곧장 도시락을 풀어 태사부가 지참한 솔잎 술에 계란말이 부침개 돼지고기로
점심을 먹으니 정신이 확 돌아온다.
계곡에 몸을 담근 후 사부, 태사부는
옆에서 고스톱 치는 여성팀과 어울려 돈을 보태주는 친화력을 보이고 있다.
'각자 가져온 쓰레기는 각자 가져가면 된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점심 먹은 뒷정리를 하였다.
(예전에, 쓰레기를 함께 담아가는 사부들 생각과 달라서 늘 티격태격했었지요~)
오늘의 산행 아닌 물놀이 피서가 이제 끝이 났다.
땀 흘린 만큼 물놀이 쾌감도 비례할 터인데, 나로 인해 걷지도 못한 친구 아니 스승들께 미안할 뿐이다.
세월이 가도 발전이 없는 나는 못나고 부끄러운 제자일 뿐이다.
스승을 앞지르는 청출어람으로 기쁘게 해 드려야 할 텐데, 해가 갈수록 그들의 그림자도 못 따라가니까 말이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