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첫 일요일 아침에 아내와 함께 고향집으로 갔다.
아버지께서 방바닥에 엎드려 글을 적고 계신다.
옆에는 못 보던 큰 옥편이 보인다.
"옥편을 사셨는지요?"
"그래, 이것은 일어, 영어까지 다 표기되어서 좋더구나!"
"요즘은 원고지에 글 한 장 채우려면 일주일이 소요된단다."
지난달에 방문한 제자 민제에게 옥편을 선물로 주시고 새것을 사셨던 것이다.
방 안에는 늘 근래에 아버지께로 보내진 책들이 높이 쌓여있다. 대부분의 책 속에는 아버지와의 인연이 소개되어 있다.
오늘도 밀양문화원에서 발간한 「밀양 새 천년의 인물과 고전」(하강진 저)등 몇 권이 보인다.
책을 보면서 최근 근황을 전해주신다.
그저께는 이제 유일한 고향 친구이자 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의 100세 친구가 98세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셔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동강, 저녁은 차려 먹었는가?"
"그래, 잘 먹고 있다네."
"나는 마누라가 있어 다행이지만, 친구가 큰 걱정이다."
"다 팔자인데 어떡하나."
"그러지 말고, 새 마누라 하나 구하면 어떻겠는가?"
"어느 누가 영감 장례 치르러 오겠는가!"
대구에 살고 계시는 친구분은 경창산업을 창업하셔서, 5년 전 아버지와 함께 '밀양시민대상'을 공동으로 받으신 수당 손기창 님이다.
이번 5월에 100세 기념 회고록 「아홉 번 넘어지면 열 번 일어난 정도의 길」을 내고, 리더스 CC에서 향내 후배들과 골프를 함께 칠 계획이라며 아버지도 잔뜩 기대하면서 기뻐하신다.
일주일에 두세 번 황토방으로 놀러 오시는 손님들도 최근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동년배 친구들이었으나 지금은 한창 후배들이지만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하신다.
동강중 1회 제자들도 다 돌아가셨고, 2ㆍ 3회도 거의 만나기 어렵다며, 그 많았던 밀양의 친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단다.
지난해 세 살 어린 화암 하덕진 씨가 동년배 중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고 하신다.
생전에 '꼭 동강 선생께는 알려야 한다.' 그리고 '오시면 꼭 드리라'며 유언을 남긴 봉투 속에 5만 원을 넣어 두셨다고 한다.
돌아가신 직후에 딸과 사위가 원고를 적어 고인의 일대기 「백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백 년같이」(저자 박용철)를 발간하였다. 아버지는 그 책을 보며 자녀들을 칭찬하고 고인을 더욱 아쉬워했다.
별세 직후 장남의 부음을 받고, 아버지는 다음의 시를 적어 부의금으로 문상하셨다.
挽 崋巖 河公
同志同鄕同職筵
公吾與楔樂終年
懇祈快愈今朝訃
悵望天涯淚滿巾
뜻도 고향도 직업도 같았는데
공과 내, 모임으로써 함께 즐겼도다
그대 쾌유를 빌었는데 아침에 부음
멀리 하늘 끝을 보니 슬픈 눈물 수건에 찬다
늘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게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이다.
아버지도 갈수록 골프를 치는 횟수가 줄어든단다. '요즘에는 공을 잘 맞출 수가 없는데, 다음 주말에 동해 중을 졸업한 젊은 제자들과 노벨 CC 라운딩이 잡혀 있다며 큰일이라고 걱정을 하신다.
아마도 멋진 신록의 계절, 5월의 라운딩을 즐거워하시는 희망찬 모습으로 보였다.
아버지를 모시고 '새 서울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반찬은 옛날 집에서 엄마가 해준 맛을 느끼게 한다.
오늘도 갈치구이와 돼지불고기, 여러 밑반찬으로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는 반주를 하셨으며, 친절한 식당 주인은 산초잎 무침을 아버지께 포장을 해 주셨다.
(이전에는 감주를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를 모셔 드리고, 아내와 나는 이팝나무 꽃 가로수가 하얗게 끝없이 펼쳐진 밀양댐을 지나 천천히 귀가했다.
이로서 꽃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올봄의 꽃 나들이는 5월 철쭉을 제외하고는 모두 완료한 셈이 되었다.
오늘처럼 밝은 표정의 고향 아버지를 뵙고 온 날은 마음이 푸근하다.
늦은 시간에 약속한 친구들과 스크린 골프에서 최고의 성적을 냈다. 지금까지 꼴찌를 도맡아 했는데, 정말 예상 밖의 결과였다.
멘털 게임인 골프 역시 편한 마음과 정서적 안정이 중요한가 보다.
약 3개월 전부터 가끔 스크린 골프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필드에서 치는 것보다 공기가 탁하고 운동량도 적지만 장점도 있다.
야간에도, 눈비가 와도 가능하다. 시간과 비용이 절감되며, 집중도가 높아 재미도 솔솔 하다.
무엇보다 비신사적 행동을 할 수 없으며 실력에 비례해 결과가 정직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오늘 스크린 골프를 함께 한 친구가 생일이었다. 중국 술과 요리에 1차를 하고, 생일인 친구가 2차 뒤풀이를 쏘아 참으로 흥겨웠다.
5월의 첫날이 멋지고 행복하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