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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Jun 19. 2024

모과를 손에 쥔 남자

그의 고향 마을에서 자란 한센병 환자가 장애와 차별을 딛고 성공한 이야기

                모과를 손에 쥔 남자     


  아마 때는 80년대 초 추석 전이었을 것이다. 중앙동에 있는 그의 직장은 점심시간을 앞두고 고객들로 붐비고 있고, 쇼파에서 자기의 순서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표정은 무덤덤하게 보이지만 속내는 초조하기도 울렁거리기도 하여 그들의 사정을 짐작할수 있을 것 같다. 한번씩 담당자의 책상쪽으로 바라보며 은근히 재촉하는 듯이, 아니면 급한 마음을 추스리려고 하는 것인지 둘다 해당되는 것 같다. 넌지시 소파에 기대어 창밖 연안부두쪽을 바라보며 애써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사람들도, 서가에 꽂힌 잡지를 뒤적이는 분들도 있었다.

 “영생운수 사장님 이리로 와 주십시요.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와 신분증을 준비하여 주십시요.”하니 소파에서 한분이 벌떡 일어나 그의 책상으로 와서 접의자를 깔고 앉는다.

 “많이 기다렸었지요. 여기 약정서에 자필로 적어주시고 이곳에 날인을 부탁드립니다. 서류를 받고 나서 결재를 올려야 하니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겁니다.”하고 말하니 그분은 조용히 호주머니에서 도장과 인감증명서를 꺼집어 낸다. 그리고 약정서에 표기한 부분에 자필로 적도록 볼펜을 건냈다.     


 그 사람은 특이하게도 왼손잡이었고, 오른 손에는 모과를 손바닥에 쥐고 있었다. 얼굴은 퉁퉁하고 눈썹은 희미하고 입술은 발그스럼하게 피를 물고 있는 듯 하였다. 건네준 볼펜으로 주소란에 글을 적는데, 왼손으로 적다보니 글씨체가 특이하였다. 약정서를 다 적고 내용을 확인하려다 깜짝 놀랐다. 본적지가 그의 본적지와 같은 동리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상하다 하여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가 자랐던 본적지는 본 마을과 윗 마을로 나누어져있기 때문에 윗 마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수가 있지만 그래도 매우 반가왔다.

 “영생운수 사장님은 본적지가 저의 고향하고 같네요. 아마 지금은 고향을 떠난지가 오래되었나 봅니다. 혹시 윗 마을에 사셨는지요.”

 “아이구, 주임님께서도 저의 고향 분이시라구요. 객지에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같은 군이나 면 출신들은 간혹 보았지만 같은 마을 분들은 정말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러면 이수정 마을이 맞겠네요.”

 “맞습니다. 연못가에 정자가 있는 본 마을이지요. 사장님은 윗 마을 어디신가요. 새터나 갱골이겠네요.”

 “저는 갱골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나오는 영생원 마을 출신입니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에 이수정 마을에 방아를 찧으려 가고, 연못에 낙화놀이도 보러 가곤 하였었지요.”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약정서를 결재를 올리고 나서 보증서를 발급하여 건넸다. 그분은 수고해주셔서 고맙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나간다. 보통 인사를 하는 경우에는 악수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다. 아마 그의 오른손에 모과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종종 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니, 보증서를 은행에 가져가서 추석자금을 대출 받으려고 점심 시간 전에 서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바빠 악수하는 것도 잊은 모양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떠나고 난뒤에 참으로 반갑기도 이상하기도 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그 사람 회사의 상호가 영생운수라니 그의 마을 이름을 딴게 분명하고, 그 이름처럼 오랫동안 번창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가 살던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어 마을간에 오고가는 일이 흔하지 않았고, 그마을 사람들이 본 동네에는 방아를 찧으로 오거나 가야장에 갈적에 지나치는 정도이었기에 고립된 마을이 맞는다. 그 마을에는 십자가가 걸린 교회당이 있었으며 아침 저녁으로 종을 울리기도 하여 시간을 맞추기도 하였었다. 그 소리는 절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와 달리 짧게 땡그랑 땡그랑 소리를 내며 여러번 울렸다. 그 소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에서 울리는 구세군의 종소리 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는듯이 절실하였다.   

  

 그는 다음해 설 명절에 고향에 갔고,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집에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기에, 작년 추석 전의 일을 끄집어 내어 물어보았다.

 “저가 근무하는 직장에서 업무차 만난 분이 영생원에 산적이 있다고 하여 반가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의 성함은 김동산이고 부산서 운수업을 하고 있던데 저는 기억이 안나서 여쭙습니다.”

 “가만있자. 그 사람 이름이 김동산이라고 했제. 덩치가 크고 얼굴이 퉁퉁하고 씩씩하게 보이드나.”

 “맞습니다. 오른 손이 불편한지 왼손으로 글을 쓰고 성질이 좀 있게 보입디다.”

 “그사람이 맞네. 영생원이라고 잘 알제. 옛날에는 문디 골짜기라고 했었지. 출향하여 부산서 새터를 잡았나 보네. 잘 되어야 할낀데.”하고 해동어른이 세세하게 이야기를 한다.

 “너그 작은 할배하고 그 분 아버지하고는 아주 친한 사이였제. 한번씩 놀러가서 술도 한잔 얻어 마시고 오기도 하였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편을 들어주기도 하였었제. 너그 아버지가 교육위원 선거할때 그 마을에서 몰표가 나와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었제.”하고 김동산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가 어린시절에 들은 무서운 이야기가 있었다. 영생원을 밤에 혼자서 지나가면 누가 코를 베어간다느니, 보리밭에는 귀신이 나와 아이들을 보듬어 간다는 말들이다. 실제로 벌어지지 않는 일들로 겁을 주기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여 그들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겼던 것도 사실이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은 그들이 지나가면 듣기 거북한 욕도 하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여 어른과 마찬가지로 죄업을 짓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앓는 병을 천형(天刑)이 아닌 천명(天命)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부모들로 부터 배웠었다.  


 김동산은 영생원이라는 한센병 환자 집단거주지에서 태어나고 살았었다. 그의 할아버지대 부터 오랜기간 그곳을 고향으로 살아왔고, 약간의 밭농사를 짓고 주로 돼지를 키우고 닭을 쳐서 생계를 근근히 이어갔었다. 정식 초등학교는 물론 중등교육도 받을수 없었기에 자기 이름만 겨우 쓰고 읽고 하는 정도의 교육수준이었다. 예전에는 주거지를 옮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육지 속의 섬이요 수용소이었던 것이다. 김동산은 자기 아버지를 닮아 활동적이었고 매사에 앞장 서는 스타일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처녀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아버지로 부터 심한 질책을 받는다.

 “이넘아, 장가를 갔으면 아를 낳을 생각을 해야지 뭘 그리 재고 있노.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수많은 은혜를 입은 것인데, 현재에 그리 불만을 가지면 조상이나 천지신명이 좋아하건나.”

 “아부지, 아를 낳으면 그 이후가 겁이 납니더. 사지가 멀쩡해도 살까말까한데 새끼까지도 내처럼 되모 우짭니꺼.”

 “이 불효 막심한 넘아, 너그 할배가 나를 낳고 난뒤에 기쁘서 춤을 추었는데, 그것은 생명의 귀중함을 아신 것이고 대를 잇는다는 책임을 다한데 대한 즐거움이 아니었것나.”

 “그래도 자식대에는 사지가 말짱하여 차별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왜 저한테 없겠습니꺼. 단지 자식에게 원망을 듣지 않기기를 바랄뿐인데. 흐흐......”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긋다. 니 애비도 너와 같은 생각을 다하였었고 니가 고통받고 산다는데 억장이 무너진것도 사실이다. 단, 인생은 자신의 마음 가짐에 따라 달라 보이고 어쩌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흐흐흐.....”하고 부자간에 긴 대화가 이어지다 멈춘다.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일이며, 제일 두려운 것은 출산한 아이가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일이다. 김동산은 산기가 되어가며 불러오는 아내의 배를 보고 조마조마한다. 남들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그는 그런 마음이 반반이다. 뒷길 서낭당을 지나다니면서 산신할매에게 사지가 멀쩡한 아들을 낳아주기를 몇번이나 빌었다. 드디어 아내가 아기를 낳았다. ‘응애, 응애’하면서 슬픔의 울음인지 기쁨의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방문밖으로 들려온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듯이 기다린다.

 “아이구 김서방 참 잘되었네. 아들이구나, 꼬치 달린 아들이구나. 어서 들어오게나.”하고 장모님이 말한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받아 안고 먼저 눈길이 가는데가 있다. 참으로 다행이다. 아기가 사지가 말짱하게 태어난 것이다. 그는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고생했다고 말을 하니, 그간 목구멍에서 꾹꾹 막혔있던 울음이 터져나온다. 정말 다행이었고, 불구가 아닌 정상아로 태어났기에 감염만 막으면 정상인으로 살아갈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듯 아이는 자라고 자라 일곱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갈 나이이다. 그러나 읍내는 물론 주변 동네의 반대로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할수 없다고 배척을 한다. 그는 초등학교 교장을 만나 입학을 허락해 달라고 하니 주민들의 동의기 없으면 힘들다고 한다.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정도 하고 빌기도 하였으나 같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을 구장들은 물론이거니와 선생들 조차도 반대를 하니 억장이 무너져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됫병짜리 소주를 사서 안주도 없이 들이키니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 제일 인구 수가 많은 읍내부터 시작하여 이수정 마을을 오르내리며 울분을 토해내었다.

 “빌어먹을 세상, 차별받는 세상, 다들 잘먹고 잘 살거라이. 옛날에는 종이나 하던 것들이 세상이 변하니 살만하다고 깝치고 있는 꼬라지들 보소. 양반들이 저그들 천대했던 것도 다 잊아버린나. 같이 좀 살아보자, 씨브랄것들아!”하고 말반 욕반을 외고 다니니 읍내마을 청년들이 몰려 나와서 그를 죽도록 패버린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자기 마을로 업혀 들어가 근 열흘만에 일어났다. 몸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닷새요, 마음을 치유하는데 또 닷새가 걸린셈이다.


그는 마을 뒷산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 본다. 다시 눈아래에 펼쳐지는 땅을 내려다 보고 저멀리 한길가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말로 되뇌어 본다.

 “하늘은 정녕 있기는 한 것인가. 있으되 도와주지는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것인가. 땅은 눈앞에 분명히 있고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게 확실하다. 거짓말도 않고 일한 만큼 정확하게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있으되 자기들만 살 궁리를 한다. 그리고 서로 해치기도 한다.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구나.”하고 털털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선다. 그는 오직 땅과 자신만을 믿기로 하였고, 더 이상 천지신명이니 하면서 하늘에 기대지 않기로 하였다.

 아들이 차별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읍내사람들과 싸워 집에 업혀 와서 살기가 싫다고 식음을 거절할때 김첨지양반은 조용히 타이른다.

 “얘야, 제발 마음을 가라앉혀 어서 일어나거라. 내가 너의 심정을 우찌 모르겠노. 몸이 아픈 것 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을 이 애비는 다 안다. 내가 너처럼 숱하게 읍내사람들하고 싸웠었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나도 하늘을 원망도 해보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었고 오직 자기의 마음가짐이더라. 그래도 여기서 같이 울고 웃고하는 이웃들이 있지 않느냐. 니가 그렇게 퍼져 누워있으면 니 처도 얼마나 안타깝겠나. 그라고 커가는 니 아들은 또 얼마나 놀래건나. 니를 희생하여 가족들을 살리는 것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고, 그게 조상들에 대한 효도라고 여긴다.”

 “아부지, 지가 아부지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꺼. 나를 학교에 보낼려고 내처럼 똑 같이 싸웠겠지예. 아부지가 나에게 글을 가르쳤듯이 지도 그리 하겠습니더. 이제 부터 세상을 원망안하고 스스로 힘으로 씩씩하고 열심히 살아 가겠습니더. 아부지! 아부지의 지난일들을 생각하면 또 눈물이 나오네요. 흐흐흐......”    

 

 김동산은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종교단체에서 자원봉사나오는 대학생과 친하여 자기 아들외에 마을 꼬마들을 마을 회관에 모아놓고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는 은혜를 입었다. 자기 자신도 아버지로 부터 한글과 셈법은 배웠고 다른 과목은 그냥 상식으로 판단하며 살아왔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단, 그가 꿈꾸던 평등한 세상을 위해 아들에게 고등교육을 시켜 약자들을 대변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게 평생의 소원이었긴 하다. 그는 차별적인 사회현상을 극복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여 현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갔다. 돼지를 키워서 새끼를 낳으면 팔고, 송아지를 사서 키우고, 닭을 사육하여 계란을 장날에 팔아가면서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이제 꿈은 차별없는 세상이 되어 아들을 사회에 진출시켜 정상인과 함께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영생원 사람들과 자주 왕래하며 친해졌고 그들의 축산기술을 배워가기도 하였다. 그들은 정상인들 처럼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병역의무를 제외한 납세의 의무 등을 다하였다. 단지 자식들에 대한 교육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지만 사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들이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이기도 한데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도 하였다. 김동산은 이러한 불공평한 사회를 타파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힘과 발언권이 없는 약자들이었다. 하지만 선거때만 되면 한표씩을 부여받은 참정권은 보장되어 투표에 나설수가 있었다. 필요할때에는 달려와서 표를 구걸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현상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그 귀중한 한표를 소중하게 행사하였다.    

  

 본 동네인 이수정 마을에는 그의 집안과 친한 사람들이 몇명이 있었다. 제일 먼저는 광동할배인데, 그는 함안 향교의 장을 맡고 있었다. 김동산의 아버지와 친하여 수시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막걸리도 한잔씩하고 담배도 몇대 나누어 피우고 간다. 어느날 광동할배가 영생원에 들러는 김에 마지막으로 그의 집에 들어섰다.

 “김첨지양반 계시는가. 나 국량이요. 오늘 지나는 길에 목이 출출하여 막걸리나 한잔 얻어 마실려고 왔소.”

 “아이구, 국량어른께서 친히 찾아주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야, 동산아! 여기 향교장이신 국량어른이 오셨는데 주안상을 들여라. 그리고 너도 잠깐 들어와 인사를 드려라.”

 “오우, 아들이 예법이 정말 바르네요. 어른이라고 절을 하고 꿇어앉아 시중을 드는 걸 보니 역시 광산 김씨 양반은 다르오.”

 “국량어른, 저의 가문이 별거 있던가요. 생육신이신 어계선생의 집안하고 비교가 될수가 없지요.”

 “허허, 김첨지께서도 모르시는 말씀을 하시네. 광산 김씨 집안에는 김장생이라는 훌륭한 선비가 계시지 않습니까. 학문을 숭상하고 예법을 지키는 것을 보니 우리 가문과 많이 닮았기도 하오이다.”하고 광동할배와 김첨지와의 대화는 이어지고 서로 여러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먼저 광동할배가 부탁을 한다. 자기의 조카인 낙골양반이 이번에 군 교육위원에 출마하니 한표를 부탁했다. 그러자 김첨지는 자기집의 표는 당연하고 나머지 동네표도 몰아주겠다고 하였다. 그런 노력으로 광동할배의 조카인 낙골양반은 넉넉한 표차이로 당선되었다. 당선사례를 하기 위해 광동할배는 다시 영생원을 찾았고 마지막으로 김동산의 집에 들렀다.

 “김첨지어른, 표를 많이 모아 잘 찍어 주셔서 정말 고맙소. 오늘은 내가 한잔 낼려고 집에 담아둔 청주를 가져왔으니 한잔 합시다. 이번에 영생원 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셈입니다. 읍내 출신인 후보는 저그들 표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요. 사실 그들은 단합도 안되고, 삼강오륜도 모르고 근본도 없는 어중이 떠중이라, 민심이 정말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읍내 넘들을 보면 치가 떨립니다. 족보도 없는 넘들이 깝치고 다니는걸 보니 웃음도 나오더이다. 국량어른 조카도 유능하지만 그의 선친인 국필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애국지사가 아닙니까. 인심은 천심이요 사필귀정입니다.”하고 서로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담뱃대도 돌려가면서 소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김동산의 아버지가 국량어른을 은인처럼 여기는 것은 6.25때 부역혐의를 받고 감금될 위험에서 구해준데 있었다. 인민군이 여항산을 점령하고 매일 저녁에 민가로 내려와서 약탈해 갈때 어김없이 영생원에도 들어닥쳤던 것이다. 피난을 갈수도 없고 가더라도 갈데가 없는 영생원 마을 사람들은 죽으나 사나 마을에 남았었다. 어느날 저녁에 인민군들이 그의 집의 닭장에 있는 닭을 몇마리 잡으라고 총을 겨누고 겁박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닭을 삶아주었었다. 그건 신고인지, 소문인지, 추측인지, 인민군이 물러가고 난후에 경찰서에서 그를 잡아가서 잘못하면 재판없이 처형될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국량어른은 경찰서를 찾아가서 호통을 친다.

 “나는 함안 향교의 장으로서 마을마다 사람들의 행실에 대해 다 듣고 있소이다. 김첨지라는 분은 예의범절이 바르고 항상 올곧은 행동을 하는 사람인데 인민군을 자발적으로 도왔다고 믿지를 않소이다. 닭을 삶아 준것이 사실인지도 분명한 증거가 어디에 있소. 혹시 경찰들이 자기들 공적을 부풀리려고 억울한 사람을 사지로 내몬다면 하늘이 가만있지를 않을 것이오. 만약에 잘못되면 후일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잡아 가둔 사람은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것이오.”

 “모두가 지들 살라고 다 피난을 갔는데, 고향을 지키려는 그 사람이 어찌 불순한 사람이라고 단정하오. 여기 있는 경찰분들도 집에 아버지가 꼼짝 못하게 붙잡혀, 닭 한마리 삶아주면 살려준다고 하면 다들 어떠 하리라 보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자님 가르침에 모든 사람을 가련하게 보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지 않았소. 그리 알고 당장 풀어주시오. 내가 그 사람 신원을 보장하겠소.”하고 국량어른인 광동할배는 쩡쩡 울리는 소리로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자 경찰은 김첨지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친한 사람은 이수정 마을 구장인 해동양반이다. 비료값이나 농지세, 수리세 등을 받으러 오고, 마을 잔치때 모아둔 수건 등 기념품을 들고 오고 하여 편하게 지내는 사이이다. 그는 그의 집에 들러서 광동할배처럼 방안에는 안들어가지만 평상에 걸터앉아 세상 소식들을 전해주곤 하였다. 김동산은 한번씩 논에 부어라고 돼지 축사나 닭장에서 나오는 거름을 한 리어카씩 보내주곤 하였다. 그래서 구장인 해동양반은 김동산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자네가 아버님을 닮아서 부지런하고 인정이 많네 그려. 애들 공부를 하도록 학교에 보내는 걸 도와주고 싶었는데 워낙 반대가 심해서 못했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서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구장 어른 같은 분만 있어도 참 편하겠는데, 인심이 다들 한결 같지 못하니 어쩔수 있겠습니꺼. 이 모두다 운명이라 생각하고 안고 가려고 합니더. 전번 저의 아버님 장례에 문상하시고 장지까지 와주셔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더.”하고 김동산과 구장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다.    

   

 또 김동산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아들 초등학교 입학문제로 크게 다투다가 다쳐 몸져 누워 신음하던때가 벌써 십년 전의 일이었다. 어느날 군용 트럭 한대가 영생원으로 들여 닥쳤다. 또 한대 지프차에는 군인과 순경이 함께 내렸다. 참으로 슬픈 이별의 순간이었고 모두의 가슴을 찢어놓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먼저 도착한 면서기가 명단을 꺼내어 한사람 한사람 호명을 하니 여기저기서 흐늑이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언 십수명이 가지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가족들은 통곡을 한다.

 “영생원 주민 여러분, 이번에 정부의 시책에 의해 전염성이 있는 양성인 사람들은 소록도로 보내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정기적인 검진을 통하여 선별작업을 계속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면서기가 근엄하게 한마다 한다. 이어서 해당자를 불러 줄을 세우고 호명된 순서대로 사람들은 트럭에 태워졌다. 안갈려고 발버둥치며 땅을 붙잡고, 안탈려고 몸을 버티고 사지를 뒤흔드는 모습은 애달픈 장면이었다. 김동산의 여동생과 매제는 물론 어린 조카들도 불려나왔고. 수십년간 같은 마을에서 서로 부둥켜 지내던 이웃들도 그랬다. 그 트럭은 먼지를 날리며 이수정 마을에서 처녀 한명을 더 싣고 가야로 떠났다. 한장의 명령지가 공동체를 이루어 온 피붙이와 이웃들을 생이별하게 하였으니 저멀리 여항산도 울고 윗 동네 비봉산도 옆 동네 조남산도 함께 울어버렸다. 정말 그 고장은 시련이 가실줄을 모른다. 6.25때 여항산 전투에서 피아간에 숱한 피를 흘렸고, 이제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을 저멀리 섬으로 실어갔다.   

   

 김동산은 여동생과 그의 가족들을 소록도로 보내고 나서 가만히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전염성이 없는 음성환자로서 판정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해졌다. 가족 친지들과의 이별이 남은 그들에게 주거이전의 자유를 가져다준 셈이긴 하다. 그런데다 옆 동네인 갱골과 아랫 동네인 이수정 마을에서 축산오폐수로 인해 식수가 오염되었다는 시험결과가 나왔다. 또 주민들의 민원과 군청의 단속으로 양돈과 양계를 할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의 생계가 막막한 그들은 새로운 살길을 찾아서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게 되니 또 다른 시련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동산은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을 설득하여 도회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어이, 하운아! 이제 이동네에서 살길이 막막하니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보자. 자식들은 멀쩡하니 도시에 가서 기술도 배우게 하여 살길을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맞다. 동산아!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봤는데 마산이나 부산으로 가면 어떨까. 내 생각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산다는 부산으로 가면 서로 차별안하고 괜찮을 것 같은데.”하고 김동산과 하운은 서로 생각을 말하고 뜻을 모아 결행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일시 정착한 곳은 부산에서도 변두리인 구평마을이었다. 그곳은 이미 같은 병을 앓은 흔적이 있는 사람들이 몰려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자립형 축산이나, 가구 제조를 하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던지 텃세는 있는 법인지 새로 들어온 그들 일행들은 홀대를 받았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듬어 주지 못하는 것 또한 장애 아닌 장애이었다. 동산과 하운은 힘도 정정하고 기질도 강한데다가 건장한 아들들이 몇명씩이나 있어 금방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약한자에게 강하고 강한자에게 약한 생리가 작동하는 세상은 어디로 가던지 마찬가지 이었다. 어느날 김동산은 아들 춘우를 부른다.

 “춘우야, 내가 손이 불편해서 운전면허증을 딸수가 없구나. 너가 손이 멀쩡하니 운전면허증을 따거라. 그러면 내가 차를 한대 사주마. 그리고 나서 정비기사와 전기기사 자격증도 함께 따거라.”

 “예. 아버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배운 기술은 없지만 운전기술도 기술이고 정비도 그렇고 하니 앞으로 그 자격증이 우리 집안의 사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김동산은 아들을 우선 운전학원에 보내 운전면허증을 따게 하였고, 그런 다음에 정비기사와 전기기사 자격증도 함께 땄다. 그는 손이 불편하여 운전면허증을 딸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들이 그의 손발이 되어 빠른 이동의 자유를 누리게 해주었다. 김동산은 아들에게 타이탄 트럭을 사주었고 그와 가족들을 싣기도 하고, 짐을 싣고 이리저리 일거리를 만들어 나갔다. 그가 아들로 하여금 운전면허증을 따게 하여 자동차 운송을 시작한 것은 분명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는 탁월한 언변과 붙임성으로 구평마을의 물류를 일부 담당하게 하여 일단 안정적인 가업을 갖게 되었다. 가구를 만드는 원자재를 배달하고 완제품을 주문자나 시장에 싣고 가서 운임을 받으니 현금이 들어와서 좀더 큰 집을 마련할수 있었다. 구평마을의 양계장에서 나오는 계분을 농사용이나 원예용으로 포장을 하여 파니까 그 또한 수입이 괜찮았다. 김동삼이 구평마을로 들어간 후로 물류가 뒷받침이 되니 마을 주민들의 소득도 점차 늘어가서 그는 마을 대표로 뽑혔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았지만 처지가 비슷한 이들에게 그의 언변과 활동성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항상 평화만 오는게 아닌가 보다. 도시가 팽창해 나가니 냄새나는 양계장을 아파트 주민들이 못하게 하는 민원이 들어왔다. 고개 넘어 장림마을에 아파트를 지으려는 건설회사가 그 민원을 앞장서서 하고, 한편 구청에다 고발도 하고 하여 적군만 있고 원군은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어느날 건설회사에서 몇명의 협상자를 보냈는데, 그들은 전문적으로 민원을 해결하는 용역회사의 주먹들이었다.

 “보시오들! 여기 밑으로는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서게 되는데 양계장을 그만 두고 건설회사의 보상금을 받아 이곳을 떠나주시오. 구청에서도 그럴 방침이고 불응하면 행정대집행을 한다고 하니 순순히 따르셔야 서로 편할 겁니다.”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이마에 칼자욱이 있는 남자가 버릇없이 말한다.

 “그 당치도 않은 말씀들 하시오. 우리는 나라에서 이곳에 정착하도록 보장을 받았고, 세금도 내고 국민으로서 할일을 다하고 있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요. 우리는 이제 더 갈곳도 없고 바로 앞 감천 앞바다에 빠져 죽거나 이곳을 지키느냐 선택만이 있을 뿐이오.”

 “그럼 우리들 하고 한번 해보자는 말이오. 좋소, 말이 안통하면 다른 방법이 없지요. 야들아, 이분들을 저 바깥으로 모셔라. 공부를 안해서 그런지 말귀를 알아듣지를 못하네.”하고 그 무식하게 생긴 남자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면 말한다. 김동산은 사생결단을 하고 주민들에게 한치도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한번 밀리면 그들의 미래가 없기에 사즉생의 각오로 그들과 맞섰다. 정말로 주민들은 용기있는 대표를 믿고 그 용역패거리들과 맞섰다. 김동산이 선두에 나서고 하운과 그의 아들들이 전방에 섰다. 싸움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깡다구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초반 싸움은 약간 밀렸지만 주민들이 가세하니 역전이 되었다. 그들은 표정도 무서웠고 투지 또한 무서웠다. 넘어지면서 용역들의 어깨와 귀를 깨물기도 얼굴을 할퀴기도 하니 그들은 못 견디고 두손을 들고 냅다 도망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청에 그들을 보호해야한다는 인권단체의 청원이 들어와 매스컴을 탔다. 더이상 그들을 벼랑으로 내몰아서는 안되며 상생은 아니더라도서로의 생활터전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이 되었다. 도시의 팽창으로 인한 아파트 건설은 좀더 잘 살기 위한 가진 자들의 이기심 때문이기에, 그 터전을 지키려는 장애인들의 권리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당당히 그곳을 지킬수 있었지만 환경단체의 권고에 의해 양계장은 자발적으로 폐쇄하고 가구 제조에 온 힘을 쏟았다. 목재를 대패질하여 가구를 만들면 무늬를 조각하여 넣고 옻칠을 하고 마무리하는 분업을 하여, 모양과 품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자신들 내면의 아름다움을 창의적으로 조각하고, 아름다운 피부를 그리듯이 반질하게 칠하여 딸을 시집보내듯이 내보내니 그들은 장인이기도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김동산은 가구 운반의 물류 부터 시작해서 마을 주민의 교통수단으로 마을버스 운행을 허가받아 운수업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내었다. 몇년간 사업을 하다보니 운반용 트럭과 승객용 승합차가 몇대나 되었다. 트럭은 같은 장애인 동리인 용호동까지 짐을 운반하기도, 공사장의 자재를 실어나르기도 하여 매년 매출이 늘어서 부가가치세를 제법 신고하고 납부하였다. 이제는 당당히 트럭이나 승합차에다 영생운수라는 상호를 표시할 정도로 지역에서는 이름이 나있었다. 늘어만 가는 물류를 감당할려면 중고 트럭과 승합차를 몇대 더 사고 운전기사를 채용하여야 하니 자금이 필요하였다.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도 여전히 부족하였다. 그래서 거래하는 은행을 방문하니 담보력이 모자라니 신용보증서를 발급해 오라고 하였다.

 그는 “뭐 이런 좋은 제도가 다 있노. 정말인지 믿기지가 않네.”하면서, 다시 한번 은행직원에게 물으니 신용조사를 하여 평점이 나오면 보증서를 끊어준다고 하여 좋은 나라가 되어가는구나 하고 신기해 하였다.


그렇게 하여 김동산은 그의 직장을 찾아와서 신용조사를 받고 통과되어 오천만원이라는 자금을 구할수가 있었다. 지금껏 누가 장애인들인 그들에게 담보도 없이 돈을 빌려주었단 말인가. 고향에서는 춘궁기에 부잣집에 장리를 내어 먹었지만 그 무서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전답을 내놓은 경우는 있었다. 그런데 보증서를 들고 가니 은행지점장이 특별히 우대금리를 적용하여 주니 고마운 사람들이구나 생각했다. 하기사 그들도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고, 미우나 고우나 국가의 시책에 따라 뼈아픈 이별을 하면서 참아내지 않았던가. 김동산은 이제 국가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애국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는 아들대에서는 장애도 없는 정상인으로서 대접을 받을수 있게 되었다. 아들은 손발도 정상이요 피부도 탄력이 있으니 혼자서 시내를 마음껏 싸돌아 다녀 오기도 하였었다. 그의 아들은 같은 마을에 사는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일년만에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얻었고, 그 아들이 염려하였던 이상 증상은 없었다. 그의 아들도 그가 즐거워 하였듯이 춤을 추었다. 가정에는 삼대가 함께 살며 앞으로 살아갈 재미를 생각하여 행복해 하였다. 그는 아파트가 들어선 시내를 내려다 보며 고향의 읍내사람들을 대하듯 남몰래 큰소리를 치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이넘들아, 이 김동산이가 죽지 않고 이렇게 당당히 잘 살아가고 있는게 보이느냐. 너그들 보다 세금도 더 많이 내고 이웃들과 옹기종기 모여 알콩달콩 잘 묵고 잘 산다. 이제는 너그들이 상넘들이고 우리가 양반이 되었능기라. 우리는 돈은 그리 많지 않지만 행실은 너그 보다는 몇배 바르게 산다. 잘 알긋나.”      


 그는 영생운수 김동산 사장을 만난지 20여년이 흐른 후에 고향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아버지도 얼마 전에 돌아 가셨기에 산소를 둘러보고 독립유공자이신 국필 할아버지의 추모기념비도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날은 청명한식인 식목일이라 많은 성묘객으로 고향마을 가는 도로가 붐볐다. 무진정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선산에 들러 성묘를 하고 내려왔다.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수정 마을에서 영생원 쪽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할아버지 기념비석을 찾았다. 조용히 비석에 예를 표하고 저멀리 여항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승용차 두대가 길가에 정차하는게 아닌가. 그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먼저 내리고 잇달아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또 내렸다. 그 노인은 그가 서있는 비석쪽으로 걸어오더니 한마디 한다.  

 “야들아,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가자. 이 비석이 오래 되었는데 비면에 흠집도 없이 잘 보존되고 있네. 마을 사람들이 독립유공자 비석이라고 잘 관리해주고 있나 보다.”

 “아버지, 이 비석은 어느 분의 기념비인가요. 오늘 따라 이곳에 내려 직접 보시는 걸 보니 궁금합니다.”

 “허허, 그래. 이 비석은 너그 할아버지하고 아주 친했고 우리 영생원 마을을 도와주었던 집안의 비석이다. 이 비석의 주인공은 국필이시고, 그의 바로 위 형님 분이 국량이신데 그 어른이 우리 가문의 은인인 셈이지.”하고 아들과 손자들에게 들어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먼 발치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그는 불현듯 이십여년 전의 장면으로 갑자기 빨려들어간다. 영생운수 김동산 사장이 맞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그 노인은 뒤로 돌아서서 차를 타려고 걸어간다. 유심히 그의 오른 손을 보니 모과가 하나 들려있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두 대의 승용차는 출발하고 금방 새터에서 갱골을 거쳐 영생원 가는 길로 접어 든 것이 아닌가. 아마 청명한식일이라 고향의 부모님 산소에 성묘하러 온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신기하게도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김동산 사장을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 좋은 인연은 어디에서던가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때 약정서에 기재된 한자로 된 세글자가 클로저업된다. 金同山이라고 특이한 한자 이름이었다. 아마 그의 이름 속에 그의 꿈과 바람이 담겨있다고 본다. 그의 마을에서 남쪽으로는 여항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同旨山이 있는데 김동산의 아버지가 그 이름을 따와서 붙인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들이 사는 세상은 함께 도우며 어우려지며 평등하게 살아가고, 아들도 같은 산아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데서 지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또한 자기 아들의 이름을 春雨라고 지어 주었는데 봄비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게 하고, 생명과 희망을 피어나게 하라는 뜻에서 지은거라고 보인다.      


 이수정 마을에서 갱골마을 까지 펼쳐진 논에는 보리가 수북히 자라고 있고, 영생원 마을에서는 보리피리 소리가 바람타고 애잔하게 들려온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자 잔인한 계절이라고 하였던가. 무르익어 가는 보리밭에는 꿩들이 알을 까고 하늘 위에는 솔개가 날고 있다. 기쁨과 슬픔은 항상 함께하며, 보리가 다 익으면 새로운 생명을 심을 준비를 해야 하는가 보다. 저 무수한 슬픔을 견디어 온 여항산 자락의 마을들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 가며 오늘도 변함없이 살아가고 있다. 옛 사람들이 떠난 그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 아픈 역사를 깔고 앉아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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