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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3화. 여항산 시산제

여항산 자락에서 벌어진 슬픈 사연을 적은 글

by 벽운

여항산 시산제

아마 2000년 대 초 여름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향의 진산인 여항산을 군북 쪽에서 오르기로 작정하고 무궁화 열차를 탔다. 군북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서 사촌마을 저수지까지 걸어갔다. 평탄한 길이지만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숨을 돌리고 산 중턱의 유서 깊은 의상대까지 치고 오르기로 하였다. 산록은 녹음으로 우거져 푸르고 간간이 불어오는 산바람은 땀을 씻어 주어 시원하였다. 의상대를 갈 적에는 항상 쉬어가는 장소가 있다. 그곳은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산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서있고, 길가에는 큰 소나무가 등이 굽어져 풍상을 견뎌내고 있다. 그곳에 앉으면 항상 애잔한 생각이 솟아오른다. 아마 6.25 전란 시의 아픈 역사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의상대에 도착하여 대웅전에 절하고 다시 정상을 향하여 오른다. 그날의 일정은 항상 그랬던 대로 미산고개에서 좌측으로 틀어서 저수지가 있는 미산마을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막상 고개에 이르니 남쪽으로 펼쳐진 정경이 나를 그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닌가.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처음 가보는 길로 가기로 하여 우측으로 틀었다. 그 길은 창원시 진전면으로 부산으로 갈 때에는 마산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평소 모험심이 많은 나는 초행길을 저벅저벅 한가로이 발걸음을 옮겨가니 한 시간도 안 걸려 산아래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 마을의 이름은 여양리라고 마을 입구 간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쪽도 여항산의 물을 받아 미산저수지처럼 또 하나의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마을 입구에 서있는 안내 간판에 눈길이 갔는데 깊이 그 사연에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6.25 때 보도연맹원 학살의 장소가 있다고 가리켜 주고 있었다. 아마 책에서 신문에서 그런 사실을 보고 들은 적은 있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나의 발걸음이 미산고개에서 여양리 방향으로 틀게 한 무슨 사연이 있지 않았나 싶어 그 인연에 따르기로 하였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비슬광산이 있는 계곡으로 걸어 올라갔다. 계곡은 녹음에 가려 그늘을 만들고 암반 위로 시원하게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점점 오르니 물소리인지 산울림 소리인지 이상한 곡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환청이었을 것이다. 조금씩 더 올라가는데 위쪽에서 흰 재킷을 입은 중년이 넘은 남자분이 헛기침을 하고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비슬광산터가 다 되어 갑니까.”

“뭐 할라꼬 거기를 찾습니까. 볼만한 구경거리가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마을 입구 간판에 슬픈 사연이 적혀있어 한번 찾아가보려고요.”

”허허, 선생님도 참 딱하십니다. 그곳은 귀신들이 울부짖는 음산한 곳이니 함부로 거기로 갈 생각을 마십시요. 내하고 바로 내려 가입시더.“하고 그 사람은 별 사람을 다 본다는 듯이 핀잔을 하며 말리기도 하였다. 보통 산에 가면 등산복 차림인데 그 남자는 그렇지 않았고 배낭 대신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충고도 듣지 않고 계속 올라가니 또 다른 안내간판이 너덜겅 지역에 비스듬하게 꽂혀있었다. 바로 마주편에는 비슬광산이 잡목에 가려 아궁이처럼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곳에 가보니 입구는 막혀있었고 주변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너들들이 뒤엉켜 있었다. 맞다. 바로 그 장소인 것이다. 폐광 속에 몰아넣어 총을 쏘고 입구를 막아 불질러 버린 그 장소이며, 그 시체는 너덜겅 속에 묻어 버린 곳이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본다. 내가 그곳을 오게 된 연유가 무엇인지, 겁 없이 무서운 곳을 찾아왔는지, 별난 취미인지, 무슨 하소연을 들어줄 양인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여양마을로 내려와서 대정리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니 오후 늦게야 한대가 있다고 마을 사람이 말한다. 용케도 그곳으로 가는 공사용 트럭을 얻어 타고 대정마을 근방에 내렸다. 마을회관에는 늦은 오후인데도 아직도 태극기가 국기 게양대에 걸려 펄럭이고 있었다. 마산 가는 버스 시간이 한 시간여 남아 있어 인근의 식당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하여야 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메뉴가 있는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구석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갈빗살에다 소주를 한병 시켜 서서히 들이키니 오늘의 산행에 대해 되돌아보아 지고, 여양리에 가게 된 사연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마주편에 있는 탁자에서 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여양리 산길에서 만난 그 사람이 분명하였다. 서로 눈인사를 하다가 그분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선생님은 그곳에 뭐 할라꼬 가셨능기요. 취미가 등산이신 것 같은데 그런 곳은 함부로 찾아다니시면 귀신이 달라붙으니 조심하이소.”

“허허, 선생님도 별 걱정을 다하십니다. 저야 산도 좋아하지만 사연이 있는 산을 타기를 좋아하지요. 태백산을 많이 타봤지요.”

“태백산은 뭐할라꼬 자주 가셨소. 시간이 많이 남아 한량처럼 지내시군요. 그냥 자기 일에 충실하면 되지 무슨 사연을 찾아다니시고 그래요!”하고 아까 처음 만났을 때처럼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한가하게 산에나 다니고 낭만이나 찾으러 다니는 걸 다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툭 툭 던지는 한마디가 세상에 불만이 많은 건지 남에게 충고하기 좋아하는 스타일인지 모두가 해당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다가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게 되었고 버스시간을 보니 한 삼십 분 남짓 남은 것 같았다. 앞에는 여전히 아까 그 중년 남자가 혼자서 식사를 겸하며 술을 한잔씩 기울이고 있었다. 표정에는 즐거움 보다 씁쓸함이 소주 내음처럼 풍겨왔다. 나는 취기가 올라 예의를 무시하고 다시 그 남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혼자서 그곳에 왜 가셨는지요. 차림새를 보니 등산객은 아니게 보이는데 말입니다.“

“허허, 선생님도 참 별스럽습니다. 내가 그곳에 간 걸 알아서 뭐할라꼬 그러능기요. 우리 아버지 산소가 그곳이라 갔다 왔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깊은 산골짜기에 산소가 있다고요.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방천지에 너덜겅만 흩어져 있는 곳이던데요.”

“허허, 우리 아버지가 바로 그 너덜겅 속에 잠들고 있지요. 슬픈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참......”

“아, 그러셨군요.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고향이 여항산 너머 함안면 이수정 마을입니다. 모처럼 이쪽 방향으로 넘어가고 싶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네요.”

“오우, 그래요. 그러고 보니 같은 고향 사람이시군요. 저는 군북 사촌이 고향이지요. 우리 아버지 외갓집이 그 동네라고 하던데 나도 옛날에 그곳을 지나친적이 있지요. 사월초파일에는 연못에서 낙화놀이도 한다고 하데요.”

“아, 그래요. 오늘 내가 군북역에 내려 사촌마을 저수지를 지나 의상대를 들러보고 이리로 내려왔지요.”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내가 어릴 적에 보도연맹원으로 몰려서 진주교도소에서 있다가 여양리에서 죽었지요. 내가 해방둥이이니 다섯 살 때인가 그렇군요.”하고 그 중년 남자와의 이야기는 이어졌고, 마침내 들어온 순서대로인지 그분이 먼저 일어서 나갔다. 나는 버스시간이 조금 남아 식당에 잠깐 더 머물렀다. 주인아줌마가 앞자리의 탁자를 정리하면서 한마디 한다.

“오늘은 그 손님이 말을 많이 하시데요.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들러서 술을 한잔씩 하고 갑디다. 여양리인가 무슨 산골에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왔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처음에 하도 말이 없기에 벙어리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술 한병 더주시오.’하여 깜짝 놀래기도 하였답니다.”


“이곳 진전면은 좀 쓸쓸한 사연이 많지요. 6.25 때 국군에게 죽고 인민군에게 죽고 하여 마을마다 과부들이 넘쳐났었지요. 또 여양리라는 곳에는 그 넓은 너덜겅에 어디에 파묻었는지 알 수 없어 시신을 찾을 수가 없기에, 그 자식들이 어찌 올바른 정신을 갖고 살아가겠습니까. 이 모두 다 일본넘들이 저질런 죄의 씨앗이 아니겠능기요.”하고 나와 비슷한 연배의 주인아주머니가 퍽 정확한 역사의 진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버스시간에 다되어가기에 식당을 나왔다.


그 중년 남자의 할아버지가 군북장터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경찰서에서 갇혀 있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반병신이 되어 풀려 나기도 하였단다. 한문은 잘 배웠고 한글도 잘 아는 글깨나 하는 선비이었으며, 일본 지주들에 맞서 농민조합운동을 하여 소작인들과 머슴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도 독자이며 그의 아버지도 독자이고 그 중년 남자도 그러한 삼대독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해방을 못 보고 돌아가셨고, 그의 아버지는 위로는 누님 두 분이 있어 가장이 되어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었다.


6.25가 터지던 해 여름에 갑자기 아버지가 군인과 경찰에 끌려가 진주교도소에 수감이 된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끌려가는 걸 보고 어린 그는 엉엉 울기만 하였지 무슨 큰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었다. 어머니가 외삼촌과 함께 진주교도소를 찾아 면회를 신청하니 받아주지도 않아 돌아왔는데, 인민군이 진주를 점령하고 마산 방면으로 물밀듯이 쳐들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진주교도소에 수감된 보도연맹원이 어디론가 트럭에 실려갔다는 소문이 또 들려왔다. 그 이후에는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소문에 어느 곳으로 끌려가 바다에 수장되었거나 산골로 끌려가 총살되었을 것이라고 소문이 들려왔다.


“우리 어머니께서 참으로 난감하였겠지요. 마침 그 여항산 자락이 아군과 인민군이 치열하게 싸워 수많은 인명이 죽어나간 곳이니, 어디 어느 곳에서 시신을 찾을 방도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우리 마을에도 몇 집이나 되는데 한날을 정해 제사를 모시지요. 군북지역은 6.25 때 좌우간에 대립이 심해 인민군이 점령한 몇 달 동안은 인민재판으로 경찰이나 군인 가족도 죽창에 죽기도 하여 이웃 간에도 서로 못 믿는 세상이 되어버렸지요.”하고 그 중년 남자가 한 말이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 중년 남자의 슬픈 가족사가 가만히 놓아 주지를 않는다. 그는 슬픈 가족사를 숨기고 살아왔고 마지못해 나에게 털어놓았지만 술이 깨고 나면 후회를 할지를 모른다. 수십 년간에 그의 입을 단단히 걸어 잠그게 했던 그 여양리 사건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가 없었고, 하소연할수록 더욱더 가중되는 무서운 폭압이 그를 벙어리로 만들고 말았는가 보다. “뭐할라꼬 그런 사연을 찾아 다니능기요.”하던 핀잔이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한마디었으니, 그가 겪은 인생살이 또한 짐작이 갈만하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하더라도 위험성이 없다고 확신하는 경우에 한 마디씩 내던지는 게 습성이 돼버린 듯하다.


자기의 할아버지가 일제의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조합운동을 한 것이 왜 불온하다고 판정하였으며, 아무 죄 없는 자기의 아버지를 잠재적 불온세력이라고 잡아간 것은 무슨 이유이던가. 그분은 진실이 무엇인지 어느 것이 정의인지 모르는 정체성의 혼돈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았다.


그때는 6.25가 터지고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급격히 밀려와 부산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는 만약을 대비하여 각 지역의 형무소에 수감 중인 보도연맹원을 처리하여 후환을 없앤다는 명분아래 재판 없이 즉결 처분하게 된다. 진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보도연맹원은 양쪽 백미러 옆에 태극기를 매단 몇 대의 군용 트럭에 실려 반성의 발산재를 넘어 대정마을을 거쳐 여양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손을 뒤로 묵힌 채 비슬광산으로 몰아넣어져 한마디 억울함도 말하지 못하고 운명의 강을 건너가 버린 것이다.


나는 몇 년 후 여항산에 시산제를 지내는 산악회의 버스를 탔다. 여항산을 우회하여 내려와 미산저수지 어느 문중의 산소터에서 점심을 먹고 노래자랑을 하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날은 산악회 회비만 내면 점심식사를 무료로 제공해 주고, 거기에다 구워 먹을 소고기에다가 석쇠까지 주고, 소주에다가 소고깃국을 무한 리필해 주는 파격적인 시산제인 것이다. 미산마을 출신이 객지로 나가 출세하여 매년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대접한다고 들었었다. 나는 여항산을 등산하고 내려와 정해진 장소에서 음식과 술을 잘 대접받았다. 그 시산제는 여항산 전투에서 죽은 고혼을 달래기도, 여양리에 이유 없이 묻힌 주검을 기리는 것인지, 출세한 사람이 고향 진산에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지 알 수는 없었다.


거기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몇 년 전 여양리에서 만난 그 중년 남자이었다.

“어이구, 혹시 여양리에서 처음 보고 대정마을 식당에서 만난 선생님이 맞지요. 우리 산악회에 우찌 알고 이렇게 오셨소. 그 참 무슨 인연이 있기는 있는 갑다.”

“선생님, 오랜만이군요. 참 희한한 일이군요. 몇 년 전에 여항산 뒤쪽 여양리에서 만났는데, 오늘은 이곳 미산리에서 만났군요. 저는 한 번씩 시산제가 있는 때에 이 산악회를 따라옵니다. 너무 대접이 좋아 넘길 수가 없기도 해서요.”

“그러셨군요. 저는 이곳 산악회의 정회원이고, 이 산악회는 고향 분들이 많이 들어와 있지요. 여항산이 고향 진산이니까 말입니다.”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산악회 버스가 종점인 부산 조방 앞에서 등산객들을 다 내려놓았다. 나는 내리면서 한번 그 중년 남자의 동정을 살펴보니, 그분도 나와 눈길이 닿았다.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선생님 몇 년 전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필시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여기 조방골목 돼지국밥집에서 소주 한잔하고 가입시더.”

“안 그래도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하고 골목 깊숙이 장사가 잘 안 되는 듯한 손님이 거의 없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또 무슨 긴히 말해야 할 사연이 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였다.


“지가 고향에 살기가 싫어 어머님을 모시고 실향민이 많고 차별을 하지 않는 부산으로 내려왔지요. 배운 게 없다 보니 조그만 고물상을 열어 쇠붙이를 모아 팔아 근근이 생활하였는데, 옛날 촌에서 보던 엿장사 비슷한 것이지요.”

“어이, 고물 삽니다. 쭈그러진 냄비나 부서진 솥을 삽니다. 소리를 들어보셨지요. 바로 그런 일을 하였지요.”

“내가 살아온 인생사를 모아 놓으면 몇 권의 소설로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한 번은 리어카에 고철을 싣고 끌고 가는데 파출소에 이상한 신고가 들어가서 절도범으로 몰리기도 하였었지요.”

“파출소서에 가니 신원조회를 해보고 사상이 불순하다는 둥 자기들끼리 ‘빨갱이 새끼네.’하면서 조롱하던 말을 듣곤 하였지요. 길가에 리어카를 무단으로 세워두었다고 구청에서 트럭에 싣고 가버린 적도 있고, 참말로 우찌 다 말로 하겠습니꺼.”하고 긴 한숨을 토해 내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절도범이라는 오명도 아니고 바로 “빨갱이 새끼 네.”하는 말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빨갱이 이니 그 새끼라는 말인지, 그 자신이 빨갱이 놈이라는 말인지 둘 다 해당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 괴로움을 견디어 내기 위해 교회나 절에 나가셨는가요. 주변에 인력으로는 해결이 안 되니 종교에 귀의하는 분들이 많던데 말입니다.”

“맞습니다. 내 자신이 해결을 할 수도 없고 견디기 힘들어 교회니 성당이니 이리저리 좀 다녔습니다. 우리 집 뒤에 절이 있어서 목탁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기도 하여 자연스레 절에 다니기 시작했었지요.”

“아무래도 나 하고는 절이 맞는 것 같습디다. 우리 어머니도 절에 다니셨고, 우리 마을 여항산 자락에 의상대 절이 있지 않습니까. 어릴 때 어머니의 손에 끌려 그 절에 다녀오곤 한 기억이 좋았으니까요.”하고 그의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달려간다. 실타래를 풀듯 냇물이 흐르듯 줄줄 그야말로 청산유수이다.


“열심히 하다 보니 고철 시세도 좋았고, 마음씨 좋은 어느 공장 사장님의 도움으로 몇십 평이나 되는 공터가 달린 땅을 사서 기반을 잡아나갔지요.”

“가족관계는 어떠한가요. 홀어머니 외에 다른 형제들이 있던가요.”

“위로는 누님이 한분 계셨는데 세상이 싫다고 절에 들어가 비구니 스님이 되었고, 아래 여동생은 삼화고무인가 뭔가 하는 신발공장에 들어갔었지요. 내가 어머니를 모시니까 여동생이 자주 들렀지요.”

“그러다가 고물상하는 착실한 동생뻘 되는 사람에게 여동생을 소개시켜 처남매제가 되었고, 그 둘은 화목하게 잘 산답니다.”

“문제는 어머니가 치매는 아닌 것 같은데 한 번씩 그 옛날 무엇인가에 집착하여 어떤 것을 보면 깜짝깜짝 놀래고 그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 신경쇠약에 걸려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김사장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런 상황이 되면 누구인들 정신을 바로 가지겠습니까. 이게 우리 모두의 불행이 아니겠습니까.”하고 김사장과의 대화는 이어지고 술도 몇 순배나 돌았다.


“자제분들은 몇이나 되고 잘 키우고 있는지요. 좀 예의에 어긋났는지 모르겠지만서도요.”

“어이구,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안 그래도 우리 애들 자랑을 좀 하려고 했었지요. 위로는 아들이고 다음이 딸 하나, 막내가 또 아들이지요. 이제야 삼대독자에서 해방이 되어 조상들에게 떳떳하게 되었습니다.”

“큰 아는 카이스트에 입학하여 박사의 꿈을 키우고 있고, 딸애는 간호사로 대학병원에 근무하고, 막내는 이제 고등학교에 갓 들어갔습니다. 늦둥이인 셈이지요. 내가 그만할라는데 어머니께서 하도 닦달하셔서 결국은 삼대독자를 면하긴 하였습니다. 허허.”하고 그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퍼져나간다. 그의 어머니는 한 번씩 아들에게 당부를 하였다고 한다.


“상열아! 너그 아부지가 죽은 것은 억울하지만 겉으로 드러내면 절대로 안된다. 그냥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피해버리고 일체 옳니 그르니 하면 또 낭패가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니가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 알긋제.”

“그래도 너그 할배가 독립운동도 하고 해서 지역에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내가 어릴 때인데 군북장터에서 많은 남녀들이 흰 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하얀 태극기를 흔드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었제. 그때 그 태극기는 잊혀질수 없는 너무나 눈물 나는 우리나라 국기였으니까.”하고 그의 어머니가 정신이 말짱할 때 그에게 노상하는 말이었다.


김상열 사장은 홀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주의를 받고, 신상에 위험을 자초하는 경솔한 언행을 하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오히려 반공의식을 가지고 공산주의를 더욱더 욕을 하는 것을 보았다. 진실하게 심중에 있는 말인지 그 무서운 위험을 더 떠안지 않기를 위해 말을 꾸미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김사장도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6.25가 싫었고 전쟁을 일으킨 공산당을 미워하기도 하였었다. 사업상 만난 사람들의 모임에서 그런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의례 공산주의를 성토하는데 동조하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그의 정신세계에서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안전제일주의적인 요소가 숨 쉬고 있었다.


술이 한잔씩 더 들어가니 김사장의 언성도 높아졌다. 처음 들어올 때의 조심성은 조금씩 물러가고 내심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 같았다.

“허허, 내가 지금껏 숨겨온 마음인지 모르지만 선생님과는 말이 통하는 것 같아 후련합니다. 고향 분이시고 집안의 내력도 저의 집과 비슷한 점도 있고 말입니다. 할매! 여기 수육 조금 더하고 소주 한 병 더 주소.”

“저가 마음이 아픈 것은 어머니가 청상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왜 우리 할아버지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당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농민조합운동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그런 모양이지요.”

“아니, 일제로부터 해방을 하려면 그들과 싸워야 하고, 우리 백성들의 농토를 빼앗아 착취하는 일본넘들에게 맞서 싸우는 것은 공산주의하고 그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김사장님의 억울함을 이해하고 있고 이제는 세상도 바뀌었으니 할 말은 하시고 사십시요.”


“왜 저가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자나 깨나 당부하시고 울며불며 타이르신 것을 어찌 쉽게 내려놓겠습니까.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 소위 말하는 수구꼴통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이제는 할아버지의 공적자료를 찾아서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한번 해보시지요. 쉽지는 않겠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효도를 한다는 셈 치고 말입니다. 꼭 포상을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후손으로서 할아버지의 훌륭한 점을 인정해 주는 것이니까요.”

“아이구, 참말로 선생님은 순진하건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답답합니다. 잘못하다간 그간 잘 참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고 또 한 번 가문에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데 쯧쯧쯧.”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해 보았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일이외다. 우리 할아버지는 선비로서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다데요. 우리 집 가훈이 ‘충성보국’인데 어찌 가훈을 거역할 수 있겠시요.”

“허허, 김사장님은 참으로 고지식하십니다. 내보다 더 하네요. 어머니의 당부는 자식의 안위를 위해 한 말씀이지만 속으로는 그런 바람이 없을 수 있겠는가요. 자신의 소신에 따르면 위험도 있겠지만 이제는 세상도 바뀌었고 삼대독자도 면하지 않았나요. 저 생각은 그러하니 그냥 해 본 말입니다.”하고 김사장하고 속마음을 터놓고 말했지만 그의 고착화된 사고를 바꾸는 것은 어렵게 보였다.


한 번씩 내 말에 동의하는 듯 간간히 탁자를 두드리는 것을 보니 내심은 어떠한지 알바가 없었다. 이제 시간도 제법 흘렀고 술도 많이 들어가서 대화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김사장에게 어머니의 건강상태에 대해 물었다.

“김사장님의 모친은 지금 상태가 어떠신가요. 치매는 아니시라고 해서 다행이긴 합니다.”

“예, 저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잘 알아보고 말씀도 제대로 합니다만 무엇을 겁내고 있는 게 분명합디다. 한 번씩 외출을 할 때 동사무소나 파출소 앞 국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를 보면 가슴을 치며 괴로워합니다. 또 태극기가 달린 경찰차나 군용 차량이 지나가면 무서워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을 합니다만 해결책이 마땅치 않구만요.”

“아, 그러세요. 태극기를 왜 두려워할까요. 우리나라의 상징이고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들어 있는데 말입니다.”

“또 특이한 것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나, 축구경기를 할 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활짝 웃고 하십니다. 단, 관공서에 펄럭이는 태극기나 군용 차량에 달린 태극기를 보면 비명을 지르니까요.”


“왜 같은 태극기인데 그럴까요. 무슨 큰 충격을 받으신 것이 잠재의식 속에 담겨있는 모양입니다. 저가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서도요.”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비슷한 말을 하데요. 아마 오래전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에 충격을 받지 않았나 하고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에게는 가정의 내력을 말하지 않았는데 여기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젊었을 때에는 군대는 꼭 가야 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말씀하셨는데 연로해지시니 조금 변한 것 같습니다.”

“저 생각으로는 면사무소나 경찰지서에서 본 나쁜 기억이 영향을 끼친 모양입니다. 6.25 때 부친께서 잡혀 끌고 갔으니, 그렇게 가슴에 품고 싶은 태극기를 두려워하니 아마 트라우마가 아닌가 여겨지네요.”

“맞는 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군북장터 만세운동 때 흔들었던 태극기를 지금껏 장롱 속에 잘 보관하였다가 3.1절이 오면 꼭 열어보곤 하였었지요. 그러니 태극기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고 어느 장소에 걸려있는 태극기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그러시면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장소에서의 태극기를 보여주시지요. 관공서에는 가급적 가시지 말도록 하시고요.”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어느 방송에 독도를 지키는 모습이 담긴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독도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고 무릎을 치며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올림픽 경기가 있는 때 시상식이 있으면 거실로 모셔와서 함께 보곤 합니다.”

“시상대에 우리나라 선수가 올라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태극기가 게양대를 오르면서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눈물을 한 움큼씩 흘리더라구요.”하고 김사장과의 긴 대화는 마무리가 되었다. 헤어질 때에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여 한 번씩 연락하기로 하였었다.


세월은 흐르고 김사장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매년 봄이면 하는 여항산 시산제에도 그간 참석을 못했으니 차츰 잊어져 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연락을 한번 해볼까 하다가 인연의 흐름에 맡기기로 하였다. 김사장이 하던 말이 자꾸 떠오른다.

“사람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공산주의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한말입니다. 아버지를 잡아가 처형한 정부에 대해서는 분노와 공포를 느끼면서도 말입니다.”


이 말이 나에게 사람 심리의 이중성을 보는 것 같았다. 사회적 가치에 반하건 진실에 어긋 나건, 정의에 맞지 않던 오직 자신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데 대해 새끼를 보호하려는 모성의 본능이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그렇다고 나쁜 짓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아니고 무탈하게 세상을 살아가라는 기대일 것이다. 이제 자식의 생명이 보존되고 세상이 바뀌어 가니 자신의 내면에 잠복되어 있던 진실한 마음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게 아닌가 말이다. 또 김사장이 나한테 한말이 다시 떠오른다.


“선생님은 이미 나이가 드셨기 때문에 출세하고 거리가 멀지만, 사람이 출세하려면 최소한 반공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말입니다.”

“내가 많이 듣던 말이 빨갱이라는 소리였지요. 또 빨갱이 옆에 가면 물이 든다. 한번 물이 들면 빼기 힘들다고 말입니다.”

“허허, 그랬었지요. 빨갱이라고 한번 찍히면 발 붙일 데가 없었지요. 그러니 모두 다 따돌림을 안 당하려고 속을 안내 보이고 ‘멸공’하고 속에 없는 말을 하곤 하였지요. 부모들은 빨갱이로 몰리면 집안이 망하니 한사코 자식들을 반공주의자가 되라고 하였겠지요.”

“하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 어머니 말씀이 귀에 생생합니다. 나도 살기 위해 이미 반공주의자가 된 모양입니다. 허허.”

“나는 내 아들에게는 그렇게 말하기 싫어 학문을 통해 스스로 일어서라고 카이스트로 보냈고, 딸에게도 간호사가 되라고 말했지만서도요.”하고 김사장하고 긴 대화는 이어졌다.


김사장이 나에게 출세하려면 반공주의자기 되라고 한 말은 나의 인품을 깎아내리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단지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태에 대해 비꼬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이 현실을 직시한 정말 정확한 진단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모두들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입신출세의 길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김사장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밑바닥 인생을 딛고 자수성가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 시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울분을 숨기며 자신에게 무섭게 채찍질한 인종의 미덕을 말이다.


요새 정치인들이 선대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또는 드러내기도 하면서 얼마나 승승장구하고 있는가. 반공을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니 공산주의자를 혐오하는 유권자들의 표를 얻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반공만 외치면 친일의 행적을 깔끔히 세탁하여 주는 관대한 풍조가 진정으로 올바른 사회인 것인가 되물어 본다. 정작 미워할 대상은 민족을 갈갈이 찢어 놓은 일본이라는 나라인데, 오히려 친일세력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다른 체제 안에 갇혀있는 동족을 더 미워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 민주화운동이 출세에 도움이 되면 젊은 시절에 실컷 이용해 먹고 늙어가면서는 또 다른 출세를 위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을 하는 것을 보면 참고가 된다.


그의 말이 틀림없이 맞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체제하에서는 반공이 자신을 보호해 주고 출세시켜 주는 묘약이리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김사장이 말한 뜻은 이해하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세태에 영합한 기회주의적인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획일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핸드폰에 김사장의 전화가 화면에 뜬다.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한번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저의 모친의 간병도 있고 해서 이제사 전화드립니다.”

“김상열 사장님 반갑습니다. 모친의 증세는 어떠하신가요. 아직도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아이구, 저의 모친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증세야 호전될 게 있겠냐마는 치매가 오는 바람에 태극기를 겁내느니 하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아마 지쳤던지 기억이 죽었든지 그 둘 중에 하나이겠지요.”

“아이구, 그렇셨군요. 아마 기억상실에 의해 증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게 초인이 아닌 이상 불가능 하겠지만서도요.”

“그리고 어머니가 임종하실 때 할아버지가 만세운동 때 흔들었던 태극기를 품에 안겨드렸더니 얼굴에 미소가 흐르더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태극기의 근본정신에 대한 생각은 올바르니까 비극적인 그때의 사건이 괴롭혔겠지요.”

“그리고 태극기는 우리 민족과 국가의 상징이 아닙니까. 흰 바탕은 순수한 백의민족을, 붉은색은 양을 파란색은 음을, 네 괘는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니까요. 그 속에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있는 셈이지요.”


김사장의 어머니가 두려워하던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치매로 인해 드러나지 않은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치매이지만 할아버지의 태극기를 품에 안고 평안해하는 것을 보니 근본정신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버려야 할 기억은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통화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선생님, 저의 아들이 선생님이 한번 해보라고 하던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해보겠답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기뻐했습니다. 아들이 자기 증조할아버지의 휼륭함을 알았으니까요.”

“정말 잘 되었군요. 아드님이 똑똑해서 자료를 잘 찾아내어 분명히 독립유공자로 선정될 것입니다. 이제서야 가문의 공덕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겠군요.”

“그것은 선생님과 우연인지 인연인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독립유공자 선정이야 잘 되겠는가 마는 아들놈이 조상을 존경하고 가문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니 정말로 다행이지요. 나도 이제 미음이 편해집니다.”

“김사장님, 언젠가 광복절 기념식 때 연단에 올라 표창장을 받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선생님이 덕담을 해주셔서 힘이 납니다. 독립유공자 선정이 되면 몇 년 전 만난 조방 앞 돼지국밥집에서 한잔 하입시더. 나는 아직도 조용하고 은밀한 곳에서 대화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하고 전화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밝게 들렸다.


나는 김상열 사장의 가정사정을 알고부터 그의 남다른 의지와 성실성이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여겨졌다. 그의 인내력과 무거운 입, 목표를 설정하면 기어코 이루어 내는 모습이 독립운동을 하던 그의 조부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끊임없는 순사들의 감시와 투옥으로 몸과 정신이 망가지고 가정을 돌보지 못하다 보니 자식들의 교육에도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은 선비정신이 없었다면 가지를 못했을 것이다.


김사장의 내면에는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못 배운 것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아버지가 억울하게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은 보기 드문 효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식들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올바른 길을 가고 출세보다는 나라에 도움이 되는 길을 가라고 한 뜻에 한편으로 존경심이 드는 것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반공체제에 대해 자식들에게 일체의 평가도 내리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가도록 하였으며, 자신도 이념에 대해서는 이러니 저러니 입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진리를 좇아가지 이념에 물들어선 안된다는 신념을 가진 분 같았다. 그는 격량의 시대를 만나 비극을 맛본 가엾고 선량한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다. 이념이라는 것은 시대의 성향으로, 구름이 흘러가다 비를 내리고,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듯 변화하는 무상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고향에 갈 때면 여항산 너머의 여양리를 그리고, 의상대를 갈 때면 사촌을 지나가면서 김사장 가문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하였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그 높은 산을 탈 수는 없겠지만 여항산 시산제에는 참가하여 억울하게 숨져간 고혼을 달래고, 치열한 전투에서 산화한 수많은 군인들의 넋을 달래주려고 한다. 아직도 여항산 자락 이곳저곳에 묻혀있는 피아를 떠난 무명용사의 주검이 수습되어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금 봄철에 의상대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계곡에는 산복숭아가 꽃을 피우고 등 굽은 소나무가 풍상을 잘 버텨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몸은 이제 늙어 그곳을 가지를 못하지만 옛날에 지나친 추억의 필름을 되돌려 보며 비애의 향수에 젖어본다. 여항산은 동서남북으로 물이 흘러내려 동으로는 주서저수지, 서로는 사촌저수지, 남으로는 여양저수지, 북으로는 미산저수지가 있어 주변의 생물을 키우게 한다. 사촌저수지에서 바라보면 미산저수지는 좌측에 있고 여양저수지는 우측에 있다. 또 주서저수지에서 보면 좌측에 여양저수지가 우측에 미산저수지가 있어 보는 관점에 따라서 좌우가 바뀌는 것이다.


여항산은 산 그 자체로는 생명의 발원지이며 안식처이기도 하다. 자연이 만들어준 순리를 무시하고 좌우로 갈려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갓데미산’으로 그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여항산 산록에는 동서남북으로 물이 흘러내려서 저수지에 고인다. 그 눈물같이 간간한 물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희석되어 옛날 그대로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사람의 마음속에 쌓인 한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건 자연과 사람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여항산 시산제! 더 이상 동족의 피를 흘리는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고 참회하고 발원하는 화합의 제전이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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