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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2화. 소쿠리쟁이

어느 반공포로가 소쿠리쟁이가 되어 정착해 나가는 이야기

by 벽운

소쿠리쟁이


강물은 지금도 유유히 낮은데로 흘러가고 바람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남기며 산을 넘어가고 있다. 구름은 뭉쳤다가 흩어지며 이런저런 만화같은 그림을 그리며 간간이 비를 뿌리며 지나가고 있다. 고향의 산은 그리움을 멀리서 실어보내고 있지만 꿈속에서만 아른 거릴 뿐이었다. 봄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뿔뿔이 헤어진 씨앗들은 산과 들에 뿌리를 내려 새터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산아래 기차역으로 철마는 누구를 찾는지 애달픈 기적소리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다.


날은 초여름이라 산은 푸르고 들은 누렇게 변해있었다. 이제 곧 보리타작을 마치면 모내기를 해야 할 시기라 농촌의 일손은 바쁘기만 하였다. 진동 방향에서 가야로 가는 버스가 자갈길 신작로를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다가 이수정마을에서 멈추었다. 젊은 부부가 손에는 큰 보자기를 두어 개 들고 표정 없이 내렸다. 그남자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만큼 휘청거리는 태극기가 펄럭이며 단번에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둘은 길가의 남순이네 점빵에 들러 사이다를 한 병 사서 컵에 서로 따랐다. 무슨 물어볼 용무가 있는지 힐끗힐끗 여주인인 남순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 동네 구장님 댁이 어딘지요. 찾아가서 여쭈어 볼 게 있어서요.”

“바로 여기서 바라보이는 푹 꺼진 동네 둘째 집인데, 아마 논일하러 갔다가 돌아왔는지 모르겠는데요. 논이 집과 얼마 안 되니 부르면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두 부부는 구장인 해동양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찾아온 이유를 털어놓았다. 새롭게 살 거처를 찾으러 이곳으로 왔으며, 이 동네가 왠지 편안하고 인심도 있을 것 같아 구장에게 신고를 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곳에는 친척도 없고 남자는 다리를 절고 있는 장애를 갖고 있어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갈지가 걱정스럽게 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신상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새로 살림을 꾸려 살집과 일터를 알아보았는데, 그의 말소리는 이북사투리가 희미하게 풍겼다. 아마 실향민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해동양반은 그의 말을 찬찬히 듣기만 하였다. 불구의 몸으로 농사일을 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농촌에서 그일 외에는 무슨 다른 부업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저는 이북 출신으로 피붙이기 없는 실향민입니다. 여기 집사람을 고성에서 만나 죽세공품을 만들면서 생계를 이어왔지만, 그곳은 시장판이라 인심이 순하지 않아 정 붙이기가 어려워 이곳을 찾았습니다.”

“아이구, 그렇군요. 젊은이가 고향에 부모형제도 있을 텐데 천리타향에서 고생을 하게 되었군요. 그러면 소쿠리를 잘 만들 수 있겠네요. 이 동네는 대나무가 많아 기술만 있으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하여 소쿠리쟁이 부부는 구장에게 신고를 하고 마침 혼자 살면서 행랑채가 비어있는 진동할머니집에 짐을 풀게 했다. 구장인 해동양반의 안내로 안동네를 거쳐 윗동네 비탈에 있는 진동할머니댁으로 향한다. 마을회관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게시판에는 ‘숨어있는 간첩을 신고하자’ ‘멸공’ ‘북진통일’이라는 포스터가 어김없이 붙어있었다. 그는 구장으로부터 이북 출신이라는 것을 일절 말하지 말고 그냥 고향이 강원도 북쪽이라 그곳 사투리를 쓴다고 말하고, 다리를 저는 것은 다쳤다고만 말하라는 엄중한 충고를 들었다. 사람들과도 너무 친하지 말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말을 섞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들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 부부는 진동할머니댁 별채에서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곳 이수정이라는 마을은 조씨 집성촌으로 타성들이 간간이 있지만, 마을의 실세는 엄연히 조씨들이고 약간의 텃세도 부리고 있었다. 그곳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런 점을 감내하여야 하고 원주민들은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홀대는 안 하지만 약간씩 경계는 하였다. 소위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구실로 천한 직업과 나쁜 행실을 갖고 있으면 반기지 않고, 입촌하는 사람들도 적응이 안 되면 곧장 떠나가기에 자연스레 정리가 되기도 하였다. 과연 소쿠리쟁이 부부는 어떻게 적응하며 그들이 살고 싶어 하는 동네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였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가서 못 돌아오거나 6.25 전쟁으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집들이 제법 되었다. 안촌할매가 그러하고, 검암댁이나 입곡댁도 그렇기에 일본을 싫어하는 건 당연하지만 몇몇 집은 공산당이라면 이를 갈고 있기도 하였다. 독수공방 하는 과부들이 많고 서방이 돈 벌러 간다는 핑계로 도회로 나가 사실상의 과부들도 넘쳤다. 그런 점에서 소쿠리쟁이 부부는 장애를 안고 있지만 의지할 상대가 있으니 행복의 요소도 없잖아 있는 것이었다. 그들 부부는 구하기 쉬운 대나무를 쪼개고 쪼개어 실과 같이 가늘게 만들어 소쿠리와 바구니는 물론 복조리, 간장 거르개 같은 죽세공품을 잘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선물도 하고 해서 인심을 얻어 나갔다. 비 오는 날이면 헛간에서 새끼를 꼬아 세들어 사는 진동할매를 돕고, 안 받으려는 셋방비를 대신해주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구분되어 사랑방도 다르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갈라져 있다. 대놓고 배척하는건 아니지만 서로를 흉보거나 허물을 잡아서 한번씩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6.25전쟁으로 인민군에 의한 피해자와 국군에 의한 피해자가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민재판으로 죽창에 찔려 죽은 가정도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집안도 있었기에 좌니 우니 하는 것을 함부로 입밖에 내지 않는게 만수무강의 철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독립운동을 한 가정도 있었고 일제에 부역한 집안도 있었으나 세상은 거꾸로 일제의 부역세력이 독립운동가 집안을 핍박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반공청년단장의 완장을 차고 생사 여탈권을 가졌던 장덕술이었다. 그의 눈에 잘못 들어 전쟁때는 몇명이 저승으로 갔고 지금은 불순분자로 몰아 요시찰 대상으로 정하여 괴롭혔다. 장덕술이는 일제 경찰의 순사보로서 앞잡이 노릇을 하였으면서도 그 훈장으로 반공청년단장의 완장을 찬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마을에서는 그의 행실에 대해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단 윗동네에 사는 한사람만이 예외였다.


장덕술은 빨간 물이 든 사람이거나 연좌관계로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눈에 잘못 보이면 사상이 불온하다거나 간첩들과 접선을 할수 있다는 등 제 마음대로 정보를 만들어 올려 밉보인 사람들을 꼼짝달싹을 못하게 하여 군대보다도 순경보다도 더 두려워하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차고 목에 힘을 주면서 읍내 지서를 오갔다.

그들 부부는 점점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고 아내는 사랑방을 오가며 시중을 들고, 잔칫날에는 일손을 도우기도 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의 아내는 음식 솜씨가 좋아 봄에는 쑥을 캐어 쑥털털이를 만들어 사랑방에 가져오기도 가을에는 파를 베어 부침개를 해오기도 하여 하루해가 저문 후 사랑방은 재미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다리가 불편하여 사랑방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부지런히 소쿠리를 만들고 새끼를 꼬았다. 그의 성실함에 끌린 나이가 비슷한 현규와 광수가 그의 집을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금강산 자락의 신계사 근방에 있는 고향의 단풍이 그리우니 덩달아 두고 온 부모님이 그립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어이하랴, 전장에서 살아남았고 복스런 아내까지 얻었고,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니 그 시름도 잠깐이었다.

동년배인 현규와 광수는 심성이 고와 외로운 그를 잘 대해주고 몸이 불편한 것을 잘 도와주었다. 소쿠리를 싣고 가야장이나 함안장에 가려 할 때에는 그 짐을 자신들의 수레에 실어주기도 하였다. 현규는 자기 집뒤의 대나무밭에서 튼실한 대나무를 베어 가져다주었고, 광수는 자기가 지키는 산에서 해온 나무를 몇 짐씩 짊어다 주었다. 그렇지만 동네 개구쟁이 조무래기들이 절뚝거리면서 걷는 그를 밭에다가 콩을 심는다느니 하며 놀리기도 하지만 그는 허허 웃고 마는 여유로움도 되찾았다. 그는 정월 대보름날이면 은혜를 입은 집들에 몰래 마당에 자기가 만든 복조리를 던져 놓고 오기도 하여 마을 사람들은 심덕을 칭찬하였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아내에게 혼자 사는 안촌할매를 찾아보면 어떻겠느냐가 제안하였다.


“내가 이 동네에 오고 싶은 이유야 많은데 어찌 그 집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말일세. 그 할매가 외롭게 보이던데 오늘 저녁에 한번 내가 정성을 들여 만든 예쁜 광주리를 갖고 찾아보면 어떨까 하네.”

“당신이 예전부터 그 말씀을 하시더니만 오늘도 하네요. 그러면 대나무 광주리에다가 쑥털털이를 만들어 담아갑시다.”

그들 부부는 광주리에 쑥털털이를 담아 날이 저물자 안촌할매집을 찾았다. 그는 안촌할매에게 정식으로 큰절을 하고 찾아오게 된 이유를 말하였다. 그 할매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많이 닮았고, 성품도 너그럽고 자비롭게 보였기에 어머니를 보는 듯 한번 찾았다고 말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꼭 고향에 두고 온 저의 어무이를 닮았네요. 항상 지나치기만 하였는데 가까이에서 말씀도 듣고 손도 한번 잡아 보고 싶어 왔습니다. 저는 김가인데 어머니라고 불러도 될런가 모르겠네요.”

“아이구, 무슨 소리 하시요. 우리 동네는 친 어미가 아니라도 모친이라고 하기도 어머니라고 하기도 한다네. 나는 어머니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가 좋더라네. 내 서방이 대동아전쟁에 징병으로 끌려가 못 돌아와 딸만 하나 낳고 대를 이을 피붙이가 없는데 이김에 아들 하나 얻으면 얼마나 조은기고.”

“어머니 그렇게 해주이소, 우리 서방이 친척이라는 울타리가 없어 많이 외로워합니다. 저도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잘 모실께요.”

“그래 잘 되었네. 우리 집도 김가 집안이니 어머니라고 불러도 참 좋겠네. 오늘 저녁에 아들 하나 며느리 하나를 얻었으니 너무 기분이 좋네.”


안촌할매는 딸이 하나 있는데 출가하여 부산에 살고 있어, 명절이나 한 번씩 외손주들을 데리고 오지만 보내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항상 허전하였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스로 아들과 며느리가 되겠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평생 살아오면서 장성한 아들 같은 남자가 스스로 아들이 되겠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있는 것을 관세음보살이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고 믿었다. 그날 밤은 안촌할매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눈물겨운 시간이었고, 소쿠리쟁이 부부는 자상한 어머니를 얻는 기쁨을 맛보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난 후 두 달 만에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창녕전투에서부터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혀 진격이 주춤하였다. 남강을 건너온 인민군 주력부대는 이미 마산을 수중에 넣을 기세였다. 여항산을 경계로 피아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수많은 전사자들이 생겨났다.


김인문은 강원도 고성에서 의용병으로 차출당하여 변변한 훈련도 없이 전장에 투입되었고, 열여덟의 젊은 나이에 이유도 모르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내몰린 것이었다. 두 살 어린 동생도, 같은 동네에 사는 막내 삼촌도 같이 차출되어 한편으로 의지가 되지만 서로의 안위를 생각하니 근심은 두어 배나 되어버린 것이었다. 세명은 같은 소대에 편성되어 항상 같이 움직였다. 남하하면서 낙동강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마산을 눈앞에 두고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화력에 고전하고 있었다. 여항산은 낮이면 국군과 미군이 밤이면 인민군이 차지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졌다.


김인문이 소속된 소대는 정찰과 식량조달을 병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보급선이 끊어지자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니 사실상의 탈취였으며 그 과정은 좋은 말로 정찰이 되는 셈이었다. 그의 형제와 막내삼촌은 여항산까지는 죽지 않고 도착하였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이제는 싸움보다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었고, 지휘관들도 그것을 인정하여 먹고사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밤이 깊어 가면 여항산 자락의 미산마을이나 광정마을을 침입하여 곡식을 약탈하였으나, 그곳은 아군의 전략에 따라 피난을 보내어 더 이상 식량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좀 더 멀리 떨어진 갱골이나 이수정 마을로 찾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그믐달이 희미하게 비치어 사람의 윤곽은 파악할 수는 있으나 정체는 분간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밤이었다. 소대장의 지시에 의해 식량조달을 당일 밤중에 해오라는 특명을 받았다. 김인문은 동생과 작은 삼촌이 한조가 되어 이수정 마을을 털기로 하였다. 광정마을 논둑을 기어서 갱골에서부터는 나지막한 조남산을 빗대어 이수정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하였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는 실눈썹 같은 달이 별빛과 함께 보일릭 말락 길만을 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개들도 총소리에 놀라 산으로 들로 다들 도망갔기에 당연하였지만 인기척이 없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였다. 집집마다 불은 다 꺼져 있어 그 마을도 다들 피난을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동네 안에 한두 군데에 창호지문으로 빛이 보이기도 하여 달빛이 반사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였다. 삼인조 중에 삼촌은 망을 보고 동생과 둘이서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발을 조심스레 들였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방문을 스르르 여는 것이 아닌가.

“주인장 계시오. 지들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양식이 있으면 조금 노나 주시요.”

“걸리면 나도 잡혀가서 편치 못하니 일단 모른 척 넘어가겠소. 부엌 솥 안에 삶은 고구마가 있는데 요기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가져가시오. 얼굴을 보이면 서로 안 되니까 나는 지금 호롱불을 끄고 자겠소.”

그의 형제는 부엌에서 삶은 고구마 한 바가지를 배낭에 쑤셔 넣고 항아리에 담긴 보리쌀을 한 되 남짓 퍼담았다. 그렇게 해서 조달을 마치고 떠나려는데 길가에서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그곳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게 아닌가. 도망가기에는 이미 늦었고 숨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주인장인 할매에게 문틈으로 어디에 숨는 게 좋겠냐고 다급히 하소연하였다.


“대청마루 밑에 장작 틈에 들어가 숨으시오. 들어가고 나면 내가 절구통을 옆으로 밀어 입구를 막아버릴게요. 내가 세 번 대청마루를 두드리면 나와서 알아서 도망가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렇게 위험을 벗어나 삼인조는 합류를 하여 빈약하지만 조달을 마치고 여항산 자락 아지트로 향했다. 광정마을 뒷산을 오르는 순간 뒤에서 엠원 소총이 불을 뿜었다. 혼비백산하며 산을 기어오르니 뒤에서 따라오던 동생이 총을 맞은 것이었다. 그는 배낭을 내팽개치고 동생을 업었지만 등위에서는 피가 타고 흘렀다. 숨소리가 가빠지고 신음소리도 거칠어지고 점점 자신의 목을 껴안고 있는 손목에 힘이 빠져갔다. 어느 순간 큰 경련을 일으키더니 등위에서 울리던 고동이 멋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안전지대에 도달하였을 적에 죽은 동생을 자비롭게 생긴 어머니 같이 생긴 소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서 묻고 낙엽을 덮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영원히 잊혀질지 모르는 이곳 머나먼 산속에다 동생의 주검을 묻었다. 조용히 흐르는 눈물은 그침 없이 쏟아졌지만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가 않았다.

여항산 전투에서 패퇴한 인민군은 이제 지휘관들의 통제도 없이 무리를 지어 백두대간을 따라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막내 삼촌과 함께 겨우 중간 집결지인 덕유산에 도착하였다. 다시 북상하여 소백산맥을 타고 태백산과 오대산을 거쳐 가지만 진로가 막혀 몇 번인가를 소백산까지 밀리면서 패잔병이 되고 말았다. 한겨울의 폭설은 칡뿌리도 찾을 수 없을 정도이고 죽음을 무릅쓰고 절이나 화전민촌을 털었왔지만 그것도 손과 발이 동상에 걸려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무서운 눈바람과 그 보다 더 무서운 배고픔으로 더 이상 군인의 임무를 던져버리기로 하였다. 그의 막내삼촌은 백두대간 어느 지점에서 쫓기다가 서로 헤어지고 말았고 남은 동지들은 죽으나 사나 하산하자고 제안하였다. 지도에 보니 소백산 국망봉을 지나서 신선봉 아래에 구인사가 나오기에 거기로 필사적으로 찾아가기로 하였다. 구도의 길인지 구인의 길인지 그것은 자신들이 사는 구명길인 것은 확실하였다.


그는 이미 두발이 동상에 걸려 진물이 거침없이 발싸개를 타고 흘러내렸고, 두 명의 동지는 손가락이 얼어 손을 쓰기도 힘든 없는 상황이 되어 그들은 소백산 자락 구인사를 향해 눈밭 위에 몸을 던졌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하다 보니 저 밑에 몇 개의 요사채를 거느린 절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빛이 비쳤다. 피아를 떠나 생명의 극한상황에서 절의 품에 안기면 죽더라도 부처님 전에 올려질게 아닌가. 드디어 구인사에 도착하였다. 옷차림만 군인이지 총도 다 던져버린 한갓 산에서 내려온 거지들이 분명하였다.


“아이구, 맙소사. 이 눈보라 치는 날에 이곳을 구원처라고 찾아들 오셨네. 여기는 하루에 몇 번씩 국군들이 들어오니, 도망칠 수도 없고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 잘 선택하셨습니다. 싸운다는 게 하등 하잘것없는 것이지요. 어서 방으로 들어와 몸을 녹이시고 기력을 회복하십시요. 그대들은 지혜로운 분들이니 분명 부처임의 가피를 받은 것이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생명은 고귀한 것이지요. 그 생명을 함부로 거두어 갈 수가 없을뿐더러 살아가야 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지요. 폭설에 먹이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산을 내려오는 고라니나 산양들을 천적인 사람들은 해치지 않고 먹이를 주어 돌려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세 명은 다음날 국군에게 항복하고 군용 지프에 실려 단양으로 갔다. 김인문은 동상으로 썩어가는 다리를 살리기 위해 양발의 발가락을 모두 잘라내었다. 나머지 두 명은 손가락 몇 개를 자르니 모두 다 장애인이 되어버렸지만 소중한 생명은 건졌다. 김인문은 포로로 분류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거기에서도 동지들을 편 갈라 죽이는 잔혹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전향하여 반공포로가 되었다.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고 제3국으로 가려고 하니 불구의 몸으로 견뎌낼 수가 없었기에 통일을 바라보며 남쪽에 남기로 하였다. 포로의 대부분은 전향을 하여 석방되었고, 일부는 동족상잔의 죄업에 대한 자책감을 견뎌내기 어려워 제3국으로 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이 강원도 고성이라서 이름이 비슷하고 바다가 있는 거제도 맞은편에 있는 고성에 발을 들였다. 아무 연고도 없고 기술도 없는 데다가 두발이 불구인 그가 살아가기란 난감하기만 하였다. 그는 가까이에 있는 안정사를 찾아가서 주지스님을 찾았다. 고향인 고성에는 금강산에 신계사가 있어 어릴 적에 어머니 손을 잡고 자주 찾았던 적이 있기에 절이 마음이 편하고 자기를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다. 포로로 잡히던 구인사에서 구원을 받았듯이 안정사에서는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나아갈 길을 묻기로 하였다.


“어이하여 이곳으로 찾아오셨소. 보아하니 몸이 성하지 못하고 얼굴에 근심이 수두룩하군만요. 혹시 절하고 인연이 있으신가요.”

“저는 북쪽의 인민군 출신으로 반공포로가 되어 석방되었지만 갈 곳이 없어 찾았습니다. 어디 살아갈 길을 여쭙고자 절을 찾았습니다. 저의 고향은 금강산 신계사가 있는 강원도 고성입니다. 어릴 적에 자주 다녔셨지요.”

“몸이 불편하니 힘든 일은 못하겠고, 우리 절에 대나무 부채를 잘 만드는 스님이 계신데 그분에게서 죽세공 기술을 배워서 속가로 나가면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김인문은 그 절에 기거하면서 잔일을 거들고 방 청소도 하면서 간간이 스님으로부터 죽세공 기술을 배웠다. 스님은 부채는 예술적인 재능이 있어야 하고 속가에서는 돈벌이가 안 되니 소쿠리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몇 년을 배우니 상당한 수준이 되고 드나드는 보살들도 예쁘다고 칭찬을 할 정도였다. 그는 주지 스님의 후원으로 고성시장통에 조마그마한 전을 얻어 소쿠리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니 불자들을 중심으로 손님이 늘기 시작하였다. 소쿠리에다가 필요에 따라 卍 무늬도 넣기도 하니 소문이 퍼져 차츰 돈을 만지기 시작하였다. 그 수입의 반은 자기를 구원해 준 부처님 전에 바치고 나머지는 차곡차곡 저축하였다. 나이도 이미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어 밥을 대놓고 먹는 식당에서 일하고 안정사에도 몇 번씩이나 들러 안면이 있는 동갑내기 보살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혼례는 안정사에서 주지스님의 집전으로 결혼 법회를 열고 하였으니 실로 감격스러웠다.

어느 날 김인문은 부인에게 자신의 과거와 앞길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가 여항산 전투에서 보급투쟁을 나가 생명을 구해준 어느 할매의 이야기와 광정마을 산자락에 묻어둔 동생에 대한 것을 말했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그 할매를 찾아가서 여건이 되면 그 동네에서 살아가는 게 좋겠다고 동의하였다. 그래서 그는 진동에서 가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이수정 마을에 내린 것이었다. 그는 아내 외에는 일체의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구장인 해동양반의 충고에 따라 현규나 광수 외에는 교분을 깊게 가지지 않았다. 반공포로라고 아는 사람은 그 동네에서는 오직 해동양반뿐이었고, 김인문은 본래 입이 무겁기도 하지만 일체의 과거 사연을 숨기며 살아갔다. 그런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도 때로는 의심하는 단초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까지도 반공청년단들이 설치고 숨어있는 간첩을 잡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 날 구장인 해동양반이 그의 집에 조용히 찾아와서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하였다. 직접 찾아온 것을 보니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김서방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잘 듣게. 지금 우리 마을에는 6.25 때 전사한 집안이 몇 집이 되고 인민군의 총에 죽은 집도 제법 된다네. 그 집 안 들은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지경이니, 전번에 당부한 대로 좀 더 입을 무겁게 하게.”

“그리고 다른 이야기인데 아랫마을에는 정월보름날에 복조리를 못 받은 집에서 슬슬 불만이 새어 나오니까, 앞으로 복조리를 마을 회관에 가구 수대로 만들어 하나씩 가져가도록 해주게. 조그만 일이 커지면 감당하기 힘드니까 말일세.”하고 구장은 그의 아내가 내놓은 쑥털털이에다 감주를 한잔 마시고 일어섰다.


그렇다. 그들 부부가 자기들에게 잘해주던 집안에만 보내던 복조리가 갈등의 원인이 되어버렸기에 구장의 말대로 따랐다. 그러니 자연히 그런 불만은 없어지고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또 한 가지 난처한 일이 생겨났으니, 그것은 소쿠리쟁이가 천한 직업으로 자칭 양반가문이라고 자처하는 집안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고루한 남정네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 바로 집 아래에 사는 성격이 괄괄한 신촌양반이 나서서 크게 외치면서 한소리를 하였다.


“이 넘들아,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들 이야기를 하노. 사농공상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생선 장사를 하니 제일 천한 것이 되네. 그렇다면 소쿠리를 만들고, 대장간을 하는 그 사람들이 나보다도 덜 천한데 그러면 나는 불가촉천민이란 말이가. 고얀 넘들,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면 가만 안둘끼다.”하고 거칠게 한마디 하니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읍내지서에서 순사가 구장인 해동양반집으로 찾아왔다. 가끔 지나가다가 잠깐 들르기도 하였지만 그날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해동양반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올 것이 왔다 하고 마음을 조용히 다스렸다. 그 순사가 하는 말은 이 동네에 수상한 사람이 숨어들어 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파악한 기본정보도 갖고 있어 항상 요주시하고 있는데, 보조원으로부터도 의심할만한 정보가 들어왔으니 그냥 넘겨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구장 어른, 그 사람을 이 동네에서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정보원으로부터 그의 수상쩍은 동태가 보고되어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의심분자들은 별도로 관리하는 곳으로 보내야 안전할 것 같으니 이점 참작해 주시길 바랍니다.”

“순사 어른, 그 사람은 제 발로 이 동네에 살고 싶다고 찾아와서 자기의 신분을 밝혔으며 내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였고, 소쿠리를 만들어 마을에 기증하기도 마을의 길흉사를 거들어 인심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제가 그를 불러들였으니 잘못되면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하고 긴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구장은 순사를 보내고 나서 마음이 안절부절이었다.


해동양반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정보원이라는 자는 이 동네에 사는 신암댁의 시동생인 장덕술이가 맞고, 한때 반공청년단장으로 활동하였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그 사람은 올바른 정보가 아닌 미운털이 박힌 사람들을 무고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곤욕을 치르게 하였었다. 소위 말하는 보도연맹원으로 강제적으로 가입시켜 6.25 때 많이 희생되기도 하였기에 그 작자의 소행이 맞기에 결자해지를 해야만 될 판이었다. 해동양반은 신암댁을 잘 다스리는 광동할매를 찾아가서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하여 해결을 부탁하였다. 어느 날 광동할매는 신암댁을 안촌할매집으로 조용히 불렀다.

“신암댁, 자네 시동생은 아직도 순사들을 도우는 일을 하고 있는가? 신암양반은 덕망이 있고 점잖은데 시동생의 행실은 너무 커칠어서 큰 문제야. 6.25 때 보도연맹원으로 몰아서 우리 동네에서도 죽다가 살아난 사람도 몇 있고, 윗동네인 새터나 갱골에서 몇 명이 죽지 않았던가.”

“그 소쿠리쟁이는 내가 볼 적에 그런 불온한 사람이 아닐세. 그냥 살기 위해 이 동네가 좋다고 찾아온 불쌍한 사람 아닌가. 만약 자네도 이상한 소문에 휘말려 억울하게 이 동네를 쫓겨난다면 어떠하겠는가. 무슨 드러난 죄도 없는데 의심하여 그런 짓을 하면 천벌을 받으니 자네 시동생에게 당부하여 스스로 풀도록 해주게. 잘못하면 이 동네 민심이 험악해져 형수가 발을 못 붙일 판이다 하고 말일세.”


“그라고, 여기 안촌할매에게 아들이 되겠다고 하여 모자간의 결연을 한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는가. 소쿠리쟁이가 잘못되면 불쌍한 안촌할매는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다들 외로운 사람들끼리 잘 살아가도록 부처님께서 인연을 맺어주었다고 믿는데, 자네도 절에 다니니 잘 알아듣게나.”하고 광동할매는 특유의 강온양면 화술로 신암댁을 알기 쉽게 다스렸다. 그렇지만 해동양반도 광동할매도 그 일이 어찌 될까 걱정이 되어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소쿠리쟁이의 마음은 어떠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주 중요한 난관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을 지금껏 그러하였듯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소쿠리쟁이는 체념하고 지냈다.


소쿠리쟁이는 드디어 아들을 얻었다. 그것을 반기는 것은 안촌할매이었고 미역 한뭇을 사들고 직접 그의 집으로 가서 미역국을 끓이고 산후조리를 도왔다. 이윽고 소쿠리쟁이의 얼굴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미소가 입가를 번져나갔다. 그간 자신을 괴롭히던 풍문이 말끔히 정리되고 외지인이라는 차별도 세월이 흐르니 없어지고 원주민이 되어가며 당당히 살아가게 되었으니 말이었다. 아들도 얻었겠다, 집도 새로 단장하여 꾸미고 가재도구도 들이고 하여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아들을 보듬고 아낙들 사랑방에 출입하며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그는 친한 현규랑 광수와 같이 새끼를 꼬면서 금강산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작년에 가야장에서 사다온 돼지새끼가 일 년이 되니 훌쩍 커서 죽 달라고 꿀꿀대고, 닭장에는 장닭과 암탁이 사랑놀이를 하니 마음도 이제 평화롭기만 하다. 단지 꿈속에서는 그를 끊임없이 쫓아오며 괴롭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쉽게 정리가 되지는 않았다.


어느 봄날 읍내지서의 순사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구장인 해동양반을 길가에서 만났다. 전번에 말한 소쿠리쟁이에 대한 불온한 정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해당 보조원이 말하여 없는 것으로 처리하였다고 말하며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마을에는 봄볕처럼 다시 평화가 깃들고 모두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이제 큰 아들은 다섯 살이고 둘째인 딸도 세 살이나 되었다. 그해 설날 아침에 어머니인 안촌할매집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세배를 갔다. 안촌할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부터는 자식새끼 잘 키우고 행복해야 한다고 덕담을 하였다. 손주들이 세배를 하니 꼬깃꼬깃 접어 지녀온 지폐를 세뱃돈으로 주었다. 아들 없이 살아온 지난 세월 속의 한이 곰방대의 담배연기 속으로 희멀겋게 사라지고 봄날 아지랑이처럼 새로운 즐거움이 샘솟았다. 모두가 어머니이며 모두가 자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한바탕 꿈같은 세월 속에서 자기에게 잘해주면 그것이 자식이요 효도가 아니겠는가. 이제는 미련도 아쉬움도 설움도 없이 오늘 이 마음이 즐거우면 그것이 최고가 아니던가. 그나마 이 동네에는 혼자 사는 여인들이 많아 동고동락하며 사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랑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소쿠리쟁이는 이제 급박한 상황을 넘겨 한숨을 돌리니, 그동안 숨어있던 가족들에 대한 감정이 송알송알 솟아올랐다. 북녘땅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이 생각나기도, 6.25 때 여항산에서 총에 맞아 죽은 동생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안촌할매를 어머니로 정하여 굶주린 모정을 보충할 수 있지만,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뭇 애처로웠다. 간간이 시간이 나면 저 멀리 여항산 자락에 동생을 묻어둔 곳을 응시하곤 하였다. 자신의 신상을 최대한 감추어야 하는 현실에서 대놓고 그곳을 찾아가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흘렀건만 다리도 불편하기도 하여 그곳을 찾을 엄두도 못 내었으니, 동생의 원망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가 여항산이 보이는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중 하나가 동생에 대한 애처로움이었다. 조용히 아내를 불러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여보, 내가 이곳을 온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천리타향의 외로운 산하에 묻혀있는 동생을 차마 잊을 수 없기 때문이요. 어디 한번 그곳을 찾아가고 싶은데 다리가 불편하여 안타까울 지경이요.”

“왜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소. 나도 항상 시동생의 죽음이 안타까워 한번 찾아가서 산소를 만들어주고 술잔을 올리는 게 어떨까 생각도 해보았소. 한번 궁리를 하여 올해 안에 그곳을 찾아가봅시다. 아이구 불쌍한 시동생.”하고 부부는 안타까운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다.


그들은 어느 봄날 여항산 자락에 있는 의상대 절을 다녀온다는 구실을 만들어, 안촌어머니에게 아이들을 하루 동안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은 바구니와 보따리에 호미와 낫을 챙기고 자그만 소쿠리에다가 술 한 병과 마른안주를 준비하여 넣었다. 여항산 의상대까지는 세 시간 정도 걸리는 험난한 길이기에 힘들면 절에는 못 가더라도 광정마을 여항산 자락의 동생의 무덤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밥을 챙겨 먹고 아이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광정마을로 출발하였다. 십수 년을 살아왔지만 김인문은 그 길은 처음이기도 어찌 보면 두 번째 길이기도 하였다. 아내는 사월초파일에 아낙들과 함께 몇 번 다녀와서 길을 잘 알고 있기에 안심이 되었다. 6.25가 있던 8월달에 그도 그 믐 달밤에 천지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에서 지나친 적은 있지만 지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광정마을에서 의상대로 오르는 오솔길을 지팡이와 아내의 손목에 의지하여 힘겹게 올랐다. 발가락으로 지탱할 수가 없는 몽당발이다 보니 오르막을 기어가다시피 하여 아주 천천히 올랐다. 낙엽이 쌓인 곳에서는 중심을 잃어 몇 번이나 쓰러지곤 하였지만 아내가 그를 뒤에서 밀어주니 미끄러지지 않고 나아갈 수가 있었다.


이수정 마을을 떠난 지도 한 시간 반이 넘었지만 동생을 묻어둔 장소까지는 좀 더 가야 했다. 동생이 죽던 그날은 그믐날이라 주변을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동생을 묻은 장소는 평편한 언덕 위의 몇 그루의 큰 소나무가 있는 아늑한 곳이었다. 지금부터는 아주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올랐다. 사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형과 소나무를 살피고 오르는 것이었다. 숨이 턱턱 멈추면서 더 이상 안 되겠다 하고 평편한 곳에 몸을 던지니 그 장소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서있고 그 소나무들은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자비롭게 보였다. 맞았다. 그 장소에 다다른 것이었다. 소나무 주변을 살펴보니 약간 볼록한 곳이 있는데 진달래나무가 한그루 자라 연분홍 꽃잎을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인문은 가지고 온 호미로 진달래나무 밑을 조심스레 파내려 갔다. 낙엽과 흙이 섞여 나오다가 호미 끝에 찌직하면서 걸리는 감이 느껴졌다. 그는 가슴이 동요하면서 다시 호미질을 하니 인민군복 상의가 불그스름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동생의 무덤을 찾아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진달래나무의 밑동과 땅을 통곡하듯이 부둥켜안았다. 군복을 만지니 푸석푸석한 썩은 나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미 시신은 형체를 알 수가 없이 부패하여 사라지고 백골만이 사람의 주검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김인문은 호미로 흙을 다시 덮어두었다. 진달래나무도 뽑지 않고 그대로 두고 나무 주변만 흙으로 북돋았다. 무덤 위에 진달래가 뿌리를 내렸으니 동생의 혼이 진달래에 담겨있는 것이었다. 서글프지만 예쁜 진달래나무밑에 잠자고 있는 동생은 진달래 꽃잎이 반기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하였다.


부부는 가져간 소주를 한잔 따르고 절을 올렸다. 김인문은 꿇어앉아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곡을 하였다.

“상문아, 이 형을 용서해 다오, 그때 네가 앞장을 섰으면 내가 총을 맞았을 텐데 내 대신 네가 죽었구나. 몸은 고향에 못 가고 이곳에 묻혀있지만 혼은 훨훨 날아 고향으로 날아가려무나. 가서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멀리서나마 그리고 있다고 전해다오.”하고 소쿠리쟁이 부부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소쿠리쟁이도 중년으로 들어서고 안촌어머니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아들이 둘이요 딸은 하나로 오붓한 가정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즐거움이 있으면 슬픔도 조용히 당도하는 법인지, 안촌어머니는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식음은 드시고 정신은 있지마는 기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아내가 읍내 한약방에서 약재를 사와 달여드렸지만 회복이라기보다는 운명의 속도를 늦추는 정도이었다. 부부는 조석으로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고 이야기 동무가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와 아내의 손을 부여잡고 그간 잘 대해주어 너무 고맙다고 말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소쿠리쟁이는 눈물을 머금으면서 작정한 듯이 말했다.

“어머니, 처음 저를 보았을 때 몰라 보았겠지요. 그 어두운 밤중에 서로 알아볼 수가 없었겠지요. 6.25가 나던 그해 8월 그믐날 밤에 저가 이곳으로 식량 조달을 나왔었지요. 솥 안에 삶은 고구마가 있으니 다 가져가라고 하셨고, 군인들이 들이닥칠 때에 대청마루밑에 숨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때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간 어머니에게 화가 닥칠까 봐 말 못 하고 이제야 그 비밀을 말씀드립니다.”

“아이구, 아들아 그기 무슨 소리고. 그날 밤에 북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던 그 사람이란 말이가. 나는 호롱불을 끄고 나서 절구통을 밀어 대청마루 입구를 막아주었는데 그 사람이 살아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단 말이가. 이런 꿈같은 이야기가 어디있노.”

“어머니는 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그래서 이 동네를 찾았고 어머니로 정하여 모시기로 한 것입니다. 부족한 저를 용서해 주시고 빨리 기운을 회복하셔서 우리들과 함께 더 오래 사셔야 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하여 얼마 후 안촌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에 그의 손을 꼬옥 쥐어주며 하늘이 내린 아들이었다고 칭찬하며 며느리의 손도 함께 꼬옥 쥐어주었다. 얼굴에는 환희의 미소를 머금고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간 것이었다, 소쿠리쟁이는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고 근조가 앞장서서 꽹과리를 치고 현규와 광수가 상여를 앞에 메고 뒤에는 동네 젊은 상두꾼들이 메어 조남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렸다. 그는 어머니가 자주 가셨다던 의상대 절에다가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사월초파일에는 꼭 찾아보기로 하였다.

이윽고 사월초파일이 다가왔다. 내일 아침 일찍이 아내와 함께 현규의 차를 얻어 타고 군북 사촌마을을 거쳐 의상대로 가기로 하였다. 마음이 설레고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의상대 대웅전에 안촌어머니 영가에 절하고 깊은 감사의 사색에 잠겼다. 일어서서 주지스님을 찾아가 동생의 위패도 모시도록 부탁을 하였다. 여기 여항산에 동생이 묻히고 마주 보는 조남산에 어머니를 모셨으니 의상대에 함께 위패를 모시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집에 가서 씻고 이수정 연못가에서 벌어지는 낙화놀이를 보며 시름일랑 훨훨 날아 보내고,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로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다짐을 하였다. 그가 그곳에 뿌리를 내려 무사히 정착할 것인지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는 나라에서 또 다른 운명의 피바람을 맞을 것인지 알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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