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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4화. 갓데미산

여항산의 다른 이름인 갓데미산에 얽힌 동족상잔의 슬픈 이야기

by 벽운

갓데미산


나의 고향의 진산인 여항산은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본래부터 있던 이름에다가 새로 붙여진 이름도 있고, 봉우리 마다 산이름이 있으며 사연이 숨어 있다. 여항산은 풍수지리에서 비롯되어 배가 떠 다닌다는 산이다. 남고북저의 역수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그렇게 지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여항산이라는 이름 대신 갓데미산이라고 불렀다. 천지개벽에 의해 세상천지가 물에 잠겼을 때 그 산은 다 잠겨 갓 만큼만 봉우리가 남아 그렇다는 전설이 있었다. 여항산이라고 하면 그 지역 주민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국내보다는 미국에서는 갓데미산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명산이 아닌 증오의 산으로 말이다. 왜 나의 진산의 이름이 본래에서 바뀌어 그렇게 불리었는지 찾아가 보았다.


나는 과거로의 여행을 좋아하여 나의 과거로 돌아가 본다. 그 시절은 한창 산에 빠져 전국 각지의 명산을 오르내릴 때이다. 산악회 버스를 타고 여항산 아래에 있는 미산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날은 여항산 시산제가 있기에 산악회 버스는 두 대가 편성되어 등산객을 꽉 채웠다. 그날 산행을 마치면 미산 저수지옆 경치 좋은 곳에서 시산제 겸 야유회가 있고, 점심 식사와 음료는 무료이고 노래자랑에 나가면 경품을 주기에 산악회 정회원이 아닌 나 같은 뜨내기 등산객이 반이 넘었다. 나는 그 산악회 총무를 자주 보아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아이구, 선생님! 올해도 시산제에 오셨구만요. 이 여항산이 좋아서 그렇겠지요. 이산은 명산은 아닌데 명산이기도 하지요.”

“총무님, 반갑습니다. 저야 이곳 근방이 고향이고 산이 좋아서 보다는 대접이 좋아서 오기는 합니다. 오늘도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하하, 오늘 같은 날이 정말 좋은 날이지요. 산도 타고 꽃도 보고 노래 부르고, 거기에다가 음주 가무를 마음껏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좀 슬픈 사연도 있기는 합디다.”하고 얼굴이 살짝 얽은 살짝 곰보이지만 그 미소가 일품인 총무가 이리저리 수다를 늘어놓았다.


나는 다른 이야기 보다 슬픈 사연이 좀 있다는 데에 마음이 닿았다. 여기에 온 등산객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산에 애환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도 왔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6.25 때 전사한 군인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미군과 인민군이 대다수 이었으니, 등산객 중에는 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국군과 민간인 희생자 가족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 등산객은 야유회 삼아 참석한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봄철 좋은 날에 슬픈 이야기 보다 풍악을 울리며 노는 것이 계절의 흐름에 맞을 것이다.


나는 등산객의 행렬을 따라 여항산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줄줄이 이어지는 행렬을 그냥 따라가기만 하다가 능선의 분기점에 이르게 되었다. 우측으로 틀면 여항산 정상이며, 좌측으로 틀면 서북산 정상이다. 대부분은 시간이 덜 걸리는 여항산 방향으로 가고, 일부는 서북산을 보고 다시 여항산으로 가려고 하였다. 나는 그 대열에 끼어들어 서북산 쪽으로 향했다. 가는 중간에 마당바위라는 곳이 있어 그 평편한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바위 중간중간에는 무슨 탄흔인지 포탄의 흔적인지 무수한 상흔이 보였다. 좀 거기서 얼마 안 가니 서북산 정상이 나왔다. 그 정상 옆에는 검은 대리석 비석이 외로운 듯 장엄한 듯 서있었다. 나는 그 비석에 다가가 비면에 적힌 글씨를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서북산 전적비>

‘여기에 티몬스 대위가 이끄는 미군 100여 명이 고이 잠들다.’라는 내용이 비면에 새겨져 저 아래 남해 바다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태평양 건너 미국일 것이다. 티몬스 대위가 이끄는 중대원 100여 명이 서북산을 사수하다가 전몰한 곳이었다. 그 비석은 티몬스 대위의 아들인 주한 미 8군 사령관 티몬스 장군이 기념으로 세운 것이었다.


자기의 아버지가 산화한 장소에다가 비석을 세우니 우리말로는 산소인 셈이었다. 이국땅 한국에 와서 이름 모를 이곳 산하에서 산화한 것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것도 말과 풍습이 다르고 생김새도 색다른 지역에서 말이다. 록키산맥의 침엽수도 아닌 소나무와 낙엽송이 우거진 야산 같은 산에서 말이다. 키가 큰 순록이 아닌 아담한 사슴이 사는 곳에서 작고 메마른 인민군과 싸우다가 말이다. 한 장의 명령지에 이곳 코리아로 파병된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식을 둔 한 아버지로서 말이다. 부르고 싶은 그 이름들을 마지막 숨이 멎을 때까지, 그리운 얼굴을 하늘에 오가는 구름 위에 그리며 그와 그들은 부르다가 잠들고 만 것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서서 여항산 정상으로 향하는 숲길로 들어섰다. 길가에 군락을 이룬 진달래가 연분홍 꽃잎을 피우고 있고, 그 향기는 그윽하기도 애잔하기도 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철모의 잔해는 긴 세월 동안 누군가가 수습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주인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체취는 아직도 숨 쉬고 있었다. 지나가던 길섶에 서있는 진달래 한그루가 앞사람의 배낭에 걸려 세차게 내 얼굴을 때렸다. 아마 잠깐 앉아서 사연을 들어보라고 하는 듯 나의 뒤를 또 붙잡는다. 여기 어디엔가 그의 주검이 잠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진달래나무 뿌리 밑에서 말이다.


티몬스 대위기 배속된 미 25사단은 마산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6사단을 막기 위해 이곳 여항산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미 방호산이 지휘하는 인민군 6사단은 호남지역을 우회하여 진주를 함락하고 군북 방어산에 본부의 위치를 잡았다. 미 25사단 킨 소장과 인민군 6사단 방호산 소장과의 건곤일척의 승부가 벌어지게 된다. 38선을 제일 먼저 돌파한 인민군 6사단은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충청도를 거쳐 호남지역으로 진격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의 방어선에서 정체하고 있던 주력부대와는 달리 저항 없이 목포를 거쳐 진주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후 아무런 저항 없이 마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임시수도인 부산이 측면공격으로 위험하게 되 부랴부랴 워커 사령관은 마산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던 25사단을 긴급히 이동 배치하였다. 거기에 5 연대에 배속된 티몬스 대위의 전투중대가 포함되어 서북산을 사수하다가 산화하였다.


인민군 6사단장인 방호산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자문자답한다.

“이것 뭐 이런 게야. 아무도 막지를 않으니 우리가 혹시 너무 깊숙이 들어와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쉽사리 측면을 내어주니 믿기지를 않네. 좀 천천히 갈까, 아니면 몰아 부칠까.” 사실 인민군 6사단은 목포와 여수를 손에 넣는다고 이틀을 허비한 셈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장기전으로 갈 줄을 알고 항만이 있는 목포와 여수를 수중에 넣으려고 했었다. 두고 보니 아무 저항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주까지 손에 넣게 되었으니 그런 의심을 할 만도 하였다.

“기래면 기랬치. 지놈들이 무슨 병력이 있어야 막지.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데도 간당간당 할 건데. 우리 6사단이 정예부대 아닌가. 겁을 먹고 미리 도망간 모양이지. 아니면 막을 방법이 없어 그랬던지.” 사실 방호산의 6사단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166사단이 모체이고,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승승장구한 정예부대가 맞다. 마산이 사정권에 들어오자 인민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이미 군북의 방어산을 거점으로 하여 여항산으로 잠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아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여항산 정상을 밟고 시산제가 열리는 미산 저수지에 도착하였다. 그때 산악회 총무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은 도착이 늦었네요. 천천히 온다고 그랬는가요.”

“서북산 정상을 밟고 온다고 그랬습니다.”

“아이구 멀리 까지 갔다 오셨네요. 신세 지려고 오신 게 아니라 산을 타려 오신 게로군요. 선생님은 많이 겸손하십니다요.”하고 총무가 나를 챙겨주어 점심을 잘 먹고 경품이 걸려있는 노래자랑을 구경하게 되었다. 많은 노래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불려졌다. 주로 유행가이고 세월의 즐거움이 담긴 경쾌한 노래였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독특한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라는 비목의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나는 갑자기 졸다가 깨어다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노래 부르는 곳을 쳐다보니 중년 남자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애절하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야유회에서는 어울리지 않은 노래이었고 관중들의 반응도 썰렁하였다. 조금 있으니까 산악회 총무가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에게로 와서 한잔을 권한다.


“선생님도 한곡 신청하여 불러 보시지요. 음성을 보니 묵직한 노래 한곡 부르면 박수가 많을 것 같은데요.”

“나는 유행가는 잘 못 부르고 명곡은 좀 하는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요. 참 조금 전에 ‘비목’이라는 노래를 부르시던 분이 있던데요. 애절해서 졸다가 번쩍 깨어났지요.”

“선생님도 비목과 같은 명곡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분은 우리 산악회 회원인데 6.25 때 여항산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아직 까지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더군요. 그러니 비목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하고 총무는 한잔을 더 따른다. 다시 노래자랑은 이어지고 봄이오니 꽃이 피니, 청춘을 돌려 달라니, 사랑이니 하는 노래가 계속 울려 퍼진다. 나는 다시 졸음이 밀려와 다시 눈을 감았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라는 ‘한 오백 년’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또 애절하여 눈을 다시 떠 보았다. 아뿔싸,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은 살짝 곰보인 산악회 총무가 아닌가. 지금껏 쾌활하고 농담도 잘하던 그가 그런 애절한 노래를 부르다니 필히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슬픈 사연이 있는 사람은 표시 나게 슬픈 표정을 짓지 않고, 오히려 신나게 놀려고 하는가. 기쁨에 넘치는 사람은 기쁜 표정을 짓지 않고, 오히려 서글프게 보이려 하는가. 둘 다 맞을 것이다. 항상 슬픔에 사로 잡혀있으면 생활이 어렵게 되고, 잘 나간다고 까불랑 거리면 복이 나가니 자중하는 것도 맞는다.


시산제가 끝나고 산악회 버스는 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여항산과 서북산을 종주한 데다가 시산제에서 술까지 몇 잔 마셨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여기가 마산을 앞두고 있는 군북이 맞는가. 지도에는 산들이 여기저기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가 어디쯤인가.”

“장군님, 여기는 함안 군북에 있는 방어산 자락입니다. 저기 보이는 높은 산이 여항 산이지요.”

“뭐라고 이곳이 방어산이라고, 허허 내 이름하고 많이 닮았네. 여기에서 본부를 세우면 방어하기도 공격하기도 좋을 것 같다. 멀리 보이는 산이 여항산이라고, 우리가 중국에서 일본 놈들하고 싸웠던 태항산 하고 이름이 비슷하네. 그 높은 태항산 하고 비교할 수 없이 낮은 산이구만. 이 정도 산은 그야말로 산보하듯이 진군하면 되겠네.”하고 방호산 6 사단장이 담배를 피워 물고 말한다.


방호산은 방어산에 사단 본부를 정하고 사촌과 오곡 두 방향으로 하여 여항산에 진입하게 된다. 아직은 저항이 없으니 산세가 만만치가 않아 조심스럽다. 이윽고 6사단 선발대는 여항산 서쪽을 장악하고 동태를 살핀다. 미 8군 25사단이 급히 마산으로 들어와서 정찰활동을 펼치고 있으나 교전은 일어나지 않고 간간히 총소리는 들린다. 25 사단장 킨 소장은 귀신같이 마산 인근까지 잡입한 방호산의 6사단에 대해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네. 어찌 마산 인근까지 온 것을 정찰기가 파악도 못했단 말인가. 소문대로 신출귀몰한 팔로군의 군대가 맞구나.”

“그나마 다행이지, 우리 사단이 이동 배치되지 않았다면 마산을 잃고 곧바로 부산이 위기에 처했을 텐데 하늘이 도운 게 맞는 건가.”하고 킨 소장은 파이프에 담배를 끼워 물고 말한다.


드디어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미 25사단 예하부대와 인민군 6사단과의 전투는 킨 소장과 방호산 소장과의 자존심 싸움이자, 한국의 명운을 결정지을 중요한 전투가 된다. 여항산 전투는 45일간이나 전선이 정체된 채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 소모전이 되어갔다. 낮에는 미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고지를 뺏고 빼앗기며 필사적인 전투를 하였다. 여항산과 서북산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뀌었으니 그 치열함을 알 수 있겠다.


어느 날 낮에 여항산을 탈환한 미군 전투중대의 조지 중위가 국군 통역병에게 말한다.

“참으로 집요한 인민군 군대로다. 낮에는 어디에다 꼭꼭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기어 나오는 게 귀신과 같아. 키도 작아 잘 보이지를 않는데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고 사라진다 말이야.”

“이보게, 김상병 저기 보이는 저산에서 아군이 많이 죽었는데 산 이름이 무언가.”

“우리 지도에는 ‘상데미산’으로 나오는 군요. 좀 지긋지긋하지요,”

“뭐라고, ‘상데미산’이라고, 빌어먹을 갓데미산(God damn)이라고 해버려!”하니 멀쩡한 산이 저주스러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다음 해 봄에 여항산을 서쪽 방면에서 타보기로 하여 무궁화 열차로 군북역에 내렸다. 사촌마을을 거쳐 사촌 저수지 입구에서 한숨을 돌리고 다시 오르기 시작하였다. 의상대 절로 가는 도로는 포장이 되어있지만 가파르기 그지없었다. 중간 지점인 조그만 계곡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장소는 내가 의상대로 갈 때 항상 쉬어가는 곳이었다. 자그마한 산복숭아나무가 너덜겅에 뿌리를 내려서있고, 맞은 편에는 등이 굽은 노송이 세월을 인내하고 있었다. 그 장소에 머무르면 계곡물소리가 염불소리 같기도 때로는 곡소리 같이 들리곤 하여 숨겨진 사연을 털어놓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의상대로 오르기 시작하여 마지막 급피치에서 한껏 숨을 몰아쉬고 절에 도착하였다.


나는 대웅전에 참배하고 배추이파리 지폐 한 장을 불전함에 밀어 넣고, 좌정하여 지난 일을 되돌아본다. 이곳 여항산을 자주 오게 되는 연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며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다시 산을 오르려고 방향을 트는데 갑자기 군용 지프차 한대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모양을 보니 미군 지프차이었고 차 안에서 세 명이 차례로 내렸다. 먼저 뒷 자리에 대위 계급장을 단 미군 장교 한 명이 내리고 잇달아 한국인 카투사가 내린 후에 흑인 운전병이 마지막으로 내려 차의 문을 닫았다. 그들 중 운전병을 제외한 두 명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지 스님을 찾는 듯하였다.


나는 주지스님이 머무르는 요사채를 가리켜 주면서 카투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찌 이런 높은 절에 들렀는지요. 멀리서 오신 모양입니다.”

“저희들은 대구에 있는 ‘캠프 워커’에 근무하고 있는 장병들입니다. 오늘 저의 상관께서 이곳에 한번 가보자 하고 하여 통역 삼아 같이 왔습니다.”

“그렇군요. 여기 의상대는 오래된 절이고, 이곳 여항산 자락은 6.25 때 미군과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지요.”하고 카투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헤어졌다.


나는 의상대 뒤를 돌아 등산로에 들어서서 천천히 산을 오른다. 길섶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어 제철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진달래를 보면 항상 떠오는 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김소월의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이다. 조금 지나면 북녘땅 영변 약산에도 진달래가 만개하겠지. 봄소식은 이곳에서 남동풍을 타고 그곳으로 다가가겠지. 우리가 그곳을 그리듯이 그곳도 이곳을 그리고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상에 다다랐다. 바로 그곳이 ‘상데미산’이다. 산 정상에서 좌우를 살펴보니 동남쪽으로는 여항산이 펼쳐지고 서남쪽으로는 오봉산이, 북쪽으로 낙동강이 보인다. 상데미산 정상에 앉아 생수를 들이키고 한숨을 돌리니 잠시 잠깐 졸음에 빠져들었다.


인민군 6사단 정찰대의 리학문 소좌가 망원경을 들고 넋두리를 한다.

“이 산이 ‘상데미산’이라고 했나. 상놈의 재수 없는 산이로다. 가파르고 바위도 많고 그보다도 바라보이는 여항산에서 미군넘들이 쉴 새 없이 공격해오니 죽을 지경이군.”

“낮에는 쌕쌕이가 날아가면서 지멋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저 아래에서는 곡사포가 날아오니 미군넘들이 물자는 풍부하긴 한 모양이네. 우리는 보급선이 길어 고생을 하는데 말이지.”하고 허허 실소를 하면서 말을 닫는다.


나는 갑자기 ‘까악 까악’하고 들려오는 산 까마귀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오후의 태양은 중천을 벗어나 서쪽으로 서서히 넘어가고 저 아래 미산마을과 광정마을에는 산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이곳 ‘상데미산’은 피아간의 전투가 너무 치열하여 미군들이 전투산(Mount of battle)이라고 불렀다. 무수한 폭탄이 투하되어 산 정상은 높이를 깎이고, 암반은 박살 나서 흩어져 이곳저곳에 파편으로 남고, 포연은 구름처럼 산을 덮었다. 압도적인 미군의 공군력과 포병부대로 낮에는 인민군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인민군 6사단 정찰대의 리학림 소좌가 ‘상놈의 산’이라고 불렀던 이유도, 미군 전투중대의 조지 중위가 ‘갓뎀산’이라고 부를 만하다. 무슨 본래 그대로의 산을 자꾸 저주하는지 산은 억울하기만 하다.


나는 다시 일어서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일정은 저 아래 미산마을로 해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야 한다. 미산고개에 들어서니 좌측으로 틀면 미산마을이 우측으로 틀면 여양마을이 나온다. 좌우의 분수령이자 분단의 길목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좌측이 우측이 되고, 우측이 좌측이 된다는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오늘 일정을 되돌아보니 의상대에서 만난 미군 장병들이 궁금해졌다. 그들은 누구를 추모하러 온 것인지 그냥 절을 보러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어느 듯 무궁화 열차는 삼랑진 낙동철교를 지나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철로변에 연하여 흘러가는 낙동강물은 상류의 소식을 전하려는지 소곤소곤 조잘대며 흘러가고 있었다. 의상대를 거쳐 여항산 자락을 들러보는데 많이 걸어 피로감이 밀려와 잠이 밀려왔다.


상데미산을 넘어 서북산을 빼앗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방호산이 나타나서 말한다.

“미군넘들은 훈련이 안된 건지 조선의 산세를 잘 몰라 그런지 우왕좌왕하네. 간간이 쌕쌕이가 지나가면서 논에도 밭에도 지붕에도 지멋대로 폭탄이나 쏟아붓고 말이지. 그 아까운 물자를 함부로 다루구만.”

“오늘은 내가 전방에 시찰을 나갈 테니 지리를 좀 말해 보라우. 여기 방어산에서 어디로 가야 안전하건 나. 낮이라 노출되면 비행기가 기총소사를 할 테니까 말이지.”

“여기서부터 여항산은 바로 앞의 백이산과 숙제봉을 거쳐서 오곡방향으로 진입하는 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뭐! 산 이름이 백이산과 숙제봉이라니 참말인가. 백이숙제를 말하는 산이란 말인가. 어찌 성현의 이름을 함부로 산에다가 갖다 붙이는가.”

“장군님, 우리 본부가 있는 아랫마을에 서산서원이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우리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시대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낙향한 ‘조여’라는 생육신을 모신 사당이라고 합니다.”

“오우, 그래. 생육신이면 충신이 아닌가. 그 서원은 불 지르지 말고 이곳에서 보급투쟁은 좀 삼가하고 말이제.”하고 방호산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방어산이 자기의 이름하고 비슷하고, 백이산과 숙제봉이 있다니 말이다.


덜커덩하고 열차가 물금역에 서니 구포역에서 내릴 준비를 하여야 할 때다.

나는 또 이듬해에는 여항산 시산제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산악회 버스가 미산마을에 등산객을 내려주었다. 나는 예전처럼 행렬을 따라 여항산 정상을 밟고 미산고개를 거쳐 시산제가 열리는 미산 저수지로 내려왔다. 그날도 마침 안면이 있는 살짝 곰보인 산악회 총무가 반겼다.

“선생님, 오늘도 오셔서 산을 잘 타고 내려오셨네요. 서북산은 안 가고 바로 내려오신 모양입니다. 그 서북산은 사연이 많아 가면 가슴이 아파, 한번 갔다 온 등산객들은 두 번은 잘 안 가더라고요.”

“그게 아니고 이제 나이가 드니 힘이 부치기도 하여 정상적인 코스로 해서 내려왔답니다. 그런데 왜 서북산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던가요. 나는 저곳 상데미산을 보니 똑 같이 마음이 아프던데요.”

“상데미산은 인민군이 많이 죽었고, 서북산은 미군이 많이 죽었다던데요. 두 곳 모두 슬픈 사연을 안고 있군요. 인민군들이야 공산당이니까 죽어서도 대접을 못 받는 모양입니다.”

“허허, 산 사람은 몰라도 죽은 사람은 차별하면 곤란하지요. 모두가 다 귀한 생명들 아닌가요. 어쩔 수 없이 피아로 갈려 싸우지만 서로 생면부지인데 어찌 개인적인 감정이 있겠는가요. 전쟁이 문젠지 사람이 문젠지 둘 다 해당이 되겠구만요.”하고 산악회 총무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바로 노래자랑이 열렸다. 몇 년 전과 다름없이 노래는 유행가 위주이고 슬픈 노래는 없었는데 갑자기 노랫소리가 졸음에서 깨운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라는 희망가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좀 분위기에 안 맞기에 눈을 떠보니 바로 살짝 곰보 총무가 부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전번 시산제에서 ‘한 오백년’을 불러 애절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비슷한 애조를 띤 희망가를 부르기에 총무의 사연이 궁금하였다. 산악회 버스가 종점인 조방 앞에서 등산객을 모두 풀었다. 나는 먼저 내려서 총무가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총무님, 오늘 시산제를 준비하신다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시간이 나시면 저하고 소주 한잔 하입시다.”

“선생님, 안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소주 한잔을 하고 싶었습니다. 잘 아시는 주점이 있으신가요. 없으면 저가 잘 아는 돼지국밥집으로 안내하겠습니다.”하고 총무는 시장통 깊숙한 곳에 있는 조용한 국밥집으로 안내하였다. 소주 몇 잔을 서로 나누다가 내가 먼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총무님은 노래를 잘하시던데, 노래 곡이 좀 슬프게 들리데요. 쓸쓸한 사연이 있는가요.”

“선생님이니까 믿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좀 가정사가 불행합니다. 6.25 때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돌아가셨습니다. 여항산 자락인 진전면 여양리에서 총살된 것으로 아는데 시신도 수습을 못했지요. 참 그 말은 잘 안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도 좀 독특하시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저도 부르시는 노래를 듣고 슬픈 사연이 있을거라고 여겼는데 맞군요.”하고 총무의 불우한 가정사연을 듣다 보니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는 할아버지가 군북 장터의 3.1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경찰서에 구금이 되었다는 구실 아닌 구실로 그의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으로 분류되어 버린 것이다. 6.25가 터지던 해 인민군이 진주를 점령하기 직전에 진주교도소에서 여양리로 끌려와 사살된 것이었다. 그의 인생살이가 고달파서 슬픈 노래로 한을 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술도 몇 순배도 돌고 서로는 조금씩 취해갔으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그러면 생활하신다고 많이 어려웠겠는데요. 안정적인 직업을 구하기도 힘들었을 테고 말입니다.”

“하하, 잘 아시네요. 그래서 저는 부산으로 내려와 고물상을 하였고 지금 산악회 회장님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습니다.”

“산악회 회장님 하고 인연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래서 총무도 맡고 계시군요.”

“우리 회장님은 오늘 시산제가 열린 미산마을 출신인 윤성환 사장님이십니다. 이름을 들어 보셨을는지 모르지만 부산 사상에서 철강공장을 하여 성공하였지요. 그분의 철강공장에 고철을 납품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같은 고향이다 보니 친해졌지요. 그분이 소개하여 자그만한 공터가 달린 고물상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요. 큰 성공은 아니지만 자식새끼 다 공부시키고 먹고 살만합니다.”

“윤성환 사장님이 훌륭하시군요. 산악회장도 하시면서 총무도 맡기시는 걸 보니 많이 신뢰하는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윤성환 사장님이자 산악회 회장님은 인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잘 챙깁니다. 매년 시산제때 소 한 마리를 잡아 등산객을 대접하고 경품을 걸고 하시니까요. 그렇다고 무슨 정치에 뜻이 있는 건 아니시고요.”하고 총무와의 대화는 꼬리를 물고 술술 이어졌다.


어느 날 윤성환 사장이 총무를 불러놓고 상의를 한다.

“김만복 사장, 내가 우리 고향의 진산 아래 미산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 산의 은혜를 잊지 못해 산악회를 만들어 보려고 하네. 좋은 산악회 이름을 한번 추천해 보시게.”

“지가 산악회 이름을 지을 글재주가 있나요.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것으로 정하시죠. 그냥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겸손해 하기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산인데 높이가 8,800여 미터가 된다는데 그 보다 높은 산은 없지요. 그래서 9,000이라는 숫자가 생각나서 구천산악회라고 정하면 어떨까 하오.”

“사장님 ‘구천산악회’이름이 멋집니다. 구라는 숫자가 갑오라고 제일 높은 숫자지요. 화투의 짓고땡에서도 말입니다.”

“고맙소, 그렇게 하는데 산악회 깃발에는 한글로 적었으면 하오. 구천이라고 한글로 정하면 한자로 여러 가지가 상상이 될 테니 산악회의 폭도 넓어지고 말이오.”

“사장님은 정말 깊이가 있으십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초대 회장은 내가 맡고 총무는 김만복 사장이 맡아 주시면 좋겠소. 부회장은 내가 생각해 보니 박수돌 사장이 어떨까 하오. 우리 셋이 서로 잘 통하니 산악회도 잘 될 거라고 보오.”

“사장님은 언제 그렇게 준비를 다 해놓으셨나요. 완벽합니다.”이렇게 하여 ‘구천산악회’는 만들어지고 창립총회를 거쳐 여항산 시산제를 열고나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나는 총무인 김만복 사장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윤성환 회장에 대해 존경심이 들었다. 그래서 총무에게 찬사 겸 나의 견해를 이야기 해보았다.


“윤성환 회장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동업자 정신이 강하고 조직력이 있으며 지역사회에 봉사하려는 마음이 크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회장님은 자수성가를 하신 분이십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미산마을 계곡에 쓸려 내려온 포탄의 탄피나 파편을 수거하여 고철로 팔아서 재미를 보았지요. 그것은 고철이라고 하지만 귀한 구리나 신주도 섞여 있어 비싼 값으로 팔았지요.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고철에 대해 잘 알다 보니 대형 고철상에서 지금의 철강회사로 키웠지요.”

“나도 잘 압니다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 홍수가 지면 하천에 불발 포탄이나 박격포탄이 떠내려 와서 안전사고가 많이 났었지요. 일 년에 몇 명씩 어린애들이 그것을 두드리다가 터져 목숨을 잃곤 했었지요.”

“윤성환 사장님은 여항산이 비록 6.25 전쟁으로 아군과 적군이 많이 죽어 저주스러운 산이라고 하지만, 자기에게는 기회의 산이라고 말씀하시더구만요. 그래서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해 산악회를 만들어 시산제를 올리게 된 것이고요. 갓데미산이 여항산이라는 본 이름을 찾기를 바랐던 게지요.”하고 총무는 윤성환 사장의 성공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술이 많이 되고 시간도 깊어가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좀 더 궁금한 게 있어 더 물어보았다.

“윤성환 회장님이 총무와 부회장을 어떤 기준으로 뽑았는지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선생님은 무슨 취재 나온 기자 같습니다. 분명히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으로 좌익으로 몰리고 있기에 총무를 맡겨 주어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박수돌 부회장은 부친이 바로 여항산 전투에서 전사하였기에 우익으로 보아 부회장을 맡긴 것으로 보입니다. 회장님의 왼팔이 나 김만복이고 오른팔이 박수돌이가 되는 셈이지요.”

“아, 윤성환 회장님은 지혜롭고 상대를 배려하는 깊은 생각을 가지신 분 같습니다. 그 밑바탕에 자비심이 깊이 깔려 있는가 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회장님 자랑을 더 할께요. 여항산 시산제를 올릴 때 산신에 고하고 난 후 별도로 전몰한 미군과 국군에 대해 추모사를 하고 술잔을 올립니다. 오래전에 남북한이 교류하곤 했을 때에는 여항산전투에서 숨진 인민군에 대한 추모사도 하셨다고요. 지금은 시절이 그렇다 보니 생략하지만.....”하고 총무와의 긴 대하는 마무리되었다.


나는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인간적인 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추측한 대부분이 사실과 들어 맞아갔으니 신묘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매년 사월초파일에는 의상대 절에 연등도 달고, 고혼들을 위한 천도재를 올리기도, 대규모 불사에 거금을 시주하기도 한단다. 회사 종업원을 채용할 때 아버지가 없는 사람을, 독립유공자와 참전용사 후손들을 특별채용한단다. 이러고 보니 국가가 못하는 것을 윤성환 사장이 다하고 있으니 애국자이기도 하였다. 주목할 것은 구천산악회의 산행코스를 지리산 피아골이나 대성골, 칠선계곡 등지로 정하여 고혼들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한단다. 저 멀리 강원도 태백산이나 영월 쪽으로 갈 때면 단종이나 충신들의 한이 서려있는 곳을 찾는 것을 보니 역사의 흐름에 관심이 많아 내가 공감하는 점이 많았다.


나는 집에 와서 산행의 피로와 숙취가 겹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서북산을 방어하기 위해 급파된 티몬스 중대는 낮에 점령한 고지를 인계받고 밤을 새워 지키기로 하였다. 지금껏 낮에 빼앗아 놓으면 밤에는 기습공격으로 내주기를 반복하였는데 연대장의 특별지시로 이번에는 밤에 무조건 사수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티몬스 중위는 중대원들에게 엄중하게 훈시한다.

“제군들! 우리는 하와이에서 코리아를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파병되었다. 산천도 낯설고 기상도 여름이라 변덕이 심하니 신중하게 고지를 지켜야 한다. 우리가 상대하는 인민군은 전투경험이 많아 쉽게 볼 수가 없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또 하나 지금껏 앞선 전투중대들이 계속해서 밤에 진지를 빼앗겼는데 우리는 오늘 저녁 기필코 사수하여야 한다. 적들은 어둠을 틈타 사방 어디에서 불쑥 나타날지 모르니 철저히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하고 간략한 훈시와 작전지시를 내린다.


밤은 깊어가고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낮에 들리던 포성이 안들 리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가까이 있는 마당바위 근처에서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인민군 정찰대가 급습을 한 것이 분명하다. 티몬스 중위는 소대장들에게 맡은 지역을 사수하도록 다시 전령을 보내고 자신도 마당바위 쪽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한 군데가 아니고 사방에서 협공을 해오는 게 아닌가. 아마 포위된 모양이어 후퇴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총소리는 요란하고 간간이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점점 따발총 소리는 가까이 다가오고 엠원 소총의 소리는 뜸하다. 절박한 상황이 된 셈이어 티몬스 중위는 권총을 빼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도록 명령한다.


“장병들은 듣거라. 우리는 이미 포위되었다. 현 위치에서 물러서지 말고 탄약을 아껴가면서 조준 사격으로 대응하라.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 멀고 먼 코리아땅에서 몸을 묻는다는 각오로 싸워라. 우리는 군인이기에 싸우다가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하고 반복하여 명령은 하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한명 한명 비명을 지르며 떠나간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총성도 멎었다. 100여 명의 중대병이 모두 다 산화한 것이다. 인민군도 많이 죽고 부상을 당한 듯 얼마간 적막이 감돌았다.


그때 불쑥 나타난 인민군 장교가 한마디 한다. 바로 정찰대장 리학문 소좌이다.

“참말로 안되었구마. 생면부지 이국땅에서 와서 고향을 그리며 죽어갔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게 일본놈들 때문이지. 우리 병력도 숱하게 죽었는지 몇 명밖에 보이지 않구만. 우리가 승자도 아닌 것 같다. 모두 다 패자인 것 같다.”

“죽은 미군들의 시신을 건드리지 말고, 혹시 시계라던가 하는 유품에 손을 대면 바로 총살형이다. 알겠나. 그냥 낙엽으로 가볍게 덮어주기만 하여라.”하고 리학문은 떨리는 소리로 명령한다. 여기서 티몬스 중위와 리학문 소좌는 얼굴도 모르는 채 만나 치열하게 싸웠다. 서로는 적으로 대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 연민하였다.


그해 6.25를 맞으면서 만든 특집방송에 ‘잊힌 전투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곳에서 싸우다가 숨진 미군병사의 특별한 사연을 찾아가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티몬스 대위에 관한 것이었다. 서북산 정상을 사수하기 위해 100여 명의 중대원과 함께 산화한 그를 추모하고, 그의 가족에 대한 취재도 있었다. 주한 미 8군 사령관인 티몬스 2세가 서북산 정상에 전적기념비를 세웠고, 그의 아들도 군인이 되어 한국에서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3대에 걸쳐 한국에서 근무하는 이력은 흔하지 않은 것이고, 티몬스 대위의 군인정신에 의해 자손들도 그 길로 갔으니 감동스러운 스토리가 맞았다. 그들과 대척점에 있던 인민군 6 사단장 방호산과 정찰대장 리학문도 등장하는 여항산전투는, 이념은 다르지만 서로 간에 전쟁영웅이 되기도 하였으니 역사는 모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지난 일을 되돌아보았다. 여항산전투에서 미군과 인민군이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 결과로 여항산은 ‘갓데미산’이라는 듣기 안 좋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상흔은 서북산 옆 마당바위 위에 깊게 새기고 말 못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남겼다. 그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는 워커 장군, 킨 소장, 티몬스 대위는 물론이고 방호산과 리학문도 머나먼 이곳을 찾아왔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민족을 통일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는 명분은 달랐고 어찌 보면 전쟁의 구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한 명분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산하는 초토화되고 평안하던 공동체는 갈라졌으니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 못지않은 비극이었다.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광복은 맞았으나 민족 간에 피 흘리는 반인륜의 현장을 보고 지독한 운명의 장난에 가슴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보듬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반세기가 넘어 흘렀기에 자연은 빠르게 회복하고 옛 모습을 찾았지만 떠나간 사람들의 고혼은 아직도 바람소리처럼 물소리처럼 여항산 자락을 맴돌고 있다. 여항산은 언제 그 아름다운 이름을 사람의 마음속에서 되찾을 수가 있을까. 오직 세월이라는 망각의 묘약에 의해 일시적으로 그럴 수가 있겠지만 역사의 기록은 영원히 그 아픈 진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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