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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6화. 위대한 유산

선친의 유언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여정을 적은 글

by 벽운


위대한 유산


대학병원으로 부터 긴급한 연락이 왔다. 수술 후 경과를 보던 부친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곧 임종을 할 것 같으니 가족들이 준비를 하라는 통보였다. 이미 형님 내외는 유언을 듣고 나온 상태이고 그가 들어갈 차례이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만난 형님은 오늘을 넘기기 힘드니 일단 들어가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어라고 하였다. 물론 당뇨합병증에 의한 암으로 진단되어 수술이 성공한다고 해도, 몇 년을 넘기기 힘든 위험한 부위에 발생한 병이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해둔 상태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임종을 목전에서 보게 된다니 마음이 아파왔고, 어떻게 위로를 하여 편안하게 떠나시게 할 수 있는가가 마지막 남은 일이었다. 희미한 소리로 무언가 눈으로 손으로 함께 의사를 표시하는 게 아니던가.


“둘째야, 너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하다. 친할아버지 제사를 모셔 주기 바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독립......, 너그 어머니......”라고 마지막 말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느낌상으로 전해오는 뜻을 나름대로 알아차리고 말한다.

“아버지, 저를 대학까지 다니게 해 주셨고, 장가까지 보내주셨는데 무슨 유산이 필요합니까. 저가 친할아버지 밑으로 들어갔으니 당연히 제사를 잘 모시겠습니다. 남으신 어머니도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하고 그는 아버지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명세를 하였다. 나머지 할아버지 독립......는 분명하게 알아듣지 못했지만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하여 노력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유언을 받아들여 가슴에 깊이 새겨 두었다.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본가의 서적을 정리해야 했다. 다락방에 대동기문, 고문진보 등 고서적이 첩첩히 두터운 먼지에 쌓여 퇴색되고 있었다. 그중에 한국청년운동사를 펼치는 데 미농지에 작성된 붓글씨의 육필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조부님의 독립유공자 신청서류로 서술형식에 상소문을 쓰듯이 고풍스레 작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객관적인 입증자료는 지역 신간회 발기총회 때 조부님의 검속기사 스크랩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농민조합운동과 관련된 보고서인 고등경찰관계적록 발췌분이 전부였다.


그는 본가를 다녀오는 길에 승학산 기슭에 자리 잡은 관음사를 찾았다. 아버지는 유학자로서 불교를 믿지 않았지만 그는 명복도 빌 겸 그 절을 찾은 것이다. 관음전에서 절을 올리고 조용히 좌정하여 생각에 잠겨본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린 시절부터 부산으로 내려와서 대학을 다닐 때까지 가까이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느 날 아버지가 그를 부르며 마산에 함께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던가.


“얘야, 오늘 나하고 마산에 기차 타고 함께 가자. 기차 타고 가면 재미도 있고 마산 바다 구경도 하면 좋을 게다.”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형님하고 같이 가면 안됩니꺼. 나만 가는 게 좀 그렇네 예. 같이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더.”

“허허,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니까 하자는 대로 너만 따라오너라. 나중에 차차 이야기 해 줄 테니 알것제.”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마산역에 내려 무학산 자락의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늦가을이라 그의 키보다 높은 억새가 우거져 있어 양손으로 헤쳐 가며 찾아간 게 허름한 산소이었다. 조그만 비석에는 한자로 된 이름이 적혀있었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 여기 다 왔다. 이 잔에 술을 한잔 따라봐라. 그리고 두 번 절하자.”

“여기가 누구의 산소입니꺼. 와 이리 멀리에 산소를 정했습니꺼.”

“여기가 나의 아버지가 되고 너에게는 친할아버지가 되신다. 옛날 독립운동 하다가 폐결핵에 걸려 마산결핵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알겠슴니더. 우리 할배는 두 분이시네 예. 성묘 가고 묘사 가고 하는 산소하고 이곳 하고 말임니더.”

“그래 맞다. 여기 할아버지는 너의 친할아버지이니까 앞으로 너가 잘 모셔야 한다.”하고 아버지는 깊이 말을 하지 않고 챙겨서 내려가지고 하였다.


그의 기억이 정확하게 그 시점에 머문다. 그가 커서 알고 보니 아버지는 큰집에 대를 이를 남자가 없어 양자로 가게 되었고, 형님을 비롯한 누나, 동생들도 그쪽으로 족보에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친할아버지는 모시는 손이 없어 둘째인 그가 족보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야 하게 된 것이다. 본래 자리가 맞는데 나머지 형제들이 큰집으로 아버지를 따라 족보를 옮긴 셈이었다.


그러니 임종 시에 아버지가 유산도 못주는데, 제사를 맡게 해서 안 됐지만 이해를 하라고 당부하신 것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혹시 거절할까 봐 염려도 되고 다시 한번 각인을 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 유언은 정성을 다하여 빠짐없이 확실히 모셔라는 강조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목탁소리가 들리기에, 눈을 떠보니 오후에 영가에게 올리는 예불시간인 것을 알아차리고 관음전을 나왔다.


그 후 그는 형님댁에서 모시던 친할아버지 제사를 이어받았다. 형님댁은 족보에 나오는 데로 큰 할아버지를 모시고 그는 친할아버지를 모시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모셔왔지만 언젠가는 분리하여 따로 모실 것을 복잡하게 할 것 없이, 바로 시행하는 것이 마음먹은 김에 편할 것 같아 형님하고 합의를 본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유언 중 첫 번째를 실천에 옮기게 되어 아내와 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의 마음은 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그의 아버지는 큰집으로 양자를 가게 되었고 성장과정은 어떠한가에 대하여 궁금증이 들었다.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외에 모르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찌하여 혼자 남게 되었으며, 친할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는가요. 친부모도 형제도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너그 아버지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친할아버지가 진사집 손녀하고 중매를 하여 결혼하였는데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었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신학문을 배웠는데 할머니는 그렇지 못해 대화가 안 되었던 모양이고, 중매결혼을 하다 보니 애정이 많이 부족했던 게지. 할아버지가 민족의식이 강해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경향각지로 많이 돌아다녀셨지."


"결정적인 것은 대구에 ‘민중이여 깨어나라’라는 대중연설을 하러 갔을 때, 신식교육을 받고 양장차림을 한 어느 여성을 만났던 것이 결별의 단초가 돼 버린 것이었지.”

“그래도 부부가 정은 없어도 자식들의 앞날을 위하여 참고 지내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애정 행각이야 옛날 선비들도 다 하던 것이고 할머니가 질투심이 생긴 모양이었군요.”

“그렇겠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너그 할아버지는 너무 인물이 잘 생겼고, 언변은 얼마나 좋은지 연단에 올라서면, 청산유수 같은 말로 청중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니라.”


“그래도 그 신여성을 알아 사귄 것은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보고 참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것 외에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듯한데 말입니다.”

“맞다. 다른 문제가 있었지. 할아버지가 일본 순사들에게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잡혀가서 구류를 살고 풀려나고 하여 집안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가. 일본넘들이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시점에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바람에 중국으로 피신을 하신게지. 언제 돌아올 기약도 없고 소문에 대구의 신여성과 함께 갔다고 했으니까, 할머니는 친정집과 상의하여 결단을 내린 것이제.”하고 그는 어머니와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당시로 돌아가 본다. 그래서 친할머니는 친정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간다.

“얘야, 너그 서방이 독립운동한다고 많이 잡혀가고 몸도 상하고 했던 걸로 안다. 너가 부부로서 정을 못 받고 소문에는 다른 여자를 가까이한다고 하여 마음이 안 편한 것은 당연하겠지. 그러나 너그 서방은 이곳은 물론이고 경상도에서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인사가 아니더냐. 너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런 잘난 인물에게 시집을 안 보내는 게 맞지만, 왜넘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이 얼마나 장대한 일이더냐. 그러니 참고 기다려 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길을 가야 하겠지.”하고 친정 아버지가 설득과 동정을 함께 하면서 말한다. 사실 선비 출신인 친정아버지는 딸의 행복보다도 광복이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녀 간의 애정도 중요하지만 남자의 큰 뜻을 이해하고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딸의 심중에는 부부간의 애정만이 갈라선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후일 친할머니의 윗동서가 되는 광동할매의 증언으로 밝혀지게 된다.


해방이 되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시절을 뒤돌아보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었다.

“그때 너그 시어머니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은 맞다.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은 상태라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때 큰집은 장자이기 때문에 거의 전 재산을 챙겼고, 나머지 형제들은 큰집에 의존하여 겨우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 그것은 그 당시의 장자 우선에 따른 전통이었기에 당연히 수용해야 했지. 그러니 독립운동한다고 집을 돌보지 못하고, 수시로 감옥에 가고 하는 남편을 믿었다간 자식들의 앞길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니었겠나.”


어린 아들과 딸의 장래는 암울하기만 하였고, 장차 크면 학교도 보내야 하는 데 언감생심인 셈이었다. 하루하루 먹을 양식도 부족하여 친정집에서 가져다 먹는 형편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내 큰 동서인 유동댁은 그러한 사정을 보고 안타까워하였었지. 너그 큰 시어머니인 유동댁은 슬하에 자식이 한 명도 없었으니 대를 끊기게 되었단 말일세. 그 당시 가문의 전통은 큰집에 남자아이가 없으면 동생들의 자식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이었지. 큰집 말고도 둘째인 우리 집도 딸만 둘이고 남자가 없었으니, 당연히 셋째인 너그 시가집으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 그래서 내가 나서서 너그 시어머니를 설득하였지. 이왕 큰집으로 양자를 갈 수밖에 없으니 ‘어린 그를 빨리 보내야 공부도 시키고 할게 아닌가’하였었지.


그러면 같은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큰집으로 보내면 생모와 양모를 함께 보게 되는 데, 아들이 어느 곳에 정을 붙일지 혼란이 온다고 말했었지. 그래서 좀 비정하지만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다른 곳으로, 아니면 친정으로 가있는 게 어떻겠느냐고 현실적인 제안을 하게 되었단 말이야.”하고 광동할매는 그의 어머니에게 그때의 사정을 이리저리 말을 하였었다. 그래서 친할머니는 친정아버지의 뜻도 있고 둘째 동서인 광동할매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떠나야겠다고 아주 큰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친할머니는 아들을 큰집에 맡기고 어린 딸을 업고서 보슬비 내리는 저녁에 그 마을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생모와 여동생을 어린 나이에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큰집으로 양자로 갔을 때 자고 나서 보니,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며칠간을 울고불고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큰집 어머니가 친자식처럼 대해주고 공부도 시키고 하여 잘 성장하였다. 집안의 기둥이 될 종손에게 바치는 열정은 눈물겨울 정도이었고, 그 눈물을 보고 그의 아버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였다. 다행히 친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명석하여 한학은 물론이고 신학문에도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런 와중에 슬픈 소식이 전해왔다.


“아이구, 시동생이 마산결핵병원에서 돌아갔다고 전보가 왔네. 그 무서운 병에 걸리면 살기가 힘들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그리던 해방도 못 보고 가서 참 안되었네. 그 넘의 왜넘들에게 수시로 붙잡혀 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이제 홀로 남은 우리 집 양자인 그 애가 참으로 불쌍하네. 저그 어미도 짐을 싸서 나가버렸으니 그 마음이 오죽 아프겠나. 내가 더욱더 정을 더 주고 잘 키워야 하겠네.”하고 큰 할머니인 유동할매가 동서들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해서 그의 아버지는 사실상의 고아가 돼 버린 셈이었다. 그렇지만 큰집 할머니는 그를 친아들처럼 애지중지 키우고 모든 것을 다 바쳐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아버지는 유년기를 잘 극복하고 해방을 맞이하고 광복된 조국에서 포부를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련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6.25 전쟁이 터진 후에 어마 무시한 일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그의 친할아버지가 신간회. 청년회, 형평사 운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특히 악덕 지주로부터 소작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농민조합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고 광복이 된 후에도 일제의 순사가 아닌 경찰의 감시 대상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일인 것이다. 그것은 공산당과 싸워야 하는데 공산주의에 동조할 가능성이 많은,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성향이 있는 집안에 대해 감시를 하고 부역행위를 못하도록 쐐기를 박자는 의도가 있었다. 이미 친할아버지는 광복을 못 보고 돌아가셨지만 아들에게 화가 미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기어코 위기는 찾아왔고 어둠의 그림자는 드리워졌다. 반공청년단이니 애국청년회인지 하는 급조된 조직이 나서서 마을마다 불온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냈다. 졸지에 그의 아버지도 그 명단에 포함된 게 아니던가. 그 명단은 소위 보도연맹이라는 것인데 개개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요새말로 블랙리스트인 셈이다. 그것을 작성한 인물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그의 가문에 불만이 있어 앙심을 품은 작자의 소행이었던 것이었다.


“아이구, 우리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보도연맹인가 하는 단체에 이름이 올랐단 말인가. 나는 처음에 그 단체가 마을의 애로사항과 친일파들을 찾아내서 알리는 언론단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그야말로 전쟁이 터졌으니 공산당으로 등을 돌릴 가능성이 있는 이적단체라는 이야기이네. 내 시동생이 독립운동하다가 죽었는데 무슨 그 아들이 이적단체에 들어갔다는 게 말이 될소리이가.”하고 큰집 유동할매가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그 당시에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은 대우는커녕 감시의 대상이 되는 부당한 설움을 받았다. 친일청산을 못했으니 일제에 빌붙어 권력을 장악한 친일파 출신 군인과 경찰들이 독립운동가들이 권력을 잡을까 무척 두려워하여, 이대통령의 묵인 하에 탄압을 하였던 것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마저도 버림받는 독립유공자, 그들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친일파들, 참으로 세상은 적반하장인 것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은 닥쳐왔다. 인민군이 삼팔선을 돌파하니 정부는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부산에 임시정부를 꾸렸다. 교도소에 이미 수감된 불순분자와 잠재적 동조자들인 보도연맹원들이 재판도 없이 처형되는 초헌법적인 사태가 발생하고만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디로 피할 겨를도 없이 꼼짝없이 군경에 의해 잡혀갈 신세가 된 것이었다.

“아, 큰일이 났네. 우리 아랫동네부터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집집마다 수색을 하고 있다고 하네. 벌써 몇 명이 오랏줄에 묶여 트럭에 실렸고 윗마을에도 들이닥쳤다고 하네.”하고 아랫동네에 있는 안촌할매가 뛰어와서 큰 할매에게 털어놓는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오기에 그냥 놔둘 수는 없어서 윗집 논실할매집으로 아들을 도망가서 숨으라고 한다. 그런데 집을 수색하고 그의 아버지가 안보이자 윗동네로 막 올라가는 참이었다. 그때 허급지급 아버지는 논실할매집으로 들어가서 숨을 곳을 찾았다.


“아이구, 야야, 무슨 이런 일이 있노. 집안에 숨으면 틀림없이 발각될 것이니 변소에 가서 앉아 있다가 나오이라. 여기 수건을 줄 테니 머리에 동여매고 여자인척 하고 기침도 안 하고 쥐죽었는 듯 있거라.”하고 논실할매가 여자들이 일할 때 쓰는 수건을 그의 아버지 머리에 동여매어 준다. 그때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이 집에 바로 밑에 사는 할매의 아들이 들어왔지요.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말을 하소. 거짓말하면 큰 죄가 되니 그리 알고 바른대로 말하소.”

“지금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이요. 그런 사람 숨기지도 않았고 숨을 만한 곳도 없으니 그리 아소. 나는 지금껏 거짓말 한 적도 없고, 절에도 다니는 데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하겠소.”하고 논실할매가 아주 위엄 있게 나무라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군인들은 이곳저곳 수색해도 안 보이니 가만히 변소 쪽으로 눈길이 가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그 몇 명이 변소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을 보고 논실할매는 큰 소리로 나무랐다.


“지금 젊은 군인들이 무엇하는 소행이요. 거기에는 우리 며느리가 용변을 보고 있는 데 옷을 벗고 궁둥이를 까내리고 있는 모습을 뒤비보고 싶다는 말이요. 젊은이들은 어머니도 누이도 없는 사람들이요. 만약에 문을 여는 행패를 부리면 가만히 않있을거요. 어디 몹쓸 짓을 하기만 해 봐라 가만히 안 있을 끼고, 나중에 어느 집 아들인가 꼭 파내어서 망신을 시킬테니까.”하고 논실할매가 큰 소리로 엄하게 꾸짖는다. 그러자 군인 한 명이 변소 문을 열지는 않고 문틈으로 살며시 보니 여인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대장님, 저 할매 말씀처럼 며느리가 용변을 보고 있네 예. 다른 데로 달아난 모양인데 빨리 서둘러 찾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 저 할매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것 같고 절에 다닌다고 하니 믿어야지. 부처님께서 거짓말이 큰 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자 빨리 윗동네로 수색을 가자.”하고 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끝나고 그의 아버지는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나고 보도연맹사건은 함께 종결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로 다가왔다. 그 이후 그의 아버지는 병석에 눕게 되었고 신경쇠약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몇 년간을 끊임없이 방황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모는 행방불명이며 양자로 간 큰집 어머니도 피난 갔다 온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으니 의지할 데가 없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경쇠약을 치유하기 위하여 몇 번씩이나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고, 그도 그때를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헤매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고 주위의 둘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간곡한 권고로 생업으로 복귀할 것을 결심하였다. 벌써 큰아들에다가 둘째인 딸과 셋째인 그가 이미 태어나 그들을 양육하고 공부시키는 일이 앞에 놓여있는 발등에 떨어진 불인 것이었다. 다행히 큰집에 양자로 가서 전답이 많아 머슴을 들이며 농사일에 빠졌다. 그도 어린 기억에 형님과 함께 가뭄이 심하게 닥친 해에 웅덩이에서 두레를 들어 올리며 논에 물을 대던 기억이 떠오른다. 타 죽어가던 모가 물을 만나 소생하는 것을 보고, 또 며칠 후 많은 비가 내려 논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오랜만에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영광과 환희의 시절도 있었다. 그 당시에 중학교를 졸업하였다면 고학력에 들어갔으니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다. 60년대 초 지방자치시대가 처음으로 열리게 되어, 군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읍내의 재력이 있는 유지와 맞붙었는데 넉넉한 표차로 이긴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독립운동을 한 친할아버지의 후광이 작용했고, 지역 향교의 장을 맡고 있던 둘째 할아버지의 힘이 매우 컸다. 불우하게 자란 조카가 성공하기를 바랐던 진심 어린 후원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영광과 환희의 시간도 잠깐, 일 년이 못되어 5.16 정변이 일어나 지방자치제도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날 대청마루에서 가족들이 점심을 먹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은 그쪽으로 향하였고 스님의 차림새를 보니 비구니 스님이었다. 어머니가 부엌에 가서 시주할 보리쌀 반 바가지를 퍼와서 갖다 주려고 하니 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이집이 유동댁집이 맞는지요. 내가 지나가는 길에 안부를 묻고 싶어 들렀네요. 참 세월이 무심하게 흘렀는데 아마 그 집터가 맞는 것 같은데, 전쟁에 불이 타서 옛 모습은 아닌 것 같네요.”

“스님은 어느 절에서 오셨는가요. 어떻게 여기가 유동댁집이라고 알고 계신가요.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밥 먹는 중이지만 이리 올라오시지요.”

“아이구, 맞구만.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하루라도 빨리 찾아가서 빌어야 되겠다고 했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네요. 내가 유동댁의 시동생 되는 분과 잠시 인연을 맺은 고령댁이라고 하오. 지나간 일들을 참회하기 위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아, 고령어머님 이시네요. 저는 얼굴도 모르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스님이 되셨구만요. 안 그래도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어떻게 지내시었는지 궁금하였답니다. 여기 서방님도 마찬가지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찾아오셨네요.”

“아이구, 내가 한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는데 어떻게 나타나겠는가. 그런데 부처님께 귀의하고 난 뒤로 꼭 한번 만나서 잘못을 빌고 싶었다네.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고 송구스럽구만.”


“내가 매일 이 집안을 위해 부처님 전에 축원기도를 하고 있다네. 나의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 내가 지은 조그마한 공덕이라도 있다면 모두 이 집으로, 특히 자네 서방에게 가도록 빌고 있다네. 그것이 내가 사죄하는 유일한 길이 아닌가 하고......” 하고 스님이 말끝을 잇지 못하고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의 권유에 의해 마루에 올라와서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다. 그의 아버지도 반기시며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을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분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비록 가정을 무너지게 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하였지만 참회한다고 찾아왔는데 어찌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랴. 자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그의 아버지를 꼭 한번 보고 싶어 찾아왔던 것이다.


그 후 세월은 많이 흘러 그도 부산으로 가서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이 가문을 일으키고 미래를 위한 투자로 생각하여, 전답 대부분을 처분하여 부산에 무슨 서민금고에 높은 직함을 준다는 꼬임에 빠져 홀랑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대학에 진학한 형님과 함께 서대신동 허름한 판잣집 촌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그 뒷바라지는 누나가 동대신동 종고모님 집에서 왕래하며 해주었다. 아버지는 간간이 나타나셔서 생활비와 학비를 내놓고 가셨다.


이윽고 형님은 군대에 입대하였고 그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남은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동대신동 산복도로변에 방을 얻어 직접 취사를 해결해 주었다. 아버지는 헌책을 싸게 사서 파는 일을 하였고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입주할 형편이 못되어, 미문화원옆 골목에 좌판을 펼쳐 책을 팔았다. 동양철학을 아시니까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주팔자 등 운세를 봐주기도 작명도 해주기도 하여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었었다.


그 이후 형님이 제대하여 교직에 취업하게 된 후부터는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보수동에 작은 헌책방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오래도록 기다린 숙원이 이루어지고, 시골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도 올라와 오랜 기간 떨어져 있던 이산가족들이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아버지의 한학에 대한 명성은 자자하였다. 가문의 정자를 옮기는데 현판에 적힌 한시를 번역해 주기도, 가훈을 지어주기도, 행사 때 필요한 축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동갑내기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부모도 다 떠나가고 형제마저 없다 보니, 고독한 환경이 안으로 파고드는 학문에만 몰입하게 하였다. 오로지 자신에게 힘을 보태주는 것은 친구의 정이 아니라, 책 속에서 올바른 삶의 길을 가르쳐주는 선현들의 뜻이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나이를 초월하여 학문에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바로 친구들이었다.


“친구 다 소용없다. 어려우면 다 떠나간다. 내가 그것을 다 지켜보았느니라. 진짜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 한두 명만 있으면 된다. 그것도 학문을 통하여 뜻이 맞는 친구여야 하느니라.” 어느 날 그에게 아버지께서 하신 말이다. 명색이 친구라고 하지만 다 친구가 아니고 이해가 엇갈리면 떠나간다는 의미로, 번거로운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말고 학문을 통한 진리의 길을 가라는 훈계인 셈이었다.


어느 날 집안 제사 때 아버지께서 ‘선조의 얼’이라는 문중에서 발간한 책을 나누어 주셨다. 그 책에는 생육신인 어계 선생과 임진왜란 때 활약한 13 충신에 대한 기록이 있었고, 영월에 어계비원을 세워야 한다는 문중의 과제도 적혀있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헌책방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문중일에 몰두하였다. 문중의 대동보를 편찬하고 선조들의 문집을 발간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명절날 형님과 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영월 단종문화제와 한시 백일장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던가.


“야들아, 내가 요새 영월을 자주 오간다. 그곳 청령포에 어계 할배가 유배 중인 단종을 알현하러 가다가, 배가 없자 백호가 등에 태워 건네주었다는 설화가 영월읍지에 나오더라. 그래서 문중과 상의하여 영월군청에서 땅을 제공해 주면 생육신을 함께 모시는 어계비원을 건립할 계획이다. 지금부터 내가 자주 올라가서 기념사업에 힘을 써야 한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영월에는 매년 김삿갓 한시 백일장이 열리는 데, 너희들도 내가 지도를 해줄 테니 한시를 한편씩 적어 응모하면 좋겠다. 꼭 입선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한시를 배우는 기회로 삼아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김삿갓 선생과 단종이 있기에 영월이 나에게는 정말 자주 가고 싶은 고장이다.”하고 아버지는 어계 선조 기념사업과 김삿갓 백일장에 대해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셨다. 그 이후에 그는 영월을 마음 속에서만 그리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친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한 자료 수집과 공적조서를 작성하여 보훈처에 보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어렵고도 긴 세월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매년 광복절에 선정하는 독립유공자수가 몇 십 명에 불과하니 그 엄격한 선정기준을 통과하는 건 어찌 보면 하늘의 별따기인 셈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객관적인 자료도 없이 무슨 상소문 올리 듯한 공적조서로는 몇 번간 시도하였지만 관심도 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가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을 보니 어려운 듯 쉬운 듯한 표현이 있었는데, 그게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이었다. 그 문구가 오랜 기간 순진하고도 무모한 도전을 하게 한 단초가 되었다.


그는 우선 아버지가 준비한 신문 스크랩과 문헌자료에서 몇 가지 단서를 잡고 신문사를 방문하여 마이크로필름에 담긴 기록을 검색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서울 출장에서 몇 가지의 중요한 기록을 찾아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인신구속을 당한 수형기록이었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새로운 사건에 대한 구류기록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새로운 희망을 갖고 공적조서를 작성하여 부산보훈청에 접수하였다.


기다리던 광복절이 다가왔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담당 주무관을 만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유공자선정 숫자가 늘어나지 않아 탈락하였다고 하였다. 한술 밥에 배부르랴 하면서 몇 년간을 지속적으로 공적심사 신청을 올렸다. 매년 초에 올려서 광복절에 발표하는 선정결과는 매년 여지없이 꿈을 무너뜨렸다. 해마다 자료를 구하기 위하여 서울을 오갔지만 결정적인 자료는 나오지 않고 나올 기미가 안보였기 때문에, 형제들이 이제 그만두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그 말은 고생을 멈추라는 뜻이지만 멈추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지켜야 할 유언이었고 결실은 위대한 유산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국립도서관을 찾아가서 인물 검색을 하니 친할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니던가. 그것은 최근 논문에 수록된 자료로 지금껏 찾지 못한 자료이었고 그 내용은 주로 농민조합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정말로 반가웠고 공적서에 새롭게 적을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내용이었다. 그 자료를 토대로 새로운 신문기사와 인터뷰 내용을 반영하여, 이듬해에 공적조서를 새로 작성하여 올렸지만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논문저자에게 새로운 자료가 없는지 공적사항 심사에 대한 자문을 얻고자 전화를 하였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영남지역에서 농민조합운동을 하신 퇴우선생의 손자됩니다. 농민조합운동에 대한 논문을 읽고 말로만 듣던 저의 할아버지에 대한 활동 내용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십 년간을 계속 공적심사를 올렸지만 선정이 되지 못해 안타까워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아, 그러세요. 조부님께서는 농민조합운동으로 학계에서도 유명하신 분이고 그 외에 신간회 활동, 한글 웅변대회 개최, 백정 등의 신분차별을 타파하는 형평사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가 알기로는 수차례에 걸쳐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광복을 못 보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선정이 안되었다니 정말 의아합니다.”하고 논문저자인 교수가 전화상으로 안타깝다는 어투로 말을 하였다.


그는 계속되는 미선정 결과 통지로 더 이상 참기가 힘들어 국민권익위원회의 국민신문고에 청원을 올렸더니 담당 주무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생님께서 올리신 청원내용을 보훈처와 협의하여 검토하였는데 선정기준에 미흡하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좀 더 자료를 발굴하여 보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하고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답변을 하는 게 아닌가.


“대를 이어 몇 십 년간 자료를 찾아 올렸으나 매년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니 이제 저도 지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불가능하니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 아닌가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만 워낙 선정 숫자가 적으니까 통과하기가 힘든 것 같기도 합니다. 제도를 개선하여 선정자 수를 대폭 늘여야 하는 데, 보훈처 예산도 한정되어 있고 만만치는 않은가 본데, 일단 정책건의를 해보겠습니다.”

“해방된 대한민국이 이제 못 사는 나라도 아니고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데 예산이 부족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전후 프랑스가 5년간 나치와 싸운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포상한 유공자수가 몇 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을 위한 연간 예산이 무려 몇 조원이라는데, 36년간 일제와 싸운 독립유공자 포상자수가 고작 몇 천 명이고 예산이 부족하다는 게 정말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또다시 위기에 빠지면 어느 누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까.”하고 넋두리를 하면서 죄 없는 국민권익위원회에 화풀이를 하였다.


이러한 집요한 노력으로 그해의 심사결과 통지서에는 ‘자료상 인물과 동일인 여부 불분명’이라는 상당히 진전된 내용이 들어있어 고무되었다. 이제는 공적은 인정되었고 동일인으로 확인만 되면 통과되는 것으로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다음 해에는 보훈처에서 현지에 공적조서의 내용이 사실인지 검증하러 내려왔다. 그의 동네 생존 인물들과 인터뷰를 하고 면사무소 호적부와 초등학교 학적부까지 확인하고 갔으니, 그 기대로 가슴이 벅찰 정도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일 년처럼 광복절 수상통보를 기다렸다.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우편함을 하루에 몇 번이고 뒤적이곤 하였다. 어느 날 아내가 가슴이 설렌다고 하면서 가져온 보훈처 등기봉투를 기도하며 열어보았다. 환희 대신 눈앞이 캄캄한 실망을 동반한 좌절감으로 몇 초간 실명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하는가 계속해야 하는가의 또 다른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아내와 아들마저도 그를 어리석다고 보는지 애처롭게 보는지 분간이 안되었지만, 그래도 계속해 나가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침묵으로 예의를 지켜주었다.


그가 최초로 공적심사 신청을 한 지 20년이 흐른 해에는 그간의 자료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또다시 공적심사 재신청을 올렸다. 그런데도 또다시 탈락하였기에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하늘에다 맡기는 수밖에 없다 하고, 그다음 해에 또다시 재신청서를 올렸다. 이제는 기대도 좌절도 없는 무심의 상태가 되어 광복절이 오는지 가는지 내버려 두고 일상에 전념하였다. 어느 날 핸드폰으로 공공기관인 듯한 번호로 전화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부산보훈청입니다. 퇴우선생님 손자분이 맞으시지요. 조부님께서 이번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서 미리 연락드리니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셔서 포상증서를 수령하시기 바랍니다. 축하드립니다.”하고 담당주무관이 말하였다. 드디어 꿈은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 꿈이 이루어졌는데 늦게 도착한 것이다. 이제는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 중 마지막 하나를 이루었으니 그것은 집념 어린 노력의 결실이기도, 아버지가 내려주신 물적 재산이 아닌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유언은 아니지만 한 번씩 당부하였던 영월과 김삿갓에 대해 관심을 가져라는 말이 있어 나이가 들어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강원도를 여행할 적에 영월 장릉과 청령포를 들른 것을 계기로, 자주 영월을 오갔으며 단종의 충신들과 김삿갓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그리고 한시는 아니지만 고풍 어린 시조를 적어서 그 이야기 속에 함께 넣었으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한이란 주제로 한강유역에 얽힌 사연들을 찾아서 답사하여 십여 년간에 걸친 여정을 담은 역사기행문을 발간하였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영월의 단종과 김삿갓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에 이 또한 귀중한 유산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아버지를 추상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우한 사연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지극한 효자로서 훌륭한 아버지로서 운명을 바꾼 분이라고 믿었다. 형제가 없는 독신이기에 등실등실한 아들딸들을 두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워하였겠고 그것이 생명의 동력이 되었던 것 같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을 참아내었고 숱한 위기를 극복해 나갔으며, 한 푼이라도 아껴 자식들 공부를 시켜려는 근검절약 정신은 가문의 표상으로 기억될 것이다. 불우한 출생의 사연은 어둡고 슬프게 보이지만, 역경을 헤쳐 나가며 이룬 공덕은 밝고 아름다운 결실로 변전(變轉)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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