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구병모 #영화 원작 소설 #청춘 #인생의 절정기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파과, 342쪽
파과 1. 破瓜
1.
여자의 나이 16세를 이르는 말. ‘瓜’ 자를 파자(破字)하면 ‘八’이 두 개로 ‘二八’은 16이 되기 때문이다.
2.
남자의 나이 64세를 이르는 말. ‘瓜’ 자를 파자하면 ‘八’이 두 개로 두 개의 ‘八’을 곱하면 64가 되기 때문이다.
파과 2. 破果
명사: 흠집이 난 과실.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파과’의 여러 뜻을 살펴보다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여자 나이 16세도 남자 나이 64세도 ‘파과’라고 부른다니 참으로 의아합니다.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납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왠지 손해 보는 기분입니다.
이 책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알게 되었는데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원작부터 찾아 읽는 제 취미 때문에 바로 구입했습니다. 제목에서 주는 이미지처럼 요즘 찬란한 불꽃같은 시절을 지나 사그라드는 것 같은 저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 책에 몰입하여 끝까지 단숨에 읽어 버렸습니다.
저는 사춘기에 처음 생리를 시작하면서부터 엄청난 생리통에 시달렸습니다. 언젠가는 너무 통증이 심해서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가 생리를 시작하면 저희 집은 적색경보가 발령되고 엄마아빠는 물론 언니오빠들까지 저의 상태를 살피며 다들 전전긍긍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일주일 동안 결석을 했고 중고등학교 때도 같은 이유로 조퇴나 결석을 자주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엄마는 약효가 있다는 민간요법이며 한약이며 진통제까지 안 먹어본 것이 있나 싶게 이것저것 지어다 주셨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고 산부인과도 여러 군데 가봤지만 ‘호르몬이 남들보다 더 많다.’, ‘자궁 위치가 뒤쪽에 있어서 척추신경을 누르니 결혼해서 애 낳으면 좋아질 것이다.’등 딱히 효과를 본 것이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참고해 결혼도 일찍 하고(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애도 셋이나 모두 자연분만으로 낳았는데 그 후에도 저를 평생 괴롭힌 생리통은 그대로였습니다. 게다가 저를 닮은 딸들이 생리통으로 고생할 때면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작년 초, 그렇게도 규칙적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저를 괴롭혔던 생리가 차츰 불규칙하게 나오더니 몇 달이고 소식이 없다가 잠깐 비취다가 하길래 산부인과에 진료예약을 했습니다.
“폐경 징후네요. 폐경이라고 해도 갑자기 뚝 끊기는 게 아니라 타다 남은 모닥불이 꺼지기 전에 빛을 내며 밝게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것처럼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왔다가 점점 없어질 겁니다.”
평생을 저를 괴롭혔던 생리가 사라진다니 홀가분하면서 후련하기도 하고 ‘이제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늙은 몸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를 고통스럽게 괴롭히긴 했지만 그것이 내 아이들을 자궁 속에서 튼튼히 자라게 하는 영양분이 되어서 셋 다 건강한 아이로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었다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제 생리가 사라진 지 벌써 일 년이 다 돼 갑니다. 어쩌면 생리통처럼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내 젊은 날들은 그것을 양분으로 자라난 다양한 지금의 열매들로 인해 의미와 가치가 생기는 듯합니다. 도리어 이제는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며 괴로워했던 내 젊은 날의 무모한 열정과 지치지 않는 호기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저지르는 도전과 용기가 그리워지기까지 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극장에서 영화까지 보고 나니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어제 하나로마트에서 제철이라 잘 익은 단단한 복숭아 한 상자를 사서 나이 어린 후배들과 나눠 먹으며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건 식구들과 맛있게 먹었습니다.
‘파과’가 상실인지, 지금의 제가 ‘파과’인지 아닌지 단정 짓기 어렵지만 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