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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WATNEUNGA Jan 14. 2022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책 이야기 08]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염병 #코로나19 #죽음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를 벗어난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흔히 재앙이란 비현실적인 것, 잠에서 깨면 사라지고 마는 악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재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악몽이 점점 진행됨에 따라 사라지는 것은 사람들, 그것도 제일 첫 번째는 휴머니스트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은 장사를 계속했고, 여행 계획을 세웠으며, 개인적인 견해들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었다. 미래며, 여행이며, 토론들을 앗아 가버리는 페스트를 그들이 과연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벌어진 이상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그저 환절기나 겨울에 유행했다 사라지는 감기 정도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봄이 되면 아니 여름이 되면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른 나라는 특별조치도 취하지 않았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염병의 위험성을 역사책에서나 얼핏 보았을 뿐 의학과 첨단 문물이 발달한 21세기에 일어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겪어보는 전 세계적인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위험에 당황스럽고 불안한 마음 한구석엔 ‘조금만 기다리면 곧 백신이 나오겠지’ 이전에 신종플루가 그랬고 메르스가 지나갔듯이 이번에도 금세 지나가리라 여겼다. 잠깐의 멈춤은 마치 휴가처럼 바쁜 일상을 잠시 쉬게 한 후 사라질 거라고.

어머니와 지척에 살면서도 거의 찾아가 보지도 않던 아들들은 자신들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 주름 하나하나에 모든 후회와 모든 근심을 담았다. 미래란 전혀 보이지 않는 이 완전하고도 갑작스러운 이별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하루하루를 차지하는 존재, 여전히 그토록 뿌리치지도 못한 채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도시나 나라들의 봉쇄령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은 생이별을 해야 했고 면회 금지, 접촉 금지 명령에 요양병원에 계신 노부모님은 면회조차 할 수 없었고, 그 사이 코로나에라도 확진되면 병간호는 물론 임종조차 보지 못하고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하는 황망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러한 상황은 나에게도 일어났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코로나는 아니셔서 아버지 곁을 지키며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외국에 나가 있던 오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망증명서를 보내고 나서야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장례식도 입국과 함께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 때문에 4일장으로 치러야 했다.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기도 조심스러운 상황에 가족끼리만 슬픔을 나누며 장례를 치러야 했지만 소식을 듣고 힘든 상황에도 한달음에 달려와준 고마운 사람들도 있었다. 결혼식, 신혼여행, 돌잔치 등 우리 생애에서 중요한 대소사들이 속속들이 취소되고 연기되었으며 여행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도 할 수 없었고 정겹게 이웃과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나눌 수도 없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손을 잡지도 함께 앉아있을 수도 없었고 쉬는 시간에 수다를 떨 수도 운동장에 나가서 축구도 할 수 없이 거리두기를 해야 했다. 아이들의 구령 소리와 환호 소리가 가득했던 운동장은 고요한 적막마저 흘렀다. 생동감 넘치던 사람들과 공간들은 고요함에 파묻히고 인적마저 드물어 퇴근 후 동료들과 가볍게 하던 치맥도 하기 힘들어졌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투쟁을 해야 하며,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든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든 경험하지 않도록 최대한 막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유일한 방법이란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것뿐이었다. 이 진실은 훌륭하지도 않았고, 단지 논리적 귀결일 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노력하기 시작했다. 자영업자들은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가게 문을 정해진 시간에 닿았고 날마다 소독과 방역을 위해 닦고 또 닦았다. 사람들은 모임을 줄이고 모이는 수를 줄이고 집 밖에서는 잠시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으며 혹시 모를 감염을 막기 위해 손을 씻고 또 씻었다. 회사는 재택근무를 확대하고 회의는 화상으로 진행하였다. 학교에서는 책상마다 투명 가림막을 설치하고 책상을 최대한 떨어지게 재배치하고 거리두기를 위한 스티커를 곳곳에 붙였다. 침이 튀거나 신체 접촉이 있는 체육이나 음악 수업 활동은 다른 활동으로 대체하고 교실이나 특별실의 공용 자료는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 시 손 소독을 철저히 시켰다. 식당과 카페에서는 테이블 수를 줄이고 간격을 넓히고 정한 시간 외에는 포장이나 배달만 가능하게 하였다. 마트, 영화관, 백화점, 병원 등 모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출입 명부를 작성하고 혹시나 확진자와 밀접 접촉하게 되면 14일이나 되는 자가격리기간을 지키며 철저하게 격리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외출과 휴가를 반납했고 격리 치료실이 있는 거점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가족들과의 이별도 감수하며 치료에 전념했다.

달빛 가득한 밤하늘 아래로 도시에는 허연 벽들과 곧게 뻗은 길들이 늘어서 있을 뿐 나무 한 그루 없으니 검은 점 같은 흔적이 찍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산책하는 사람의 발소리도 강아지 한 마리 짖는 소리도 없어 그야말로 절대로 깨지지 않을 정적 그 자체였다. 침묵에 잠긴 거대한 도시는 생명력을 잃은 육중한 정육면체 덩어리들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들 사이에서 이제는 사람들이 기억 못 하는 자선가들이나 청동 속에서 영원히 질식사해 버린 듯한 오래전 위인들의 말없는 조각들만이 돌이나 쇠로 된 가짜 얼굴을 가지고 한때 인간이었던 자의 품위 잃은 모습을 드러내려 애쓸 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손님을 유혹하던 식당과 술집의 화려한 조명은 이른 저녁부터 하나둘씩 꺼지고 지나칠 때마다 어깨를 부딪힐 만큼 북적이던 많은 사람들도 거리에서 사라졌다. 늦은 밤까지 일하거나 술에 취해 귀가하는 사람들을 태우던 버스, 지하철 운행시간도 단축되었고, 국내는 물론 해외 유명 관광지에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겼으며 지방자치단체들이 야심 차게 준비한 각종 지역축제와 행사들도 줄줄이 취소되었다. 밤늦도록 뛰며 목이 터져라 함께 따라 불렀던 유명 가수의 콘서트, 관객의 호흡소리마저 무대 위 배우들과 어우러졌던 소극장뿐만 아니라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던 대극장 공연들, 개봉하기가 무섭게 천만 관객은 거뜬히 넘겼던 영화들도 개봉을 미루거나 아예 제작조차 하지 못해 텅 빈 영화관이 되어 버렸다. 마치 도시는 일시 정지된 화면처럼 모든 일상이 정지되어버렸다.

우리 시민들은 순종적이었고, 흔히 말하듯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상황에 순응하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불행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의사 리유는 바로 그것이 불행이며, 절망에 익숙해진다는 건 그 자체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중략) 그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불행을 공동체 모두의 불행과 어떻게든 떼어 놓고 생각하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그런 혼란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억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안에 자리를 잡아갔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그들에게 현재가 되었다. 그 점을 분명히 말해야 하는데, 사랑의 힘, 심지어 우정의 힘마저도 페스트가 모두에게서 앗아 가버렸던 것이다. 사랑이란 조금이라도 미래를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는 순간들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처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병했을 때 전국에서 한 도시에서만 확진자가 나와도 전국 모든 곳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지침이 강화되고 확진자 숫자가 백 명이 넘었을 때 모든 뉴스에서 속보로 전해질만큼 예민하게 받아들여졌다.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열 명 이하에서도 우리는 모두 심각하게 여겼고 학교는 등교중지, 회사는 재택근무 조치를 신속하게 내려 대응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시 정지된 일상은  보통의 일상이 되어 아무도 없는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코로나 하루 확진자의 숫자가 천 명을 넘어서 만 명에 가까워져 몇 백 명 숫자에는 놀라지도 않고 하루 사망자가 수십 명에 이르는데도 그저 멍하니 듣게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학교에서 외톨이처럼 아무 말 없이 있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고, 정부에서 발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당연한 듯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는 코로나 이전에 살았던 일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이 상황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 전염병은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인 것처럼.

바로 그런 어린아이 하나가 마치 창자를 물려 뜯기라도 하는 듯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면서 다시 한번 자기 몸을 구부렸다. 그렇게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가 자신의 훌쭉한 몸뚱이가 휘몰아치는 페스트의 광풍에 접히고 뜨거운 숨을 계속 내쉴 때마다 찢어지기라도 한다는 듯 오한과 경련으로 몸을 떨었다. 돌풍이 지나고 나자 몸이 잠시 축 늘어졌고, 신열이 물러가는 듯 축축하고 독을 품은 모래사장 위에 거친 숨을 내쉬는 아이는 내처 졌는데, 그곳에서의 휴식이란 이미 죽음을 닮아 있었다. -본문 중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2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였다. 소화가 잘 안 된다는 말에 집 근처 병원에서 처음 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췌장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은 지 1년이 조금 넘은 때였다. 첫 진단 때부터 이미 손 쓸 수 없을 만큼 암은 온몸으로 전이되어 있었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 등에 붙인 마약성분의 패치는 나날이 그 개수를 더해가다 더 이상 효과가 없어졌을 무렵이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신음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셨고 쉬지 않고 몰아치는 고통을 어떻게든 버텨보려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통증은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임종하시기 직전에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도 없을 정도로 지켜보는 가족들도 다 함께 괴로워 울부짖었다. 생명이 다하는 고통을 어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표현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차라리 그 고통이 끝나서 영면하시기를 바랄 정도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왜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는 것일까?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삶에 대한 미련을 놓을 수 있게 하는 신의 마지막 배려인가?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으로 이승의 연은 그저 허망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누구이든 이러한 죽음의 고통을 미룰 티끌만 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마스크로 숨쉬기가 아무리 답답하더라도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가지 못하더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로만 듣더라도

방역시스템을 지키기가 불편하더라도

방호복에 온 몸이 따가울 정도로

땀을 흘리더라도


단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지킬 수만 있다면

죽음의 처절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남은 가족들의 평생의 회한과

그리움의 무게를 줄일 수만 있다면


수십수백 가지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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