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임용고시에 떨어지다 #장미향 나는 아이 #한라수목원
"수험번호 389번 장, 미, 향, 님.
맞으면 1번, 틀리면 2번을 눌러 주세요."
"삐~"
"1998학년도 귀하의 초등교원 임용시험 결과는"
'제발 제발 제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부자연스럽지만 익숙한 기계적인 음성이 말했다.
"불합격입니다!"
'뚜~뚜~뚜~'
임용고시에 떨어졌다.
인생에서 첫 실패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을 부를 때
장미라고 할래요
-4월과 5월의 노래 '장미'중에서-
아주 어릴 적부터 미향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감이 넘쳤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보는 시험마다 100점인 시험지와 학력우수 상장을 매달 받아와서 어느 때부터인가 부모님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다. 미향의 자신감은 비단 성적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1학년 때부터 체격도 같은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커서 1학년 입학식 때 담임선생님께서 뒷 줄에서 우뚝 솟아있는 큰 키만 보시고는 함께 온 엄마에게 깜짝 놀라 말씀하셨다.
“아이고 어머님, 애가 이렇게 크도록 학교도 안 보내고 집에서 방치를 하셨습니까?"
그때만 해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집에서 일을 시키느라 아이를 학교에 안 보내는 집도 더러 있었기에 덩치만 보고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셨던 것이었다. 미향의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오히려 다른 입학생보다 한 살이 어린 나이였다. 소위 말하는 '빠른'이 붙는 어린 나이였지만 졸업식 때까지 남녀 통틀어 키가 제일 큰 아이였다.
이런 까닭에 4학년 때부터는 학교에 운동부가 새로 생길 때마다 선생님들은 미향을 자신이 만든 운동부로 앞 다투어 데려가셨다. 그래서 어떤 땐 육상부, 테니스부, 농구부 등 여러 종목을 한꺼번에 하기도 했다. 시골에서 학원도 없고 학교 끝나면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노는 것 말고는 딱히 방과 후에 별다른 할 일이 없었던 터라 운동부 훈련은 기회가 될 때마다 참여했다.
“오늘 훈련은 타이어 매고 운동장 5바퀴 돌기부터 시작한다. 끝나면 모래주머니 차고 계단 오르기 50회 바로 실시하도록!”
타고난 큰 골격에 날마다 방과 후에 진행되는 운동부 기초 체력 훈련으로 초등학생 여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온 몸에 근육이 붙고 탄탄한 허벅지로 여느 어른 남자 못지않은 근육질의 몸매가 되어 갔다. 평상시의 운동부 훈련은 가끔 인근 학교 운동부와 친선경기를 치르거나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전국 소년 체전 대비 학생 지역 대표 선수를 선발하기 위한 지역 예선 대회 준비를 위해 날마다 계속되었다. 그 시절 운동부의 특권은 가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시합 전엔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운동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업을 듣지 않아도 시험을 보면 다 100점이고 덩치도 커서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나에게 어떠한 태클도 걸지 않았다.
드디어 전국 소년 체전 지역 대표 선수 선발을 위한 예선 경기가 군청 소재지의 한 초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미향의 육상 주종목은 100m, 200m 단거리와 높이뛰기였다.
-준비
-차렷
-탕!
초등학생들 육상 단거리 경기에서 남들보다 긴 다리는 매우 유리했다. 운이 좋게 육상 단거리 예선에 통과하게 되었고 높이뛰기 예선 경기가 곧바로 이어졌다. 높이뛰기는 1m 높이부터 시작하여 1차 시기, 2차 시기 이렇게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미향이 긴장한 탓에 첫 번째 높이의 1차 시도부터 실패했다. 다행히 2차 시기에 높이뛰기 바를 넘어서 겨우 다음 단계의 도전 자격을 얻었다. 이어지는 1m 10cm, 1m 20cm, 1m 30cm… 더 높은 높이에 도전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1차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2차 시기에는 또 모두 성공하여 구사일생으로 마지막 최종 단계까지 극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모두 탈락하고 마지막 두 선수만 남은 결선에서 미향이 먼저 도움닫기를 하였다.
"장미향 선수, 1차 시기입니다."
"삐~익~"
첫 도전부터 1차 시기엔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던 미향이 마지막 결선에서는 멋지게 땅을 힘차게 박차고 자신의 가슴보다 높은 높이뛰기 막대기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내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붕~' 떠올랐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아주 천천히 높이뛰기대에 걸쳐진 기다란 막대기를 머리부터 등을 지나 엉덩이, 다리에 이르기까지 반원을 크게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던 미향의 눈에 아주 잠깐 하늘 위에 떠있던 해가 '번쩍' 하고 빛나는 것 같아 보였다.
"1차 시기 통과!"
초록색 깃발이 올라갔다. 이번 높이뛰기 경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1차 시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첫 도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결과로 이어졌다. 바로 최종 순위에서 1위가 된 것이었다! 미향과는 반대로 계속 1차 시기에서 성공하여 결선까지 올라왔던 상대편 선수는 처음으로 1차 시기에 실패하였고 이어지는 2차 시기에서도 결국 성공하지 못해 탈락하고 말았다. 미향은 자신이 지역 대표 선수로 선발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끝까지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어!’
이번 일을 계기로 무슨 일이든 자기 자신을 믿고 끝까지 도전해볼 수 있는 ‘용기’가 어린 미향의 마음 한 구석에 슬며시 자리 잡게 되었다.
4학년 때 더 많은 농사를 짓기 위해 이사하신 부모님을 따라 전학을 온 미향이는 전학 온 첫날부터 '똑똑한 아이'로 각인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따옴표 때문이었다. 전학 온 첫 수업이 국어였다. 선생님이 문장부호를 칠판에 적으시고 질문을 하셨다.
“이 문장부호" " 는 뭐라고 부를까요?"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 아무도 손을 들지 않길래 답답한 마음에 전학 온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미향은 손을 번쩍 들었다.
“따옴표입니다."
"따옴표, 맞습니다! 이야~전학생 대단하네! 모두 박수!"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미향이를 쳐다보았다.
“새로 전학 온 친구가 제일 똑똑하네. 너희들은 앞으로 저 친구한테 배워야겠다."
‘따옴표 하나로 똑똑한 아이가 되다니'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처음 보는 아이들에겐 강한 인상을 남겼음이 분명했다. 국어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미향이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너 4학년 맞아? 5학년이나 6학년이 4학년에 잘못 온 거 아냐?"
아이들이 이런 의구심을 갖는 건 따옴표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향이가 자신들에 비해 너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따옴표 사건'으로 새 학교 첫날부터 똑똑한 아이라 각인된 미향이에게 다시 한번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번엔 '자전거 타는 이상한 여자애' 사건이었다. 전학 오기 전 여덟 살 때부터 두 발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미향이는 전학을 온 후 학교랑 집이 멀어서 다음 날부터 바로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그런데 자꾸만 남자아이들이 따라다니며 놀리기 시작했다.
“우와 웃긴다야. 여자애가 자전거를 다 타고 다니네."
이 학교에서 자전거를 타는 여자아이는 전교생 중 미향이가 유일했다. 눈 하나짜리 동네에 가면 눈 두 개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예전 학교에선 흔하디 흔한 것이 이 학교에선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아이들은 나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신기하게 보면서 어떤 남자아이는 미향이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그런 대우를 당하고 가만히 있을 미향이가 아니었다.
“느그들, 다 죽었어! 저리 안 비키냐?"
이렇게 악을 쓰면서도 '왜 남들과 다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괴롭힐까?' 어린 마음에도 왠지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하지만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이 나이도 많고 수도 많아서 여자 아이 혼자 힘으로 그 아이들을 계속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럴 땐 무조건 엄마 찬스가 제일이었다.
"우리 딸 자전거 탄다고 놀린 놈 누구여? 너여?"
"전 아닌데요."
"그라믄 돌 던진 놈은 누구여? 내가 아조 혼구멍을 내블랑게! 어디서 못된 짓을 내 딸한테 한다냐 다시 그러믄 내가 가만 안둘겨! 알것냐?"
엄마를 모셔와 놀리는 남자아이들을 모조리 혼내줬다. 역시 엄마 찬스는 확실했다. 이젠 더 이상 괴롭히진 않았지만 여자아이들이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혼자 하면 이상하지만 다 같이 하면 보통 일이 되겠지.'
이런 마음을 먹고 나서 학교가 끝나면 친한 여자아이들부터 한 명씩 운동장에서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수업 끝나고 자전거 타는 거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운동장으로 나와라."
그 후로 자전거 타는 여학생이 한 명 한 명 늘어가더니 졸업할 때쯤엔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2년 정도 걸렸어도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우와, 또 미향이가 1등이야!"
중학생이 된 미향의 진짜 자신감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샘솟았다. 당시 다니던 시골 중학교에서는 시험을 볼 때마다 학년 복도 게시판에 전교 1등부터 100등까지 학년별로 전지에 등수와 이름을 써서 떡하니 붙여 놓았었다. 그 종이 위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항상 '장미향'이라는 이름이 가장 윗 칸에 쓰여 있었다! 미향은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왠지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교생이 삼백 여명 안팎인 작은 시골 중학교이지만 1등은 언제나 미향의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시골 작은 중학교에 다니다 인근에서 제일 큰 광역시의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미향의 자신감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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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시골소녀, 도시로 유학 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