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임용고시에 떨어지다 #제주도 서귀포 #산방산 #용머리 해안
"합격입니다!"
미향이의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로 구분할 수 있는 첫 도전은 바로 고입선발고사 소위 '연합고사'라고 불리는 고등학교 입학자격시험이었다. 연합고사는 1974년부터 일부 지역부터 시행된 고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치러진 일종의 절대평가라고 보면 된다. 1970년대 이전의 고교등급제의 폐해가 심하여 명문 대학에 많은 입학생을 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사교육 광풍이 불었고 빽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배경을 이용하여 자녀들을 부정 입학시키기까지 했다. 서울에 있는 명문고 주변에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하숙을 하며 가정집을 개조한 과외방에서 밤늦게까지 과외를 받는 어린 중학생들이 넘쳐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전국적으로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었고 일반계고등학교에서 배울 어느 정도의 자격이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 연합고사를 실시한 것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중학생들의 '수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연합 고사일에는 수능처럼 중학교 선배들이 출신 중학교 후배들을 시험장 주변에서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험은 1990년대 말부터 차츰 폐지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2018학년도까지 실시되었지만 저출산의 영향으로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무의미해져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해는 1989년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 '연합고사'라는 것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연합고사 성적은 꽤 잘 나왔다. 왜냐하면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의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시험 성적순으로 교실 자리배치를 했는데 미향이의 자리가 1등에 가까운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자신감은 딱 연합고사 성적까지였다.
처음 고등학교에서 치른 반배치고사는 말로만 듣던 '검은색은 글씨요, 흰색은 종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떠오를 만큼 알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서 학원은 아예 없고, 그렇다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문제집 한 권이라도 사서 풀어보라고 권하지도 않으셨다. 수업시간에 자기 과목 교과서만 공부시켰고 국어, 영어, 수학이 중요한 과목인 것도 고등학교에 와서야 알았다. 중학교에선 수업이 끝나면 운동을 하거나 들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놀기 바빴다. 중학교에서 3년 내내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로 난 우물 안의 자신감만 높은 개구리였다는 걸 첫 시험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원을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무조건 전교생이 학교에서 평일은 아침 7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주말은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자율이 아닌 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그래도 개인 과외나 학원을 나머지 시간에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있어도 집안 형편상 꿈도 꾸지 못했다.
미향이의 집은 사 남매에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아버지 명의의 땅은 단 한 평도 없는 소작농으로 추수를 하면 수확한 쌀의 절반을 땅주인에게 소작료로 주었다. 아버지는 칠 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찍 할아버지를 여의시고 큰아버지가 6.25 전쟁 때 돌아가신 후 14살 어린 나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할머니와 다른 형제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서의 짐을 짊어지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외할아버지가 환갑에 아들 낳으려고 낳은 자식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나 외할아버지께서는 자식을 더 이상 낳는 걸 포기하시고 친척집에서 아들 하나를 데려와 양자로 삼으셨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 여섯 살 때 돌아가신 후 양자로 들어온 외삼촌은 그 많던 외할아버지 재산을 다 가져가 탕진해버렸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비운의 '애기씨'가 어머니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삶도 순탄치가 않았다. 게다가 몸도 불편하게 태어나셔서 주위 친척 어른들이 가난하고 식구 많은 집에 중매해 한 번 만나고 결혼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아버지셨다.
부모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셨지만 딸린 식구들에 거기다 자식이 넷이나 생겼으니 살림은 늘 빠듯했다. 아버지가 그나마 부지런함으로 일군 재산과 땅은 큰아버지의 큰아들이 결혼할 때 거의 다 주셨다. 재산을 나눠주신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집안의 장자로서 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님들 제사를 잘 모시고 선산을 잘 돌보라는 바람이셨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큰 댁의 큰오빠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안 제사를 모신 적이 없었고, 선산은 말할 것도 없이 할아버지 묘의 벌초도 한 적 없었다.(모든 제사와 선산 돌보기는 전부 아버지가 하셨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자식들은 훌쩍 자랐다. 그 시절 첫 번째로 낳은 아이가 딸이면 아들을 낳지 못한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딸들에게 붙여진 숙명 같은 말이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었다.(지금까지도 언니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이 말처럼 태어나면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인듯 언니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방직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고 한 해 지나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많지도 않은 월급을 쪼개어 집에 부쳐오곤 했다. 서울에서 한 번씩 집에 올 때마다 동생들 선물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막내인 미향이와 아홉 살 차이 나는 큰언니가 늘 그리웠다.
언니와 미향 사이엔 오빠 둘이 있다. 그리고 오빠 둘을 낳고 나서 연달아 세 명의 아이를 유산하신 후 얻은 아이가 바로 미향이었다. 그래서 바로 위의 오빠와 나이가 네 살 차이가 난다. 아들이 둘이나 있음에도 어머니는 아가를 가지신 걸 알고 없는 살림에도 아이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큰 맘먹고 보약을 지어 드셨다. 그런데 하필 그 보약이 '아들 낳는 보약'이었다. 이왕 먹는 보약인데 옵션으로 '아들'을 추가하신 것이었다! 그런 보약은 아기가 생기기 전에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벌써 딸로 뱃속에 떡하니 자리 잡았는데 그런 약을 드셨으니 딸인데 아들 같은 외모와 성격을 갖게 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미향이는 지금도 문득 가질 때가 있다. 아무튼 가난과 고된 삶을 자식에게(정확히 말하면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셔서 오빠들은 중학교 때부터 인근 대도시로 유학을 보냈다. 그 뒷바라지를 위해 농사를 더 지을 수 있는 곳으로 고향을 떠나 이사한 것이 4학년 때였다.
"너 고등학교 가야쓰것냐? 안가믄 안되것냐?"
미향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도 딸인 미향이를 보내더라도 실업계고등학교로 보낼 생각이셨다. 무려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고 졸업식에서는 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학교 대표 한 명에게만 주는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부지, 요즘 실업계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다 취직하는 건 아니라서 미향이는 공부도 곧잘 하니 인문계 고등학교를 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취직이 바로 되는 대학에 가는 게 오히려 빠를 수도 있어요."
다행히 병주시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오빠들의 간곡한 권유로 겨우 졸업 후 취업이 아닌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인문계고등학교에 시험을 볼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숨은 의도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오빠들과 자취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학교 다니는 오빠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게 없는 살림에 막내딸까지 대도시로 고등학교를 올려 보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사정이니 어떻게 부족한 공부를 따라가려고 학원이며 과외를 언감생심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다음 편에 계속
3화. 시골 소녀, 도시로 유학 오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