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임용고시에 떨어지다 #제주도 애월 #한담해변
"이 성적으론 지방의 4년제 대학도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고3 담임 선생님께서 3월 초, 미향의 자취방에 가정방문을 오셨다. 마침 시골에서 올라와 계시던 엄마에게 두툼한 파일철을 이리저리 뒤적이시더니 지난 2년간의 성적과 등급이 적힌 종이를 보고 하신 말씀이셨다.
중학교 때까지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기에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아들 도 아닌 딸을 도시까지 유학 보낸 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다는 각오였고 어쩌면 우리 집안에서 '서울대'에 가는 자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부모님의 막연한 기대와 믿음에서였다. 그런데 지방의 4년제 대학도 들어가지 못할 성적이라니. 유학 와서 공부 잘하고 있는 줄만 알았던 딸이었는데 엄마는 당황하신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님이 가시고 엄마와 둘만 남은 순간,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손 끝만 바라보던 미향을 엄마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꼭 안아주시며 등을 토닥이셨다.
"우리 막내, 오빠들 챙기랴 공부하랴 월매나 힘들었쓰까이?"
한 번도 "공부해라." 말씀하신 적이 없는 엄마였다. 한동안 미향을 안고 쓰다듬으신 후 시골에서 머리에 이고 오신 커다란 보따리를 풀어 미향이 좋아하는 반찬을 이것저것 만드셨다. 그리고는 다시 자취방을 여기저기 쓸고 닦으시며 정리하시더니 쌓아둔 빨래를 손으로 주물러 빨아 빨랫줄에 널고 나서야 할머니 식사 챙겨야 한다며 엉덩이 한 번 방바닥에 붙이지 않으시고 바삐 시골로 내려가셨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시고 몸도 불편하신 엄마였다. 자식 넷을 낳고, 홀시어머니에 많은 시동생들, 큰집 조카들까지 건사하며 가난한 살림살이를 부지런함으로 채우며 살아오셨던 분이었다. 늘 차고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가 가난하다고 느끼지 못하게 키우시며 하루도 쉬지 않고 들에서 일하시고 집에서도 쉴 새 없이 식구들을 챙기셔야 했던 엄마는 늘 지치고 피곤하셨으리라. 하지만 집에서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이랑 한 얘기들을 재잘거리는 나를 한 번도 "저리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미소를 지으며 다 들어주셨다. 엄마가 화를 내거나 짜증 냈던 기억이 내겐 없다. 날마다 꽉 차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늘 안아주시고 잘한다고 격려해주시고 새벽마다 타지에 나간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엄마였다. 난 이런 엄마를 더 이상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초에는 처음 입학했던 성적 때문에 방과 후에 운영하는 심화반에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성적은 떨어지고 300여 명의 학생 중 250등을 한 적도 있고, 2학년 때까지 최고 성적이 전교 150등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 고3 담임 선생님께서 지방의 4년제 대학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씀은 결코 지나친 말씀이 아니었다.
이런 내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극적인 반전이 필요했다. 바로 자신감 회복이었다.
'넌 원래 잘하는 아이야!'
'넌 맘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고3 올라와 첫 시험인 3월 모의고사에서 뭔가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시험 전략을 세워야 했다. 내가 가장 떨어지는 과목은 수학과 영어였는데 운이 좋게도 지난 고2 겨울방학에 학원이나 과외 한 번 해본 적 없던 내게 학원에 다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었다. 같은 반 친구가 시내에서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영어강사의 겨울방학 강좌를 등록했는데 다른 과목 과외와 시간이 맞지 않고 환불도 되지 않아 나에게 수강권을 준 것이었다. 지금이야 학생들이 너무 많은 학원을 다니기 때문에 학원에 다니는 것이 일상이지만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나는 다녀보고 싶었던 학원 수업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이 되었겠는가. 그래서 학원을 오고 가는 버스에서조차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가면서 예습, 오면서 복습을 할 정도로 부족한 영어 실력을 채워갔다.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 교내외 수학 경시대회는 모두 내 차지였을 정도였던 기억을 되살려 방학 동안 수학 문제집 한 권을 풀고 또 풀었다. 하지만 국영수가 그리 호락호락한 과목들이 아니다! 3월 모의고사가 가까워졌을 때 나의 필승 전략은 '암기과목 집중 공략'이었다! 국영수는 단기간에 성적을 올리기 힘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적을 올리기 쉬운 암기 과목을 먼저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국영수는 그다음으로 준비했다.
"우와~ 우리 반에서 이번 모의고사를 엄청 잘 본 친구가 있네! 장미향, 일어나 봐. 얘들아, 손뼉 쳐줘라."
짝짝짝짝!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3월 모의고사의 국영수는 엄청 쉽게 출제되어 점수가 비슷해졌지만 암기과목은 엄청 난이도가 높아서 평소에 공부를 잘했던 애들도 시험 점수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난 암기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덕분에 점수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매우 높았다. 여태껏 최고 잘한 등수가 전교 150등이었는데 이번에 반 3등, 전교 15등으로 수직 상승해버렸다! 선생님도 계속 칭찬해주셨고 우리 반 친구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야, 장만옥. 너 어떻게 공부했어?"
"만옥아, 이따 매점 같이 갈래?"
"나랑 같이 점심 먹자."
이전엔 나를 재미있고 활달하지만 공부는 별로 못하는 애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아이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와 눈빛이 확 달라졌다. '역시 공부는 잘하고 봐야 해.' 중학교 때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서있던 내 자존감은 땅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는데 다시 높이 솟아올랐다. 물론 4월, 5월, 6월, 7월 모의고사에서 다시 성적이 떨어지긴 했지만 한 번 자신감을 되찾고 나니 그 힘든 입시공부를 지치지 않고 해 나갈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8월부터 12월 모의고사까지 5번의 시험 점수 평균으로 대학 입학원서를 썼는데 5번 모두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을 쓰기 위해 선생님과 약속한 점수를 모두 통과해서 1등급만 쓴다는 교대에 입학원서를 낼 수 있었다. 사실 1, 2학년 성적이 워낙 안 좋아서 3학년 때 성적을 합해도 1등급을 받을 수 없었지만 선생님이 내건 조건을 충족시켰기에 불안하지만 원서를 써주신 것이었다.
드디어 학력 고사일! 수능시험이 아닌 학력고사로 대학 입학시험을 본 마지막 학번이었고, 학력고사는 수능과는 달리 폭발적인 암기력으로 단기간에도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학력고사만 잘 보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원한 대학에 가서 시험을 보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로 교육대학교 강의실에서 학력고사를 치렀다. 이 시험은 고등학교 3년 동안 본 모든 시험 중 가장 잘 본 시험이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4화. 교대생으로 산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