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임용고시에 떨어지다 #임용고시 #숭고한 희생 #추모 #제주 탑동
"임용고시 철폐!"
"교육재정 확보!"
"주한 미군 철수!"
힘겹게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되니 모든 것이 귀찮았다. 의욕도 사라져 버렸다. 사는 게 그저 힘들기만 했다. 힘든 유학생활 속에서도 미향을 지탱해주었던 신앙심마저 희미해져 교회도 한동안 가지 않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었어도 삶이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스무 살이 다 되어 사춘기가 온 것이었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려서 자식들을 위해 자신은 돌볼 겨를도 없이 일하시는 부모님께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여느 아이들처럼 반항심에 말썽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저 감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사춘기의 반항은 미향에겐 사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던 모양이었다. 여름 방학에 오빠들이 집을 잠시 떠나는 바람에 나 혼자 남았다. 오빠들이 없어서 자취생활은 더 편해졌지만 혼자 있게 되면서 겉으론 태연한 척 억지로라도 잘 버텨왔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미향은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40여 일이 넘는 날동안 식료품을 사러 잠깐 슈퍼에 가는 것 외에는 캄캄한 자취방에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였다.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내려앉은 듯 마음속은 온통 잿빛이었다.
그렇게 여름 방학을 자취방에서 보낸 후 밝아지지 않은 마음과 상관없이 2학기 개강일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칩거생활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학교 분위기도 1학기와 달리 왠지 어수선했다. 개강하자마자 매일 선배들과 동기들이 시시때때로 학생회관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사회교육과 선배님이 분신을 하셨대! 지금 학생회관 앞이 난리도 아니야!"
"구급차가 와서 병원으로 이송됐어!"
"선배님 어떻게 되셨을까?"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 동기 하나가 숨 가쁘게 뛰어와 전한 소식은 텔레비전에서 뉴스로나 봤던 소식이었다. 강의실을 나가보니 학교 전체가 술렁거리며 사람들은 부산스럽게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향이 교대에 입학했던 해부터 처음으로 기존에 학교 졸업 성적으로 순차적으로 발령이 났던 임용 방법과 달리 '임용고시'라는 임용자격시험이 실시되었고, 그 시험 결과로 교사를 채용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임용고시가 생기고 나면서부터 내신 1등급이 아니면 원서도 써주지 않았던 전국의 교육대학교들의 인기는 수직 하강했고 이런 이유로 합격 커트라인도 낮아져 성적이 낮았던 학생들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임용고시로 인해 졸업 후 100% 발령이라는 최대의 장점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으로 교육대에 지원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생과 별 다를 바 없는 힘든 교직과정을 성실하게 이수하고 있던 교대생들은 물론 앞으로의 경쟁원리에 좌지우지될 교육현장, 이로 인해 결국은 학생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될 거라는 애끓는 마음들은 이를 바로잡으려는 행동에 옮겨졌다. 별다른 대책이나 준비 없이 파행적으로 도입되고 졸속으로 시행된 임용고시를 철폐하고, 대신 교육재정을 5% 이상 확보하여 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라는 집회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주한 미군 주둔 비용을 위한 예산은 늘리면서 학생과 교사를 위한 교육재정은 오히려 삭감하는 재정 정책을 정부가 추진했기 때문에 '주한 미군 철수'까지 집회의 구호가 되었다.
이런 집회가 계속되는 중에 4학년 선배님께서 1993년 9월, 미향이 열심히 피아노를 치며 애국가를 부르던 음악관 뒤편에서 임용고시 철폐, 주한 미군 철수와 기만적인 당시 정권을 반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선배님을 곧바로 병원에 옮겼지만 안타깝게도 분신하신 다음날 운명하셨다. 그리고 두 달 뒤 1993년 11월, 앞서 가신 선배님과 같은 과였던 3학년 선배님께서 또다시 분신하셨고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운명하셨다. 두 분 선배님의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임용고시는 끝내 철폐되지 않았다. 연이은 선배님들의 비보를 전해 들은 미향은 어안이 벙벙하고 어떻게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여덟 살 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장래 희망을 말하라고 할 때 아는 직업을 떠올려 보았다. 태어난 후 7년을 살면서 본 직업이라고는 고작 농부인 부모님과 아플 때 만났던 의사, 경찰, 미용사, 문구점 아저씨, 슈퍼 아줌마 그리고 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만난 선생님 정도였을 것이다. 아는 게 몇 개 되지 않는 장래 희망에 그래도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선생님'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가장 되고 싶은 것은 바로 선생님! 그 막강한 힘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향은 1학년에 입학해서 장래 희망이 '선생님'이 된 까닭이 지금도 분명히 기억난다. 여덟 살 나이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세 가지! 첫 번째 이유는 선생님들은 맛있는 걸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우린 기껏해야 엄마가 싸준 도시락만 학교에서 먹지만 선생님들은 쉬는 시간에 모여서 이런저런 간식도 많이 드시고 수업 끝나고 전체 선생님들께서 체육활동이라고 하는 날이면 차려놓은 음식이 임금님 수라상 같았다.(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기가 빨리고 힘이 드는지 왜 그리 간식을 드셨는지 내가 선생님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선생님은 숙제를 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말로만 "오늘 국어책 12쪽 10번 써 오세요."라고 하면 되고 어떤 숙제든 학생들은 해야만 했다. 직접 할 필요 없이 말로만 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선생님은 내준 숙제를 하나하나 검사하고 피드백하고 결과 정리한 것을 성적에도 반영해야 하는 매우 많은 일은 하신다는 걸 몰랐다!) 세 번째 이유는 선생님은 시험문제의 정답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1학년 어린 나이에도 시험은 틀릴까 봐 조마조마하고 답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손발이 떨리고 머리가 하얘진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불안할 필요도 없고 시험 자체를 보지 않고 내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실제로는 선생님도 방학마다 연수 시험에, 자격시험에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일 년에도 수많은 시험을 봐야 한다.) 그렇게 여덟 살에 나는 확실한 세 가지 이유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계속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는 그저 학교에서 공부하라는 대로 따라가며 고3까지 흘러갔던 것 같다.
미래가 달린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고3이 시작되는 3월에 '목표를 정하고 공부하자!'라는 생각으로 어느 대학을 갈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았다. 먼저 우선순위를 정했다. 1순위는 졸업 후에 바로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빠의 가이드라인은 확고했다. 아빠의 재정 지원은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이었다. 그것은 오빠들도 마찬가지였다. 졸업 후의 생활은 스스로 알아서 해나가야 했다. 결혼까지도!(결혼할 때 아빠한테 받은 돈은 신혼여행 경비에 보태라고 주신 100만 원이 전부였다!) 따라서 대학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졸업 후에 바로 취업을 할 수 있느냐 였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자격증을 가진 전문직이 될 수 있는 대학과 전공이어야만 했다. 뒤에 '사'자가 붙은 전문직들로는 의사, 한의사, 간호사, 검사, 변호사, 약사, 교사, 형사, 그리고 자격증을 가진 엔지니어 등이 있을 것이다. 2순위는 전문직 중에서 미향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어야 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의학계열로는 갈 수 없었다. 3순위는 성적으로 갈 수 있는 전문직 중 긍정적이고 밝은 근무환경이었다. 늘 범인이나 환자를 보는 전문직은 나에게 맞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약사나 교사, 엔지니어 같은 진로가 3순위까지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고, 4순위로는 긍정적이면서 늘 새로운 일! 큰 공장의 엔지니어처럼 똑같은 나사를 하루 종일 돌린다거나 한 자리에 서서 진열된 똑같은 약을 건네주는 일은 오래 하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순위를 정해서 범위를 좁혀가 보니 '교사'가 당첨되었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아이들은 늘 새로울 테니까! 선생님도 초중고가 다 다른데 어떤 학교의 선생님이 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어린아이일수록 더 순수하고 긍정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지금까지도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적성에 딱 맞고 아침마다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 되었다! 열여덟 어린 나이의 현명한 선택을 했던 어린 미향이 지금도 대견하다!) 그때까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기 위해 가는 대학교가 교육대학교인 줄도 몰랐었다.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입시공부를 해서 결국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교육대학교에 들어 왔다.
이렇게 나름의 생각으로 선생님이 되기 위해 교대에 왔지만 자신의 미래만 생각했지 교육계 전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환경 정상화를 위해, 학생들을 위해, 후배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던지는 선배님들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앙심이 아무리 희미해져서 교회도 잘 안 다니고 있는 상태라고는 하지만 여섯 살 때부터 가졌던 가치관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신념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꼭 소중한 생명을 버려야만 했나?, 남은 가족이나 친구들의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목숨을 바친다고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까?' 같은 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선배님들의 숭고한 희생에도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지 못했다. 더욱이 자신의 마음 상태가 잿빛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어서 이해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코가 석자였다! 선생님이 되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선배님들의 희생이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며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숭고한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선생님으로서 그분들 몫까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경동 열사(1969-1993)가 남긴 글]
우리는 교육계에서 개혁을 해야 합니다. 썩은 것을 도려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며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도 물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 힘들지만 하나로 단결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갑시다.
풍향골에서 먼저 일어나 전국의 교대가 일어나고 전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저의 행동이 기폭제가 되어서 완강한 싸움을 통해서 우리의 교대와 교육을 살려냅시다. 그리고 승리하면 풍향골 곳곳에 민들레 씨를 뿌려 주십시오. 언제나 여러분들과 함께 교육을 위하여 힘을 쓰겠습니다. 민족자주 교육과 통일교육, 인간교육이 실현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살아갑시다.
미국 없이 더 잘 산다. 주한미군 몰아내고 우리 교육 살려내자!!!
고통분담 허울 속에 교육비 삭감 웬 말이냐 교육재정 5% 확보하자!!!
주둔비는 증액되고 교육비 삭감 속에 나라꼴이 엉망이다. 교육환경 개선하자!!!
임용고시 철폐하고 초등교육 정상화하자!!!
예비교사 선봉 투쟁, 4천만의 단결투쟁 우리 교육 살려내자!!!
임용고시 철폐하고 민주적 임용고시 쟁취하자!!!
예비교사 단결투쟁 우리 교육 살려내자!!!
-참 교육 염원 49년 9월 7일 경동이가-
[한상용 열사(1970-1993)가 남긴 글]
1만 6천 교대 학우들에게
조금은 무겁게 펜을 듭니다.
참 교육! 저희 1만 6천 학우들의 삶입니다.
여러 학우들, 어느 때 찾아가더라도 따뜻하게 반겨주었고 웃음 지며 서로 헤어지고 다음에 또 만나기를 기대했습니다. 우리들 혼자의 힘은 미약하나 모두가 하나 되면 그 힘은 방대합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 원하는 게 있다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합시다. 하나 된 목소리로 큰 힘으로 힘차게 투쟁합시다. 나약하고 안일한 우리들의 모습을 떨쳐버리기 위해 투쟁하고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허울을 벗어버리기 위해 투쟁하고 우리의 꿈을 펼치기 위해 투쟁하고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투쟁합시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언젠가는 승리의 목소리로 화답할 것입니다.
첫 단추 끼우는 게 중요합니다. 처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면 국민들에겐 힘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가 나가는 길이 지역적 수준의 차가 아니라면 11개 교대가 똘똘 뭉쳐 하나의 모습으로 투쟁합시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고하지 않고 대가를 바란다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서로 믿습니다. 저는 이제 1만 6천 교육동지들과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항상 쉬지 않고 고민하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발걸음을 옮길 때는 힘 있는 모습으로 열의에 찬 삶을 설계합시다.
우리의 자존심을 건 싸움입니다.
꿈이 있는 교사로 떳떳한 교사로 이제 여러분의 가슴속에 함께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을 믿습니다.
11월 10일 한상용 올림
출처: https://m.blog.daum.net/1917sr/516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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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임용고시에 떨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