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임용고시에 떨어지다 #제주 애월 해안도로 #노을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장미향입니다!"
임용고시에 떨어진 후 들어간 회사는 과학 실험 수업을 하는 사교육 업체로 자체적으로 개발한 교육 콘텐츠와 수업안으로 초등학교의 방과 후 수업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서울에 본사를 두고 전국적으로 지사가 있는 꽤 규모가 컸던 이 회사는 교원자격증이 있는 강사들을 각 지사별로 모집하여 회사의 교육 콘텐츠와 수업안을 교육시킨 후 조직적으로 학교 현장에 투입시켰다. 지원한 강사들은 사범대학을 나와 중등 교원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교대 졸업생은 몇 명 없었다. 특히 미향이 들어간 지역 지사엔 초등 교원 자격증을 가진 강사는 미향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용인원이 매우 적어 임용률이 낮은 사범대 졸업생들에 비해 교대 졸업생들은 원하는 지역에 경쟁률이 높으면 임용인원이 많은 수도권이나 선생님이 늘 부족한 도서벽지 지역으로 지원하면 됐고 나머지 졸업생들은 다음 해 임용고시를 준비하였기 때문에 교대를 졸업하고 바로 사교육 기관에 취직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함께 임용 시험에 떨어졌던 친구들은 다 시원한 도서관에서 교육학, 교육행정, 교육과정 등 임용고시 시험교재에 여러 가지 색의 형광펜과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다.
“올해 방과 후 수업이 개설된 학교는 12개교입니다. 선생님들께서는 학교 배정표를 보시고 수업 일정에 맞춰 배정된 학교로 가셔서 수업해 주시면 됩니다. 수업에 필요한 실험 도구들을 빠짐없이 체크하셔서 가져가십시오."
미향에게 배정된 학교는 제법 학급수가 많았고 개설된 강좌도 주 3회 두 타임씩 진행되었다. 개설된 방과 후 수업은 과학탐구실험 중심의 수업으로 과학교육학과를 나온 미향에게는 익숙한 수업이었다. 교대를 다니면서 모의 수업이며 교생 실습을 통해 수없이 시연했던 초등학생 대상 수업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다른 강사들보다 훨씬 능숙하면서도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며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향의 수업은 학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점차 수강생도 늘고 인기 있는 방과 후 수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서울 본사에서 진행하는 5월 5일 어린이날 한강공원 과학축제 이벤트는 장미향 선생님께서 우리 지사 대표로 참석하게 되셨습니다."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 본사를 오가며 이벤트 관련 아이디어 회의와 행사를 준비했다. 드디어 어린이날! 어린이날 주인공으로서 이 날을 특별하게 보내게 하고픈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수많은 어린이들이 한강공원에 가득 모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여러 교육 관련 업체들 중 그들의 관심과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곳은 바로 미향의 회사였다. 거품 화산 폭발, 풍선로켓 날리기, 호버크래프트 만들기, 태양광 자동차 경주대회 등 재미있고 신기한 과학 실험에 참여하기 위해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몰려들었다. 한 달여 동안 입사 후 처음으로 기획하고 준비한 본사 차원의 대형 이벤트는 그렇게 성황리에 끝났다.
“다른 도시에서 열릴 교육 콘텐츠 박람회에 우리 회사도 부스 운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지사에서는 장미향 선생님께서 다른 지사 대표들과 함께 참여해주세요. 그리고 회사 홍보 영상 촬영을 위한 시범 수업까지 차질 없이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초등학생이 주요 고객인 회사 특성상 유일한 초등 교육전공이었던 미향은 회사에서 기획하는 큼직큼직한 행사나 이벤트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또한 미향의 방과 후 수업이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홍보 프로그램에 지사 대표로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회사 홍보를 위한 광고 영상 제작에 대표로 시범 수업까지 하게 되었다. 미향은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은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인지도를 높이며 점차 입지를 다져갔다.
“세나 어머님, 오늘 세나가 실험 계획도 잘 세우고 어려운 실험인데 실험도 성공했어요. 칭찬 많이 해주세요."
“민식이 어머님, 민식이가 오늘 방과 후 수업에 조금 늦어서 첫 번째 실험을 못했는데 집에서 못한 실험 해볼 수 있게 실험재료 가방에 넣었으니까 집에서 같이 해보세요."
“기원아, 오늘 머리스타일 바꿨네? 더 멋져 보인다."
“수민아, 실험이 잘 안 돼서 속상하지? 선생님이랑 다시 한번 천천히 해보자. 넌 잘 해낼 수 있어."
의무교육으로 누구나 받아야 하는 공교육이 아닌 선택을 받아야만 가능한 사교육에서 학생과 학부모 한 명 한 명은 소중한 ‘고객님'이었다. 미향의 회사는 기본 급여에 학생수에 따라 수당이 지급되는 급여 시스템이어서 매달 등록한 학생수에 따라 월급이 달라졌다. 물론 미향의 강좌에는 학생들이 한 번 수강하면 계속해서 듣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규 수강 등록과 재수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매 수업 시간마다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관찰하여 학생과 학부모에게 곧바로 피드백해주어야 했다. ‘고객님'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소위 ‘고객 만족 서비스'는 학생 관리의 필수 요소였다. 매달 수강생 등록현황을 가슴 졸이며 살피고 지난달에 비해 학생수가 늘면 안도하지만 한 명이라도 줄어들라치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달 수강생 유치를 위해 더 적극적인 '고객 만족 서비스'와 홍보 활동에 더욱 힘을 쏟아야 했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수업을 잘할까?'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학생을 등록시킬까?'로 바뀌게 되었고 그에 대한 스트레스가 점차 심해져 갔다. 어디서든 '고객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수업을 열심히 준비해서 잘하더라도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매달 몇 명이 등록했는지 이번 달 급여는 얼마인지 불안정한 상태로는 맘 편히 일할 수 없어.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고 여기에서 내가 갈고닦은 '고객 만족 서비스'와 한 명 한 명을 '고객님'으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대로 학생과 학부모를 대한다면 분명 공교육인 학교에서도 난 성공할거야!'
임용고시가 겨우 두 달여 밖에 남지 않은 9월의 첫날, 미향은 회사를 나와 교대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가는 길에 지나친 전자제품 대리점 대형 TV에서는 회사 대표 강사로 광고와 홍보를 위해 촬영했던 미향의 수업 영상을 담은 회사 광고가 잠깐 나왔다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9화. 213번째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