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임용고시에 떨어지다 #제주도 성산일출봉 #흐린 날 일출 #야경
“미향아, 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너 다른 지역으로 기간제 교사라도 간 줄 알았다야.”
"여태 어디서 뭐하면서 산거야?”
"너 임용고시 준비는 하고 있었던 거야? 다른 애들은 유명 임용고시 학원에서 교육학이랑 시험과목 듣고 있다는데 넌 얼마나 공부했어?”
지난번 임용고시에 떨어진 동기들과 선배들이 워낙 많았기에 교대 도서관에서 아는 얼굴들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도서관에는 임용고시를 처음 치르는 올해 졸업생들과 지난번 임용고시에서 고배를 마셨던 재수생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지정 자리를 정해 자신의 수험서를 빽빽하게 꽂아두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시험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책상에는 임용고시 과목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교육과정 해설서’가 꽂혀 있거나 울긋불긋 가을 풍경화처럼 다양한 색깔로 덧칠해진 채 펼쳐져 있었다. 미향은 몇 자리 남지 않은 비어있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얼마 만에 앉아보는 도서관 의자인가? 작년까지만 해도 매일매일 앉아서 수험서를 펼쳤던 익숙한 동작은 몇 개월이 훌쩍 지난 지금은 매우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지난번 임용고시 준비하면서 공부했던 교재들은 이리저리 이사하면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기 때문에 미향은 어쩔 수 없이 교재를 새것으로 모두 준비해야 했다.
새로 구입한 교재 중 가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교육과정 해설서’를 펼쳤다. 옆자리에 펼쳐진 칼라사진 같은 화려한 교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이게 같은 교재인가?’ 할 정도로 미향의 책은 황량한 겨울 들판을 찍은 흑백사진처럼 흰색 여백에 검정 글씨만 덩그러니 있었다. 미향은 화려한 교재의 주인공인 옆자리의 같은 과 동기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임용고시가 코 앞인데 이제야 새 책을 들고 처음 자리에 앉은 자신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미향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손을 올려 책을 가려 버렸다.
한동안 보지 않았던 수험서들은 그리 쉽게 미향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신대륙을 발견해 첫 발을 내디뎠을 콜럼버스만큼 아주 낯설지는 않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상기시키지 않았던 내용들은 미향의 머릿속에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미향은 임용고시에서 가산점이 있는 영어 공인시험 점수도 컴퓨터 자격증도 없는 데다 졸업성적도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가장 배점이 큰 시험 자체를 잘 봐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도 이겨내야 했다. 미향은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때론 여태껏 쉬지 않고 1년 동안 공부해온 동기나 선배들에게 밥과 술을 사 먹이며 시험족보를 얻기도 하고 운이 좋게 유명 임용고시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 중 나눔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픈 이의 핵심정리 인쇄물을 얻기도 했다. 미향은 이런저런 자료들과 공부했던 내용들을 비교하며 점차 낯설었던 것들을 익숙하고 친근한 것들로 바꾸기 시작했다.
드디어 11월, 각 지역별로 올해 임용 대상자 모집인원 공고가 교대 학생회관과 도서관의 게시판에 붙었다. 미향은 작년에 응시했던 도시의 모집인원이 몇 명인지 찾아보았다. 모집인원을 보는 순간, 미향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230명'
몇 년 동안 적게는 20명부터 많아봤자 60명밖에 뽑지 않았었는데 230명이라니! 미향은 예년과 같은 적은 인원이라면 올해도 가망이 없을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했었다. 하지만 이제 미향에게도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그 희망의 불씨는 엉뚱한 곳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많은 신규교사를 전국적으로 뽑아야만 하는 엄청난 변화는 미향과 같은 수험생들에겐 희망찬 기쁜 소식이었지만 경력이 오래되어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원로 선생님들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순식간에 교육현장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바로 '교원 정년 단축'이라는 교육공무원법의 개정이었다!
미향이 졸업한 그 해 1997년 11월 22일, 우리나라의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 하에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날이 바로 소위 말하는 "국가부도의 날"이었다. 외환위기를 맞은 우리나라는 수많은 기업의 부도와 대량 실직 사태가 벌어지며 나라 전체가 흔들렸다. 교육계도 이 외환위기라는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원로교사 1명 퇴임하면 신규교사 2.5명 채용'이라는 경제 논리를 앞세운 정부는 60세로 정년을 낮추는 공무원법 개정을 추진하였으나 교육계의 반발로 62세까지로만 정년을 낮추게 되었다. 1998년에 62세로 정년을 낮춘다는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63, 64, 65세가 되는 전국의 현직 선생님들은 모두 정년 퇴임을 해야만 했다. 작년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선생님들의 갑작스러운 퇴임이었다. '230명'이라는 숫자는 그 빈자리를 메워줄 신규교사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해진 교육현장의 상황 때문에 예년에 비해 전국적으로 임용인원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겐 절망이 누군가에겐 희망이 되기도 한다!
임용고시를 무사히 마치고 오랜만에 편안해진 마음으로 시골에 내려와 있던 미향은 등기우편 한 통을 받았다.
'초등교원임용 선발시험 최종 합격'
첫 줄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그 순간 함께 빨래를 개던 엄마와 두 손을 맞잡고 부둥켜안았다.
'내년에도 이렇게 계속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있으면 어쩌지? 이런 불안정한 상황이 내 인생에서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공부하다가도 문득문득 미향을 헤집어놓던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황량한 사막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한 듯 좌불안석이 되어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순간들, 아버지의 불호령, 엄마의 애잔한 눈빛, 힘들게 홀로 버텨왔던 시간들이 '합격'이라는 글씨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합격통지서 맨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숫자도 있었다.
'213/230'
230명 중에 213등으로 합격했다는 의미의 숫자조합이었다.
"엄마, 얼른 감사 기도드리자! 1등으로 합격한 것보다 213등으로 합격한 것이 더 감사할 일이네! 하마터면 또 떨어질 뻔했잖아!"
미향은 그렇게 213번째 선생님이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10화. 장미향 찾기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