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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WATNEUNGA Jul 15. 202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 이야기 12]#김초엽 #진짜 이별 #제주도 서귀포

  "예전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김초엽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아버지 장례식에 모인 스물두 명의 우리 가족 중 돌아가신 아버지와 진짜 이별이라고 생각하여 통곡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이 흘렸던 눈물은 그저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고, 사랑한다는 말도 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고 슬퍼서였다. 우린 모두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먼저 떠나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삶의 터전을 옮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같은 우주 어딘가에, 아니면 다른 우주 어딘가에라도 꼭 있을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금 살고 계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두 분이 계신 곳으로 가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모두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례식은 영원한 이별, 진짜 이별이 아닌 잠깐의 헤어짐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같은 장례식장의 다른 실에서는 고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애통해하는 가족들의 흐느낌이 계속 들려왔고 유족들의 얼굴 표정은 모두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것처럼 침울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지인들이 장례식장에 찾아와 애도를 표하며 고인에 대한 슬픔을 나눌 때를 제외하고 우리 가족만 남아있을 때에는 대체로 울거나 슬픈 표정으로 있지 않았다. 우리 오 남매는 모두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다 보니 잘 만나지 못하다가 이렇게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며칠 동안 함께 지낼 수 있어서 반가워했고, 그동안 못다 한 사는 얘기를 나누느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가끔 장례식장 음식 대신 피자와 치킨을 주문해서 함께 맛있게 나눠먹었고 아침엔 스타벅스커피를 포장해와서 다 같이 나눠마시며 웃었다. 만약 누군가 우리 가족의 모습을 지켜봤다면 장례식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밝은 표정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낯설고 의아해했으리라. 화장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슬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불태워지는 아버지의 육체는 이미 ‘아버지’가 아니었고, 우리가 그리워하는 아버지는 정확히 말해 아버지의 영혼은 저 육체를 이미 떠나 ‘천국’에 가셨고 먼저 천국에 가 계신 어머니와의 재회로 기뻐하고 계시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을 이겨내며 무사히 장례식을 치룰 수 있었다.

   김초엽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안나’ 할머니를 보면서 아버지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지구의 시간과 같은 속도로 간다면 수만 년 거리에 떨어진 우주의 다른 행성으로 먼저 옮겨가 살고 있는 남편과 아들을 생각하며 우리 가족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일까? 영원한 이별인 줄 알면서도 애써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절망적인 희망을 품고서라도 자신이 살아갈 이유를 힘겹게 붙잡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같은 우주라서 진짜 이별이 아니라고,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안나 할머니를 위로하던 사람들은 진짜 그렇게 믿어서 하는 말이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얀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여기 남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라도 말해주어야 할 것 같아 억지로 내뱉은 위로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남겨진 사람에게 숨 쉬며 살아갈 아주 실낱같이 작은 무언가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리라. 안나 할머니의 남편과 아들도,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지만, ‘진짜 이별’이라고 인정해버리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남은 우리에겐 너무나 가혹하고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슬픔이 너무 커져서 우릴 송두리째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의 힘이든 종교의 힘이든 뭐든지 동원해서 ‘진짜 이별’을 미룰 수만 있다면, 언젠간 함께 할 수 있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희망’이라도 붙잡고서 남은 생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말이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믿는 대로 되리라는 희망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니까. 삶은 ‘팩트 체크’만이 정답은 아니다!

  지금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대여, 당신의 남은 시간은 찬란한 빛만 가득할 것이다! 무슨 말이든지 당신이 살아갈 힘이 된다면, 아픔과 슬픔을 치료할 약이 된다면, 도전할 용기가 된다면 그대로 믿고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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