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후기(3)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셰익스피어적 드라마

by 엘피

셰익스피어적 드라마


이 영화의 후기를 쓰면서 "셰익스피어적 드라마"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셰익스피어적(shakespearean)이라는 표현은 그저 여기저기에서 읽은 것을 본따서 느낌적인 느낌으로 가져다 쓴 것일 뿐이다(자연스러운 언어 습득 과정^^). 셰익스피어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이 참에 정확히 알아보려고 챗선생에게 물어보았다.



What do you mean when you say a story or a character is 'Shakespearean'?


Here are some characteristics commonly associated with a "Shakespearean" story or character

Complex Characters: Shakespeare's characters often possess multifaceted personalities and exhibit a range of conflicting emotions and motivations. They might experience love, jealousy, ambition, and despair all within a single play.

Universal Themes: Shakespeare's works delve into universal themes such as love, power, betrayal, jealousy, fate, and the human condition. These themes continue to resonate with audiences across cultures and generations.

Moral Ambiguity: Shakespeare's characters frequently grapple with ethical dilemmas, and the line between good and evil is often blurred. This moral complexity adds depth to the characters and their choices.

Tragic Flaws: Many of Shakespeare's protagonists possess tragic flaws or make fatal errors in judgment that lead to their downfall. These flaws contribute to the sense of inevitability in the tragedies.

Love and Romance: Love is a central theme in Shakespeare's works, and his characters often experience intense and often complicated romantic relationships.

Wit and Wordplay: Shakespeare's writing is known for its clever wordplay, puns, metaphors, and soliloquies that reveal characters' inner thoughts and conflicts.

Fate and Destiny: Shakespeare often explores the idea of fate and destiny, questioning whether characters have control over their lives or are subject to larger forces.

Intrigue and Deception: Plots in Shakespearean plays frequently involve intricate webs of deception, mistaken identity, and hidden motives.

Dramatic Irony: Shakespeare makes use of dramatic irony, where the audience knows something that the characters do not, creating tension and anticipation.

Mix of Comedy and Tragedy: Shakespeare's works often blend elements of both comedy and tragedy, creating a rich and diverse emotional experience.

Overall, when people refer to something as "Shakespearean," they are likely pointing to its depth of characterization, exploration of complex themes, emotional intensity, and the enduring relevance of its storytelling elements.


그러니까....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복잡한 인물들,
사랑, 배신, 질투, 운명, 인간 조건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
선악을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도덕적 모호성,
자신의 추락을 가져오는 비극적인 결함,
사랑과 로맨스,
재치있는 언어 유희,
속임수와 오해, 숨겨진 동기,
극적인 아이러니,
비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의 혼재



등을 특징으로 한다는 뜻이다.

챗선생의 정의를 듣고 보니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이야기는 더욱 더 Shakespearean하게 느껴진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물과 기름처럼 다른 정치 성향, 다른 성격,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의 삶과 성격을 조금 더 분석해보자.


나이브한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순수과학을 일생의 업으로 선택한 오펜하이머가 정치적으로 좌파, 고졸 학력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에 월스트릿과 군대에서 경력을 추구한 스트로스가 정치적 우파인 것은 사실 너무나 전형적(typical)이다.


오펜하이머(이하 오피)는 버클리 교수가 될 무렵까지도 사회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신문에서도 정치와 경제란은 아예 읽지 않는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에게 공공연히 이야기할 정도면, 그냥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피하는 편이라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내가 딱 이런 성향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오피를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잔인함에 맞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다정한 소년" 그대로 어른이 된 것이다. 그는 그저 세상의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추한 측면을 되도록 외면하고 무시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물리학에서 피안을 찾고, 한없이 평화롭고 자비로운 인도 철학에서 삶의 자세를 찾았다(평생을 아힘사(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겠다는 자이나교나 불교의 원리)를 추구했던 그가 전대미문의 살상무기 개발의 주인공이 된 것은 정말이지 셰익스피어적(Shakespearean) 아이러니이다!).


그가 처음으로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동족인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학살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되고서였다. 자연스럽게 나치와 파시즘에 증오감을 가졌으리라. 또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원자폭탄> 책에 따르면, 소아마비에 유난히 가난했던 제자 한 사람을 취직시켜주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실패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영화에서 오피의 제자 중 공산당에 깊이 개입한 사람이 나오는데 이는 다른 인물인듯 하다.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일단 이름도 다르다.)


당시 지식인들이 좌파 정도가 아니라 공산당에 적극 가입해서 활동한 것은 또 그 시대의 기준과 그 시대의 렌즈로 바라봐야할 것이다. 1920년대의 Jazz Age라고 하는 호황과 향락의 시기를 거쳐 1930년대 대공황의 고통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불거지고, 대중들의 고통이 극심해지면서 당연히 대안적 체제인 공산주의에 관심과 호감이 커져갔을 것이다.


더구나 오피는 캠프에서의 따돌림과 집단 폭력, 영국 캐번디시에서의 독극물 사건에서 보듯 청년 시절까지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섬세하고 예민한 천재였던 그는 사람들과 두루두루 원만하게 사귀는데 서툴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그런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영화 속 공산주의자였던 버클리의 불문과 교수 슈발리에와 같은 인물들에게 매력과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오피의 아내 키티가 아이를 낳아놓고 돌보지 않자 아예 슈발리에 부부에게 맡겨서 키우는데....좌파 사람들의 "위아더월드" 성향의 티피컬한 모습이다.


좌파 성향 사람들은 인간성과 세상을 이상주의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삶의 여러 요소 중 '미학적 동기'가 가장 중요한 예술가나 순수과학자들 가운데에 좌파가 유난히 많은 듯 하다. 다만 그들이 볼셰비키 혁명이 나치의 파시즘 만큼이나 잔악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독제 체제가 자본주의의 모순보다 더 큰 모순 덩어리라는 사실을 외면한 것은 책임져야 할 지적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스트로스는 여러모로 반대쪽 극단에 있다. 대개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일으킨 자수성가형 부자들은 강한 우파적 신념을 갖게 된다. 그들은 부잣집 도련님과 달리 "부"를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기 손으로 힘들게 쟁취한 것인 만큼 부에 가치를 부여하고, 부를 창조하는 것을 죄악시 하지 않고 판을 깔아주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더구나 스트로스는 20대 초에 나중에 공화당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허버트 후버 밑에서 사회 경력을 쌓았으니 그는 자연스럽게 뼛속부터 우파(공화당)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경향은 그의 타고난 성향과도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는 비록 오피만큼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타고난 정체성을 모두 소중히 여겼던 것 같다. 유대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유대인 단체와 유대교 교회에서 활동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부모님 이름으로 암연구 기금을 만든 것을 보면 효자였던 것 같다. 그는 버지니아 출신인데 그의 이름(성)을 남부식으로 "스트로스"로 불러달라고 했다고 한다(독일계 유대인 성인 Strauss는 미국에서도 슈트라우스, 아니면 적어도 스트라우스라고 발음하는 게 보통인 듯). 남부인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소중히 여긴 듯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구호활동을 펼치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후방에서 해군으로 복무했는데, 전후에도 계속 해군 제독으로 불리길 바랐다. 군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못 잃어~ ㅎㅎㅎ 군대와 같이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직을 좋아하는 것 역시 전형적으로 보수적인 인물의 특징이다.


아무튼, 좌파 성향의 오피와 같은 사람이든, 우파 성향의 스트로스와 같은 사람이든, 1940년대 초에는 모두 나치의 세계 정복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힘을 합쳐 싸웠다. 물과 기름이 합쳐져 마요네즈가 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각자의 싸움


히틀러와 나치가 왜 그토록 유대인을 증오했는지, 또 증오한다고 해서 그렇게 가스실에서 민간인을 학살할 생각을 어떻게 집단적으로 했는지, 나도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아 정말 모르겠다(이 참에 역사를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들이 유대인에게 그토록 못할 짓을 한 결과,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탈출해서 그곳에서 똘똘 뭉쳐서 만든 것이 원자폭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프로젝트에 비유대계 과학자들도 많이 있었고, 미국이라는 국가의 어마어마한 자금과 산업 시스템이 그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했지만, 처음부터 원자폭탄을 만들도록 부추기고(레오 질라드, 아인슈타인 등등), 과학적 원리를 실증하고(유대인 아내 때문에 조국을 떠난 엔리코 페르미), 폭탄 설계 프로젝트를 지휘한 사람(오펜하이머) 등 중요한 인물들의 상당수가 유대인과 관련되어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모든 이들의 가슴속의 내적 동기가 한 방향으로 줄을 섰던(align) 순수하고 멋진 순간이었다. 유대인의 나치에 대한 복수심이든,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미국인, 영국인들의 애국심이든 다 한 방향으로 결이 맞아 파동이 증폭되었다. 노르웨이 레지스탕스들은 하이젠베르크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 중수 공장을 폭파시켰고, 벨기에 사람들은 콩고 광산의 우라늄을 나치 몰래 미국으로 빼돌렸다. 모두가 힘을 합쳤다!


싸움의 동기는 복수심이다. 이것 역시 지극히 셰익스피어적이다.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에 복수심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평화주의적인 그의 마음에서 복수심과 전투 의지는 휘발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소련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이고, 공산당에 대해서는 오히려 막연한 호감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텔러와 같은 사람은 다르다. 그는 헝가리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직접 겪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나치와 마찬가지로 깊은 혐오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에서 오피를 심문했던 군인도 부모님인지 조부모님이 러시아 정교회 사제였는데 볼셰비키 혁명 때 희생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똘똘 뭉쳐서 나라를 위해 힘을 합쳤던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나치에 대해, 공산주의에 대해 개인적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셈이다. 2차 대전이라는 눈앞에 직면한 싸움이 끝나자,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공통의 동기도 사라졌고, 각자의 입장과 성향에 따라 남거나 떠나거나 반대하거나···뿔뿔이 흩어진 듯.


이카로스의 추락


왼쪽 날개로 날아올랐듯, 오른쪽 날개로 날아올랐든, 두 사람은 모두 너무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인생의 정점에서 극적으로 수직낙하했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주의를 무시하고 태양 가까이 날아올라갔다가 날개의 밀랍이 녹아서 에게해로 추락해 버린 이카로스처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시 구절처럼 높이 올라간 것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네 인간 조건 자체가 하늘로 던져 올린 공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결국은 떨어지지 않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상에서 고작 몇 미터... 작고 소박한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내려오지만, 오펜하이머나 스트로스는 범상함(mediocrity)의 대류권을 뚫고 비범함의 성층권까지 날아올라 역사에 박제된 인물들이다.


대기권을 뚫고 올라간 위대한(적어도 유명한) 인물들 중에서도 육신은 인간조건의 쇠락을 면치 못하지만, 그 명예만큼은 평생, 아니 사후에도 계속 인공위성처럼 떨어지지 않고 지구 주위를 도는 인물들도 많다. 가십이나 조롱거리가 아니라 오롯이 업적과 원만한 인품으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그런데 왜 오피와 스트로스는 살아생전에, 가장 높은 곳에서 이카루스처럼 고통스럽게 수직낙하했을까?


비극적 결함, 아이러니, 속임수, 오해, 숨겨진 동기···


바로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셰익스피어적"인 인물이나 스토리의 요소들이다(said ChatGPT).


오피나 스트로스 모두 성격적으로 결함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수많은 장점과 매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 성격의 모난 부분이 걸림돌이 되어 스스로를 넘어뜨렸다.


날카로운 혀로 자기보다 덜 똑똑한 사람들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버릇을 가졌던 오피.


그는 의지가 굳고 추진력 강한 한 인물의 자존심을 짓밟아서 결국 자신에 대한 복수를 그의 목적으로 만들었다.


나이 들수록 점점 고집 세고 괴팍하고 오만해졌던 스트로스.


젊은 시절 허버트 후버에게 발탁되고, 대학도 나오지 않은 젊은이가 당대 최고의 IB에 입사하고, 파트너의 사위가 되고, 미국 몇 대 대통령에 걸쳐 신임받았던 그는 분명 사회적 스킬이 최최최상급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지도적 위치에 올랐을 때는 완고하고 독선적인 비호감 꼰대가 되어버렸다. 영화에서는 데이비드 힐의 증언이 그를 상무부 장관 청문회에서 낙오시킨 결정적 순간처럼 그렸지만, 청문회 이전부터 그는 민주당이 장악한 상원뿐만 아니라 국민 여론에서도 신망을 잃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을 상원에서 낙마시킨 사례는 당시 굉장히 예외적이고 큰 사건이었다고...


두 사람의 성격적 결함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 자체도 매우 드라마틱한 요소이다. 성공한 인물들이 필연적으로 걸어가는 오만의 길..... 놀란 감독은 여기에 오해(아인슈타인과의 대화)와 복수에 대한 복수(데이비드 힐)라는 요소를 넣어서 정말이지 셰익스피어적인(Shakespearean) 작품을 만들어냈다.


과학자와 정치가


오피와 스트로스의 개인적 대결, 그들의 셰익스피어적 추락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았지만, 한편으로 과학과 사회, 과학자와 정치가(정부) 사이의 협력과 배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피의 청문회와 몰락이 과학자들 사이에 전반적으로 큰 충격과 반감을 주었던 것은 단순히 오펜하이머라는 인물 하나가 아니라 로스 알라모스, 시카고 대학과 버클리 대학 등에서 모든 것을 걸고 일해온 과학자들에게는 전쟁이 끝난 후 토사구팽 당한 느낌 마저 들었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제 손에 피가 뭍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오피에게 "사람들이 원자폭탄을 누가 만들었는지 신경이나 쓸 것 같소? 사람들은 누가 폭탄을 발사했는지에만 관심이 있소. 그리고, 폭탄을 쏜 것은 나요"...대충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방을 나가는 오피의 뒤통수에 대고 "저런 징징이(cry-baby)는 다시는 들여보내지 말게"라고 보좌관에게 쏘아붙인다.


<원자폭탄 만들기>를 보면, 닐스 보어가 오피와 비슷하게 영국 수상 처칠로부터 모욕을 당한다.


양자역학을 창시한 닐스 보어는 그 당시 물리학자들에게 신과 같고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덴마크와 스웨덴을 차례로 탈출한 닐스 보어는 아들 오우어 보어(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 닐스보어 연구소 소장이 된 아들)를 데리고 영국 과학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과 한동안 함께 일한다. 보어는 나치에 대항해서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소련과는 정보를 공유해서 서로 소모적인 군비 전쟁(arms race)에 돌입하지 말고 국제적인 공조로 핵무기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명성과 입지를 이용해서 정치가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겉으로나마 보어에게 정중하게 대했지만 영국의 처칠은 70대의 물리학자를 눈앞에서 문전박대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오피가 소련의 과학자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맨해튼 프로젝트 상황을 흘렸을 수 있다고 보고 그를 잡아 가두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다우닝가 10번지를 방문한 보어를 박대한 처칠에 대해 저자인 로즈는 이렇게 표현했다.


처칠의 외고집은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솔직한 면이 있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준비로 정신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음모자들이 등 뒤에서 기어 다니는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찰싹 때려 떨어뜨렸을 뿐이다.
<원자 폭탄 만들기>, 리처드 로즈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70대의 노과학자를 앵앵대는 파리처럼 취급한 처칠(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정말 마음이 아팠다. 닐스 보어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기에). 그러나 훗날 소련의 스파이 활동과 수소폭탄 개발로 미루어, 역사는 결국 트루먼이나 처칠의 손을 들어준다.


인류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리는 것은 비범한 천재들이다. 그러나 그 결실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것은 투표로 대중의 힘을 위임받은 정치가들이다.


천재의 수난


천재들은 퀀텀 점프(닐스 보어가 발견한 개념!)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한 발자국 더 확장하면서 인류를 성장시키고 인간의 문화를 발전시킨다. 천재들은 살아서 그 영광을 충분히 누린 경우도 있겠지만 무시받고 오해받고 질투와 미움을 받다가 몰락해 버린 경우도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천재를 추앙하고 사랑하지만, 한편 천재성은 엄청난 질투와 시기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천재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비극을 가져오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떠올랐다. 또,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뮤지컬 <해밀턴>에서 알렉젠더 해밀턴과 애런 버의 관계도 떠올랐다.


존경심과 동경의 감정은 상대에게 거부당할 때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복수심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오피와 스트로스의 악연은 라부아지에와 마라의 일화를 떠오르게 했다. 당대, 아니 전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화학자인 라부아지에에게 의사이자 아마추어 과학자인 마라가 찾아왔다. 자신이 발명한 적외선 탐지기라는 장치를 가장 존경받고 유명한 과학자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가 검토한 결과 발명은 엉터리였고, 과학 아카데미는 마라의 발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라가 느낀 수치심은 엄청난 미움과 복수심으로 자라났다. 훗날 마라는 혁명 정부의 급진파 지도자 중 하나로 수많은 귀족들을 기요틴으로 보냈고, 워낙 뛰어난 과학자여서 국내외에서 구명의 목소리가 컸으나 라부아지에는 결국 세금징수원으로 국민을 착취했다는 죄목으로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마라의 복수심이 여기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는 스트로스가 오피의 보안 허가를 철회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잘라 말하긴 어렵다).


오피와 스트로스의 관계뿐만 아니라 오피와 에드워드 텔러와의 이야기도 충분히 재미있는, 셰익스피어적인 드라마가 나올 듯하다.


그러나 사실 과학의 무대는 셰익스피어 극장이 아니다.


사실 맨해튼 프로젝트, 그리고 '원자 폭탄 만들기'는 오펜하이머 한 사람의 개인기가 아니라(비록 그가 마에스트로급의 지휘자 역할을 했지만) 수많은 과학자들의 작은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만들어진 결과이다. 유치하게 (팝콘이나 씹으면서) 가장 공로가 큰 사람을 뽑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공식적, 과학적 맥락에서는 엔리코 페르미, 비공식적, 사회적 측면에서는 레오 실라드를 뽑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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