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31
봄과 여름 사이의 거리를 걸을 때 머리 위에서 찰랑찰랑 이는 초록의 물결은 그 하루를 충분히 기분 좋게 만든다. 빛을 받은 작은 잎사귀 하나하나는 지상의 윤슬처럼 반짝인다. 산 대 바다의 해묵은 질문에서 점점 산의 초록이 좋아져,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바다에 오면 역시 이 해방감을 이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엉성한 듯 야물게 쌓인 낮은 돌담을 스치고 비자림을 걸으며 막 샤워를 마친 듯한 기분을 느껴도 김녕-함덕 해변에서야 우리가 제주에 있구나가 실감된다.
어떤 장소는 그곳을 강하게 상기시키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제주는 다종다양한 자연경관과 지형을 가진 곳이지만 이 독보적인 바다색만큼 상징적인 게 있을까 생각된다. 하얀 모래 위에 까만 현무암이 나뒹구는 뒤편으로 줄줄이 다른 색들이 얹혀있다. 하늘이 그대로 고개를 맞댄 듯한 옅은 파랑, 소다색의 웅덩이들, 일렁이는 청록, 멀리서 헤엄치는 길고 긴 검푸른 등줄기.
제주 바다는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지만 뜨거움을 향해 달려가는 요즘의 물색이 특히 아름답다. 발등을 덮는 따뜻한 물의 감촉과 몇 걸음 더 들어가자 서늘해지는 온도를 느끼며 바다 위에 서 있으면 강한 쾌감이 든다. 해변에서는 고조되는 분위기 끝에 마침내 팡파르가 터지듯 잠자던 감각이 분출되고 결국 비워져서 눈앞의 바다색만큼 청량해진 기분으로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