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33
여행은 경험일까?
경험 : 1.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 또는 거기서 얻은 지식이나 기능.
2.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
어떤 종류의 지식을 얻어야, 행위를 통해 무엇을 의식해야 비로소 경험이 되는 걸까? 경험이란 건 역시 시간을 두고 무르익어야 하는 과실인 걸까. 시골의 밤은 도시보다 몇 시간 빠르게 찾아오는구나,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버스 배차 시간에 운전면허를 다짐하게 되는 일은 경험일까? 이 먼 곳까지 와서 왠지 집에 가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저 이방인들은 뭘 보고 무슨 얘기를 나누길래 저리 깔깔거릴까 싶은 외로움은? 유명해서 유명할 뿐인 작품 앞에서 내 무지를 깨닫는 일은? 인스타에 올릴 몇 장의 사진을 대가로 구멍 난 통장 잔고와 결국 집이 최고더라, 한 문장만 남는 허탈함도 경험이랄 수 있을까?
한편으로 이런 질문도 뒤따른다.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 개인이 그 나름대로 부여하는 의미에도 참, 거짓이 있고 위계가 있나, 시간만 죽이고 온 여행에서 '내 삶을 돌아봤어' 말하는 게 그렇게 고까운 일일까, 불편하고 수고로운 오지에서의 짧은 체험 뒤에 우리나라에서의 삶은 행운이구나 하는 감상은 경험일까?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사치품을 쇼핑하고 호화로운 리조트의 선베드에 누워 휴대전화 스크롤을 내리는 팔자는 그의 지위와 수입에 의해서만 납득되는 여행일까? 대소비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자본주의를 신처럼 떠받드는 사회, 과시하는 소비의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사회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에겐 경험으로 추앙되는 그런 사치가 누군가에겐 공동체에 손해를 끼칠 것이 분명한 잠재적 채무자로 낙인 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답을 해보자면 내게 여행은 경험이다. 남에게도 그럴 것으로 생각한다. 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앎이 경험의 정의처럼 주관적 이해나 의식으로까지 확장되려면, 손으로 만지고 두 발로 걷고 입으로 삼키는 육체적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 의식이 하다못해 '나 이런 거 싫어하네' 수준이더라도 말이다. 최소한의 반경만으로도 삶은 굴러가고 이런저런 감정도 느끼고 나름의 깨달음도 얻지만, 언제나 내가 모르는 틈은 존재하고 그 틈을 벌렸을 때 벌레 몇 마리가 기어 다니는 좁은 통로가 나올지, 가늠 안 되는 깊이의 크레바스가 나올지는 알 수 없는 게 또 인생이므로 뭐든 가능성을 닫아 버리진 않았으면 싶다.
물론 여행만이 경험인 것은 아니다. 소셜미디어에 수집, 전시하는 피상적인 감상과 자랑질이 꼴같잖고, 이건 이래, 하는 온갖 단언이 침해로 여겨지는 건 당연하다. 세상은 나보다 너무 빠르고 조금만 수틀려도 비난을 퍼붓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때도 많다. 일도, 자기만의 굴속에서 사부작거리는 생활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로만 가득 찬 힘겨운 일상도 경험이다. 그 모든 것에 제각각 의미가 있고 다른 방식으로 깨달음을 주겠지만, 그게 다 같은 재질과 모양인 것은 아니다. 비슷비슷한 씨처럼 생겼지만, 뭘로 발화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니 가능한 범위에서 내가 가질 수도 있을 경험을 싸그리 시도해 봐야 할 동기는 충분한 셈 아닐까.
패러다임을 바꾸는 건 정주의 역사보다 이동의 역사였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휙휙 바뀌는 스크린이 보여주고 인공지능이 답해주는 세상이 전형인 것도 정답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온종일 헤엄치느라 까맣게 탄 피부만 남는 일도, 일이 꼬여 돈과 시간만 낭비한 불운한 하루도 경험이 될 수 있다. 장대한 풍경 앞에서 압도되는 기분 같은 건 남이 대신 설명해 줄 수 없는 부분이다. 길을 잃은 혼돈과 뜻밖의 만남에 고취되는 것도, 개고생도 경험이다. 버릴 건 없다. 뭐 좀 버리면 어떻나, 24시간 365일이 의미로 나열되는 상황은 정신분석가들이 나설 일이다.
일이든 생활이든 여행이든 각자의 사정과 입맛대로 살면 되는 일이지만 때로 소비와 경험을, 낭비와 의미를, 일과 여행을 무 자르듯 구분 지으려는 시도와 서슴없는 가치판단은 피곤하다. 여행이 누락된 내 삶을 떠올리면 채도가 확 빠지고 금세 밋밋한 그림이 된다. 꼭 뭘 얻고자, 느끼고자 여행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내가 아는 세계의 반경을 조금씩 넓혀 가고 싶을 뿐이다. 그 끝의 결론이 무의미라고 해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
*네이버 어학사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