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4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는 어떤 단편적인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 낸 존재 같다. 그 순간이란 말 그대로 사진으로 포착된 찰나의 이미지나 소리, 냄새 같은 것이다.
불분명한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현재까지 나에게도 분명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다. 오선지처럼 펼쳐진 시간 위로 자잘한 일상은 음표를 그리고 아름답거나 괴이한 멜로디를 만들며 삶의 마지막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 악보와 추억은 별개다. 오랜 시간 퇴적된 지층 위로 슬며시 손을 드는 쪽은 특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 의아하고 의미 없는 기억들이다. 기억은 영악한 어린애라서 변덕이 심하고 때로 쉽게 거짓말을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것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는다.
어느 날 한없이 바라봤던 하늘이 그랬다. 아직 내가 초등학생이었는지 갓 중학생이 된 무렵이었는지,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해 질 무렵 중앙동 선착장에서 배가 막 떠났을 때부터 대교를 한참 지나서까지 올려다본 하늘에 잔잔하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저무는 태양의 꼬리를 붙잡아 누군가 길게 쓸고 간 자리에 하얀 거품이 매달리고 보라색의 개펄이 펼쳐진 듯했다. 마치 바다의 자화상처럼. 그 하늘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 강렬하게 남았다.
섬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것은 새삼스러운 풍경이 아니지만 그 저녁 하늘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최초다. 휑한 초겨울 집으로 돌아가는 논둑을 걸으면 맡게 되는 짚 냄새나 깨기 싫은 아침 내 귓바퀴를 털털거리며 돌아 나가는 경운기 소리, 장맛비에 눅눅해진 옷가지를 던져 놓고 따뜻한 방바닥에 엎드려 듣던 빗소리도 그런 식으로 남았다.
세차게 비가 쏟아지던 또 다른 날의 하굣길, 조잘거리던 우리들의 얘기는 모두 잃어버렸지만 툭툭 몸을 때리고 발가락 사이로 하천처럼 갈라지는 간지러운 비의 감촉은 없어지지 않았다. 새까만 밤을 가르고 구겼던 보름날 불빛과 고갯마루에서 촘촘한 별을 보고는 분명 훗날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되리라는 예감도 생생하다.
기억은 그런 식으로 남는다. 지금 의미 있다고 믿는 것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끈질기게 내 몸 어딘가에 붙어있기도 한다. 많은 기억이 댐으로 막힌 강처럼 특정 장면과 몇 개의 감각만이 부풀어 올랐고, 쭉 이어졌을 강줄기는 말라붙어 군데군데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도 물은 계속 이어져 바다에 섞일 수 있을지, 빈 바닥을 드러내고 말라버린 지류가 될지 모르겠다.
이제 최초의 자극은 어린 시절만큼 강렬하지 않고 더 쉽고 빠르게 잊힌다. 그래서 불안하고 안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 추억이 시시하든 찬란하든 하찮은 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시간을 타고 퇴적되는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몇 가지 추억을 반추하는 것이 지난한 인생을 견디는 방법이 돼 주기 때문에. 누군가는 손에 꼽은 몇 개의 기억만으로 위안이 되고 힘을 얻게 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