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 구멍 파기

# 그냥 하자

by 무재

그냥 하자.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는 거다. 나에겐 그게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 고민하고 이렇게 될까 저렇게 꼬이진 않을까 누가 어떻게 보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 일단 저지르고 대단치 않은 발걸음을 떼는 일.

우선 날씨를 보자, 비가 안 오면 일단 나가서 걸어보자.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하고 책이든 노트든 뭐든 펼치고 보는 것, 미루지 말고 적어보고 움직여보고 실행해 보는 일. 중요도를 두지 마, 남을 의식하지 마, 일은 어떻게든 돼 나가는 법이니까.


언젠가부터 내 일상에 많은 구덩이를 파 놓는 게 필요해졌다. 지긋지긋한 출퇴근 시간을 포함하면 하루 12시간 가까이를 회사에 매어 있는 셈인데, 거기서 파생된 관계와 스트레스와 감정이 내게 너무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어느 한 가지가 구속복처럼 나를 옴짝달싹 묶지 못하도록, 물리적인 시간은 어쩔 수 없을지언정 그게 곰이나 늑대 같은 맹수가 되어 나를 해치지는 못하도록 관리하기 위해서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는 코끼리나 나를 해칠 의도는 없는 판다 정도로 옆에 앉혀 두어야 한다. 크기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한때는 나도 직업인으로서의 나가 가장 멋지고 중요하길 원했었다. 어쩌면 지금도 한 편으론 그런 나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대부분 기대를 빗나가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네가 나에게 일 번은 아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너를 첫 번째로 세울 것이냐는 온전히 내 결정에 따를 것이므로 네가 아무리 날뛰고 나를 상처주려 해봤자 소용없다고 응수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뭐 하나 완벽하게 해내는 게 없는 내가 책임감이 없다고 괴로워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구멍이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 수영, 자격증, 새로운 관계를 위한 노력, 학위, 전직, 탐색, 시도, 또 시도, 혹은 내려놓기. 먹고살기 위한 일 이외의 가치와 감정과 경험을 계속 만들어내고 싶다. 그게 나에게 더 중요한 시간이 되도록 애쓰고 싶다. 그래야 나라는 사람의 윤곽이 흐릿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저런 구덩이를 여기저기 파다 보면 자연스레 옆의 것과 합해져 하나가 돼 버릴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스르르 무너져 버리거나 발을 담가보기도 전에 허술하게 흐지부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어떤 것은 예기치 않게 단단히 버무려도 지겠지. 나는 그 가능성을 희망하고 싶고, 이러나저러나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 힘을 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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