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섬의 석양

# 여행 13

by 무재

사람들이 유독 석양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작열하다가 순식간에 저편으로 떨어지는 태양과 그 잔상이 남긴 색을 사랑하는 것은 왜일까.

노을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주무르고 날 선 감정을 무너뜨리고 내 어깨에 손을 내밀어 토닥토닥해 주는 것 같다. 그저 이 하늘과 공기에 파묻혀 순간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뉴욕에서 4시 반이면 지던 해는 쿠바에서 6시 20분, 아타카마에서 8시 반쯤 지더니 이스터섬에 오니 9시가 다 되어야 비로소 하늘이 물들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8시쯤부터 아후타하이에 모여든다. 완만한 언덕 위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간식거리와 시원한 바람을 즐긴다. 파도가 쉼 없이 철석이고 새털구름 뒤로 주홍빛이 번져가고 새빨간 해가 바다에 풍덩 빠지는 게 선명히 보인다. 그 앞에 줄지어 선 모아이의 검은 실루엣을 사람들은 사진에 담는다.

푸릇한 잔디밭에 철퍼덕 앉아 카메라를 쥐고 맥주를 홀짝 이며 내가 훗날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이 장면을 회상하게 될지를 생각했다. 새파랗다는 말을 시각으로 보여주는 물색과 동그란 해에서 흘러나온 온갖 색이 하늘과 사람들과 공기마저 물들이는 풍경을.

결재되지 않은 서류 위에서, 집으로 돌아와 바로 주저앉은 소파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끄적거리는 노트 위에서, 어스름한 풍경이 스치는 버스 안에서 아마 떠올리겠지 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에게 지금이 위안이 되기를. 몸에 스며든 이 감각이 언제라도 쉽게 떠오르기를, 그래서 미래의 나를 위로 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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