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15
<준비>
2019년 1월 28일 오후 푸에르토 나탈레스 공항에 내렸다. 이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운영된다는 공항은 작은 로지 같았고, 파타고니아의 첫인상은 드넓은 벌판에 핀 토끼풀과 몸을 휘청거리게 하는 바람이었다. 한여름의 산티아고에서 초겨울로 계절을 건너뛰었다. 웅웅 거리는 바람은 거칠게 물결을 때리고 단층의 낮은 집들마저 숨죽이게 만들었다. 이 작은 항구 도시에서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위한 준비를 한다.
늦은 밤부터 타닥타닥 빗소리가 들리더니 아침부터는 세찬 비가 쏟아진다. 느지막이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쥐고 호스텔 휴게공간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바람에 휘날리는 풍경을 보면서 오래간만에 빗소리를 듣는 일은 즐겁지만 당장 내일의 출발이 걱정이다. 그래도 천천히 일어나 가지고 가야 할 배낭과 숙소에 맡길 짐을 분류하고, 비가 잠시 잦아든 틈에 마트에서 장도 보고 왔다.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지만, 내일은 거짓말처럼 햇살이 내 등을 두드려 주길 기대해 본다.
<1일 차>
다음 날 아침 7시 반 숙소를 나섰다. 조금 가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떨어지는 빗속에 도로를 크게 가로지른 기다란 무지개가 나를 배웅한다.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시시각각 변한다. 노란 들판이 잠시 밝아졌다가 금세 어두워지고 해가 나오는가 싶더니 비가 떨어진다. 파타고니아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어쩌다 보니 동네 뒷산도 정상 한 번 밟아본 적 없는 내가 전 세계 트레커들의 꿈이라는 거창한 곳을 걷게 되었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표를 사고 서류를 작성하면서도, 저 멀리 구름에 휩싸인 삼봉을 언뜻 보면서도, 페리를 타고 옥색의 페오에 호수를 가로질러 가면서도 아직은 그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나는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는 코스라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서 짐을 풀고 시작한다. 와라즈 이후 오랜만의 트레킹이라 욕심내지 않고 가보기로 한다. 산장에서 1일 차의 목적지인 그레이 빙하 전망대까지는 왕복 4시간이지만 폭풍 같은 바람에 휩쓸리고 작은 나를 실감하기에는 충분하다.
쪽빛 호수와 진군하듯 밀려 내려오는 회색 빙하는 먼 거리임에도 장엄함을 느끼게 하지만 왠지 첫날은 온전히 풍경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이런저런 고민과 시선들이 자주 떠올랐다. 쓸데없음을 아는 생각들이 머릿속과 팔다리를 침범하게 내버려 둔 채로 털레털레 내려오다 보니 희망차던 아침의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어쩐지 우울해진 저녁.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들으며 벽난로 앞에 앉아 또 느린 시간을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