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_2

# 여행 16

by 무재

<2일 차>

파이네 그란데에서 이탈리아노 캠핑장까지 3시간, 거기서 오늘의 목적지인 쿠에르노스 산장까지 다시 2시간. 내 소식을 궁금해할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괜찮았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6시간 넘게 걸어 쿠에르노스에 도착하고 보니 발은 저리고 어깨는 무겁고 존재감 없던 골반이 다 뻐근하다.

길은 저 멀리 거대한 노르덴스크홀드 호수를 보여주며 끝없이 이어졌다. 좁고 거친 돌밭이었다가 어두운 숲길이었고, 드넓게 벌판이기도 했다. 땀이 차게 해가 비추다가도 비를 흩뿌리고 거센 바람은 길동무인양 내내 따라다녔다. 잠시 멎어주면 감사할 뿐.

개울가에서 마실 물을 뜨다가, 작은 산을 하나 넘고 걷다가 문득 돌아보고 멈췄을 때 보이는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담기에 내 마음은 너무나 작다. 당장의 아픔,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오늘은 산장에서 제공하는 잘 차려진 저녁을 먹고 내 29번 텐트에서 밤을 보낸다. 거대한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바람은 웅장한데, 그래서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드는데 또 그만큼 작은 텐트 속 침낭은 말도 안 되게 따뜻하다.


<3일 차>

3일째의 목적지는 칠레노 산장이다. 6~7시간 소요 거리랬는데 5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오늘은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국적의 많은 사람들과 지나쳐 가다 가도 한동안은 불쑥 이곳에 나 혼자 떨궈진 듯 걸었다. 음악을 들으며 걸으니 2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렸고 쉬이 둘러보거나 과자를 집어먹다가 조금 멍하게, 또 신중하게 걸었다. 혼자 걸으니 의지할 데가 나뿐이라 자꾸 말을 걸게 된다. 내 기분과 발목과 배낭에게도.

머리는 많이 비워진 것 같다. 가벼운 산책이 주는 효용은 익히 알지만 힘든 트레킹을 비싼 비용을 지불해 가며 왜 하나 싶었는데 잡념과 쿰쿰한 감정들이 첫날보다 둘째 날, 그리고 오늘 더 덜어진 느낌이다. 양으로 실감된달까. 한결 가벼워진 몸과 머리로 23번 텐트에서 쉬어 본다. 걷고, 간소한 짐을 풀고 잠시 눈 붙이고 저녁을 먹고 씻는 루틴. 평범한 오후와 저녁을 보내고 있지만 나는 지금 대자연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다.


<4일 차>

칠레노 산장에서 이 여정의 마침표인 토레스 델 파이네 전망대까지는 2시간 반 정도 거리지만 꽤 험한 난도라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누구나 그렇듯 파란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삼봉을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끝내 삼봉의 꼭대기는 짙은 연무에 파묻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히 보고 내려오는데 계획했던 2시 셔틀버스는 놓치고 말았다. 내려갈 땐 좀 수월한 법이건만 왜 여긴 내려갈 때도 길고 끝이 없는 건지. 평소의 게으른 나를 생각하면 나름 잘했다고 우쭐하던 차에 여지없이 한 방을 먹인다. 일찍 나탈레스로 돌아가 피자에 맥주 한잔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공원 초입의 웰컴 센터에서 사이다를 들이켜는 신세가 됐다. 그럼에도 단순한 내 감정은 초코바를 뜯으며 앉아 저 멀리 거대한 파이네의 뿔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금방 누그러지고 지난 며칠 내가 파타고니아의 일부가 되었다는 게 대견해진다. 외롭고 짜증 나고 후회했던 순간들마저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지고 내 일부분이 될 것이다.

이 트레킹을 끝으로 내일이면 나는 칠레를 떠난다. 북부의 아타카마부터 산티아고, 이스터섬, 토레스 델 파이네까지. 보름의 시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갔다. 긴 영토만큼이나 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풍경도, 날씨도, 하루하루도 너무나 달랐다. 쭉 적어 놓고 보니 놀라운 장소들이다. 아무렇지 않게 먹고

어느새 익숙해진 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웃던 곳들이 내가 사는 생활에서 얼마나 멀고 꿈같은 것인지를 새삼 실감한다. 그 시간들이 이제 다 지나가고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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