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

# 여행 17

by 무재

거대한 도시에서 며칠이라는 시간이 덜컥 주어진다면 대부분 내가 하는 일은 걷는 것이다. 한적한 시골이나 자연 속보다 되려 잘 짜인 도심일수록 걷기는 수월하다. 초행의 여행자가 활보해도 무난한 구역과 위험한 지역의 구분이 명확하고, 가드가 있는 스파 브랜드와 스타벅스는 와이파이와 함께 잠시 경계심을 놓고 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무심한 현지인들은 여행자를 빤히 쳐다보지 않고 두 발로 느끼는 도시의 감각은 언제나 금방 몸에 스며들어 이틀만 지나도 내가 마치 원래 살고 있는 주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주일간 도시를 걷고 보니 이제는 이곳이 너무나 익숙한 곳인 양 여겨진다.


숙소에서 5월 광장 주변의 센트로와 산텔모 주말시장, 레콜레타 묘지까지는 걸을만한 거리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팔레르모 구역과 라보카를 빼면 구석구석 돌아다닐 만하다. 도시는 듣던 대로 거대하고 별칭처럼 파리를 연상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황량하고 허물어진 듯한 느낌이 경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한두 거리 차이로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기도 해서 마냥 마음 놓고 다니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몸으로 부딪치며 목격하는 도시는 빠르게 스칠 때 미처 보지 못했거나 볼 생각도 안 한 도시의 민낯을 체감하게 해 준다. 임대 딱지가 붙은 빈 상점가와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곳곳의 골목에도 작은 서점들은 여전히 빼곡하고, 길에서 마음대로 휴대폰을 꺼낼 수 없는 치안에도 누군가는 웃으며 낯선 도시에 선 나를 담아준다.


마지막 날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를 보기로 했는데 하필 그날 도심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주요 광장과 8차선 도로가 시위대에 막혀 대다수의 버스가 우회했고, 여행자 단체 톡방에서도 각종 당부와 주의하라는 말들이 수시로 오갔다. 거리의 시위대는 파란 옷을 입고 에바 페론의 깃발을 흔들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아마도 절박하거나 화가 나 있을 구호를 외쳐 대면서도 이 일상과 무관한 여행자가 무심코 꺼낸 휴대폰에 조심하라며 주의를 주었다.


짧게 만난 도시는 분명 듣던 대로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위험했지만, 생활과 상관없는 여행자는 깃발 속 인물의 역설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내일 뭐 할까, 어떤 소고기를 먹을까를 고민할 뿐이다. 그리고 또 분명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프링글스보다 싼 소고기를 구워 와인을 마시는 매일의 저녁이 큰 즐거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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