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ARIS - 어느 파리의 아침

# 여행 21

by 무재

2015년 4월 5일, 파리의 아침은 갓 구운 빵처럼 신선했다. 새벽의 서리와 아직 남아 있던 눈이 녹아 갓길이며 가로수 잎끝에 촉촉한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고, 무엇보다 하늘이 새파랬다! 어제 늦은 밤에 도착했던 나는 우리 동네보다 몇 배는 채도를 끌어올린 것 같은 이 파람에 우선 눈이 아찔했다. 그 모두가 어우러져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호스텔의 엄격한 문을 밀고 올려다본 파리의 첫인상에 조금씩 박동이 빨라졌다.

숙소 골목을 빠져나와 5분쯤 걸으면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널 수 있다. 고수머리를 한 기사들이 정렬한 듯 센 강가로 쭉 늘어선 가로수와 웅장한 기둥 위 황금빛 조각상이 반짝이자 드디어 내가 유럽에 있구나를 실감했다. 공기마저 파랗게 나를 휘감는 듯했다. 여행의 반은 날씨인 법인데, 운이 좋은 첫날이다.

사실 나는 파리에 대한 로망이랄까 환상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되려 개똥, 인종차별, 소매치기 같은 단어만 옴팡 들은 터였다. 에펠탑은 보지 않아도 이미 수천 번은 본 듯한 조형물이었고 여행자에게 천국과 지옥을 골고루 선물하는 호불호 강한 이 도시가 과연 나에겐 맞을까 의구심을 품던 차였다. 그런데 그 쌀쌀한 아침, 오늘부터 봄이야 하고 문을 열어주는 그 아침의 풍경이 기대 없던 마음에 빠르게 설렘을 불어넣었다. 빛나는 햇살이 거리의 물방울을 튕겨내는 벨 에포크의 상징 위를 걸어가며 이미 파리를 사랑할 준비를 마쳤던 것 같다.

앵발리드를 액자처럼 걸어 놓고 감상하며 걷는 길, 저만치 보이는 에펠탑의 상단부에 손을 뻗으면 트로피처럼 들어 올릴 수 있을법한 길이었다. 그건 분명 첫 경험이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졌을까, 내가 그 도시 안에 있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 아침의 첫 만남이 너무나 선명해서 나는 종종 기꺼이 로댕미술관으로 향하던 일요일 아침의 산책길로 자주 돌아간다.


"내가 파리를 가장 진하게 경험한 것은 문학을 통해서도 음식을 통해서도 박물관을 통해서도, 파리 부르스 역 근처 다락방 시절에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 연애를 통해서도 아니었다. 수도 없이 걸어서였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행동이 나에게 안겨준 전적인 자유의 느낌 때문이었다. (중략) 파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순간 걸음을 멈추게 되는 때가, 심장이 덜컥 멈춘 것 같은 때가 있다. 나 말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사방이 존재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곳은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는 곳, 무언가가 일어났던 곳이다.(중략)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우리를 나누어놓은 운명의 가는 선을 따라 걷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걸어 다니고 강렬하게 경험하고 보고 느낀 것을 생 미셸 광장에 있는 지베르 죈 책방에서 산 후줄근한 노트에 끼적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다가 뜻하지 않게, 우연히, 내가 본능적으로 한 일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했으며 그래서 그걸 가리키는 이름이 이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플라뇌르였다." - 로런 엘킨, <도시를 걷는 여자들> 인용


*글의 제목은 아 파리(A Paris) 책의 제목에서 가져왔습니다.

아 파리(A Paris) (부제: 내가 꿈꾸던 게으른 시간) / 저자: 최연정, 최지민 / 출판사: 스노우폭스북스 2017년 0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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