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 중세의 도시가 선사한 '지금'

# 여행 22

by 무재

피렌체는 작은 도시다. 두오모, 베키오궁, 베키오 다리, 기차역은 길눈이 어두워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거점이고, 반나절이면 익숙하게 활보할 수 있는 장소다. 그 도시에서의 마지막 밤, 3일 동안 같은 방을 쓰던 친구와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하며, 단 한 번의 멈칫거림 없이 익숙하게 앞장서는 그를 보며, 정작 그 쉬운 길들을 골목골목 누비지 못했음을 알았다. 짧은 일정에 근교 도시를 두 군데나 껴 넣고 나니 막상 이 아름다운 도시를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 저녁을 함께하게 된 룸메이트와는 서로 일정이 달라 간간이 여행담을 나누고 조식을 함께하는 정도였는데 마지막 날이고 하니 저녁을 먹고 야경을 보기로 나선 것이었다. 원래 사는 곳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물렁물렁해지고 느슨해지는 것인지 낯선 도시에서 같은 방과 같은 언어를 쓰는 이유만으로 가는 길 내내 끊임없이 친숙한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광장 초입, 관광객이라곤 우리뿐이던 식당에서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음식과 와인, 그보다 만족스러웠던 낮은 조도와 듣기 좋은 웅성거림에 둘러싸인 저녁 식사가 생각난다. 석양이 번져 가던 저녁에 맛있는 음식과 아주 약간의 취기를 주는 와인, 이곳이 피렌체라는 사실이 발목에 찰랑거리는 기분 좋은 물 같이 느껴졌다. 평소의 일상에서는 현재 속에 얼마나 자주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끼어드는지. 몸은 지금의 시간에 있어도 마음은 자꾸만 그 지금을 벗어나 나를 괴롭히던 날이 많았었다.

온전한 '지금'만 남은 그 저녁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야경을 내려다본 순간 절정이 되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말문 막히게 아름다웠다. 삼삼오오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버스킹 음악을 따라 부르면서, 난간에 기대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제각각 풍경을 보지만 아마 우리가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원한 밤바람에 기대어 아르노강의 곡선을 따라 여전히 중세 시대에 머문 듯 빛나는 노란 건물들, 두오모의 주황색 지붕, 보라색이 훑고 간 느린 석양빛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이상한 뭉클함을 느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오랜 과거가 선사한 '지금'만을 온전히 눈과 마음에 새기며 아끼듯 이 도시를 오래오래 바라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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