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감

# 가을의 찰나

by 무재

요즘 참여 중인 한 모임에서 한 분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로 계절감 느끼기를 꼽았다. 각 계절의 풍경을 오감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일.

어렸을 적엔 봄-가을이면 산으로 들로, 여름이면 계곡으로 가는 일이 아주 보편적인 여가의 일종이라고만 생각됐다. 보름에 부럼을 깨물고 6월엔 호국영령에 대한 포스터를 그렸듯 으레 특정 시기에 일어나는 일의 하나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어쩌면 계절감을 느끼는 일은 문화적인 관성이면서 동시에 현대인의 생존에 필요한 활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생존까지야 싶지만, 점점 짧아지는 가을과 내가 기억해 온 계절들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 시절의 일기부터 산발적으로 흩뿌려진 기록을 들춰보면 날씨 얘기가 꽤 많다. 날씨만큼 만만한 소재가 없고 우리의 생존과 삶의 질에, 경제와 산업 온갖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매개이니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날씨와 계절에 생업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내 기억 속에 박제된 날씨와 계절의 이미지는 꽤 풍성하다.

남해안 섬에서 크던 시절 여름철 태풍에 하굣길 배가 끊기고 슬레이트 지붕이 휴지장처럼 펄럭이며 날아가는 풍경,

폭설에 갇혀 옴싹달싹할 수 없는 남양주 46번 국도를 걸어가는 일,

터널을 지나 한 정거장씩 옮겨 갈수록 짙어지는 경춘선의 겨울 입김 같은 것.

남쪽의 봄은 진달래와 개나리가 가득한 언덕배기였고, 중부의 봄은 찬란하게 흩날리는 벚꽃의 찻길이었다.

남쪽의 여름은 시퍼렇고 요란하게 뜨거웠고, 중부의 여름은 청록색으로 축축했다.

그리고 가을은, 어디서나 늦은 오후의 주홍빛으로 거리를 밝혔다. 이파리들이 부스스 떨어지며 노랗고 빨간색을 세상에 흩뿌리기라도 하듯이.

돌아오는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은 이처럼 확고하고, 우리의 추억은 성실하게 쌓여와서 이 찰나의 계절이 점점 불안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점차 예측하기 어려운 여름의 폭염과 폭우 속에, 또 반복되는 비극을 지나, 어느새 깔린 황금빛 거리 풍경을 보고서야 올해 가을을 실감했다. 실감한 순간에 이미 낙엽이 뒹굴고 있어, 반가운 친구를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보내는 느낌이 든다.

계절에 맞는 음식, 장소, 놀이로 계절감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은 언제까지 가능할까.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찰나가 되어 가는 이 가을을 가까운 미래에는 멸종위기종으로 분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