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20
도시의 소란함이 주는 평화가 있다. 광선을 향해 치열하게 뻗어가는 덩굴식물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길과 회로판 같은 블록, 도시의 웅성거림이 묘한 안정감을 불어넣어 준다. 내가 여행자인 동안은.
숨 막히게 짓누르던 복잡다단한 외형이 더는 스트레스가 아니고, 어떤 걸 보게 될까 기대만으로 가득한 발걸음이 된다. 이곳이 서울의 아침이 아닌 도쿄의 아침이라면.
4월 중순의 서늘한 봄날, 거리 곳곳에 비스듬한 햇빛의 단면이 부드럽게 착륙하고 있다. 여러 개의 가는 팔을 늘어뜨린 버드나무는 빛의 조각을 부르르 털어 내고 있다. 그 사이를 오랜만의 도시 여행자들이 걷는다. 날씨 좋은 날 도심의 골목을 걷는 일은 누가 기분 좋으라고 등 떠밀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츠키지 역 근처 터렛 커피에서 아주 진한 라테를 마시고 바삭한 크로켓을 먹으며 기치조지 거리를 걷는다. 대도심 곳곳에 숨은 한적한 동네와 오밀조밀한 볼거리들은 대도시의 인상을 한결 유순하게 만들어 준다. 통제 안 되는 아이들의 함성 같은 번잡함을 다소 눌러준다.
밀도 높은 도심을 걷는 여행은 언뜻 숭고함을 일깨우는 자연의 풍광과 한적한 바다 위 휴양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또한 쉼을 준다는데 의의가 있다. 빨빨거리며 걷는 일이 휴식이 아닌 이도 있겠지만 여행자에겐 내 생활을 벗어난 곳에서 걷는 일 자체가 큰 재미다. 거대한 털 뭉치의 끝을 잡고 조금씩 조금씩 내 경로를 짜 나가는 일이다. 도시가 클수록 마주친 길을 다시 만나긴 힘들고, 막막한 기분도 잊을만하면 나타나지만 그만큼 지겨울 틈 없이 다채로운 외양을, 그곳에서 삶을 꾸리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평소에 나를 짓누르던 그 많은 사람과 소음이 여행지에선 그저 구경거리이자 영감의 원천이 된다. 가장 익숙한 것들이 뜻밖에 낯설어진다. 나는 그 느낌이 좋고 그래서 잊을만하면 내 생활과 무관한 대도시를 걷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