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19
제천 혹은 단양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만석일 때가 많았던지 내 기억은 늘 연결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나란히 앉은 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철컹거리는 녹슨 소음 위에 앉으면 규칙적으로 엉덩이를 통통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느리게 스쳐가는 가느다란 녹음과 저기서부터 다가와 창을 두드리고 가는 햇빛은 정말 내 기억인지 기억이라고 믿는 상상의 정경인지 모르겠지만, 우물우물 씹을 거리를 계속 건네주던 할머니의 손과 입은 분명한 기억이다. 지금의 각진 턱을 만들어준 딱딱한 오징어의 맛은 신문지 한 면의 공간과 기차 창에 와 볼을 비비던 노란빛, 지금은 사라진 손과 함께 영원한 순간으로 남았다.
지금의 복선화, 전철화 전 청량리역에서 강릉역까지는 여러 노선의 이름을 거친다.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가장 낭만적이게 목가적이면서 어지러운 여름날처럼 빽빽하게 험준한, 그러다 느닷없이 파란 파도가 눈으로 들이치는 여섯 시간의 긴긴 기찻길이다. 중앙선의 간이역 이름과 낮은 플랫폼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익숙하지만, 치악 루프 터널과 나한정-흥전역 사이 스위치백 구간은 낯설고 이제 사라진 것이라 괜히 아쉽다. 기차가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추전역에 멈추면 괜히 숨이 차는 듯했다. 돌이켜 보면 가장 높은 역입니다, 했던 기관사의 웅웅 거리는 목소리가 괜히 갑갑한 마음을 불어넣었던 듯싶다.
내게 중앙선은 철길 옆에서 가만히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노랗게 익은 가을의 들판으로, 태백선은 몸을 찌르는 초록의 날카로운 여름으로, 영동선은 차가운 바람이 콧 속으로 스미는 새파란 겨울로 기억된다. KTX가 개통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여섯 시간의 기차를 탔던 게 어느 계절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기차 자체가 목적이었던 그 마지막 여행을 생각해 보면 색이 다른 세 개의 계절이 뒤섞여 언제고 동해로 떠나는 기분이 든다.
*루프식 터널 : 경사가 심하여 기차가 오르기 힘든 지점에 선로를 나선형으로 우회시켜 경사를 완만하게 한 터널.
*스위치백 : 경사가 가파른 구간에서 높이차를 극복하기 위하여 지그재그 움직여 기울기를 해결하는 철도선로방식. 선로를 Z형으로 설치하여 열차를 전진, 후진을 반복해 목적지에 오를 수 있도록 설계한 선로.
프라하-드레스덴-바젤-취리히 : CITY NIGHT LINE 459
프라하 중앙역 가장 큰 전광판을 아무리 쳐다봐도 내가 예약한 기차가 뜨질 않았다. 출발 10분 전에야 부랴부랴 묻고 뛰어서 간신히 내 첫 야간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좋아하는 나는 야간 기차에 약간의 환상을 갖고 있던 터라 어쨌든 탔다는 안도감을 설렘이 조금 더 넘치게 덮었었다.
4인 침실칸의 2층이었는데 2층과 천장 사이가 너무 좁았고, 검표원이 드레스덴까지는 너 혼자이니 1층 칸에서 쉬어라 했던 게 생각난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대부분 그 밤의 기억은 너무 불편해 잠을 설치고 등이 따갑던 감각이다. 같은 칸에 탄 가족의 말소리를 꿈인가 싶게 들으며 어서 아침이 왔으면 했던 마음뿐이다. 조금 덜 수줍었다면 영어가 더 유창했다면 불편한 선잠 대신 뜨문뜨문 대화를 기꺼이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몽롱한 아침을 맞고 국경을 건너 스위스에 도착했다. 정말 뻔하고 진부한 표현인데 이 밖에 다른 말이 있나 싶은 엽서 같은 풍경 속으로 걸어갈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