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코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MBTI 앞 2자리는 늘 압도적 점유율을 자랑하는데, 굳이 검사가 필요 없는 기질이기도 하다.
엄마를 도와 신나게 고추, 대파 따위를 썰면서 내 손가락 한 마디가 댕강 같이 썰려 나가 볶음요리에 빨갛게 섞이는 상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나는 전혀 내 이상형이 아닌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그와의 비극적, 희극적 모든 막장 드라마를 쓰는 유형이기도 하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평행세계를 넘나드는 상상은 꽤 우주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동기와 책임과 욕구만을 원하는 기질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의 연기를 피워대는 일과 혼합되어 알파벳 N으로 표현되는 것이 다소 비약이긴 하지만 빠르게 나를 설명해야 하는 요즘 시대에 꽤 편리하게 명함처럼 들이밀기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그놈의 MBTI, 겨우 몇 분짜리 검사로 한 사람을 어떻게 규정해? 지겹다, 하다가도 편리하긴 해, 쭈그리도 한 큐에 설명이 되잖아,라는 심정이다.
이 부문 균형이란 없는 나의 파워 N 성향은 기쁘고 즐거운 상황일 때 보다 비참하거나 두려운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천성이 회의적인 나는 기쁨을 온전히 그 자체로, 행복을 더 큰 행복으로 굴릴 수 없는 부류인 걸까 싶어 조금 슬프지만 아무튼 그렇다. 뽀득뽀득한 빨랫감을 햇빛 아래 털어 말리고 그 아래 펄럭이는 그늘에 누워 한숨 웃기보다는, 기다렸다는 듯 급속도로 흐려지는 하늘과 세차게 불어오는 미세먼지를 먼저 상상하게 된다.
원래라면 대낮에 도착했어야 할 리우데자네이루 갈레앙 공항에 저녁에 떨어진 날, 환전소와 유심센터도 문을 닫았고 동양인 한 명 보이지 않던 다소 휑뎅그렁한 공항에서 (가까운 나라를 여행할 때 자꾸만 마주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별로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자신을 이런 곳에선 뼈저리게 반성하게 되며, 나의 아시아인 정체성이 이만큼 선명하게 자각될 수가 없어진다.) 자꾸만 어긋나는 위치로 우버 기사와의 한 시간에 가까운 힘겨웠던 소통을 마치고 어찌어찌 겨우 우버에 탔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의 호의와 친절을 받으며 답도 없는 나는 안도감을 재빠르게 스릴러 혹은 하드보일드 장르로 치환한다.
이 선량한 기사는 사실 거대 마약 밀매 조직의 끄트머리로 투잡을 뛰며 만만해 보이는 동양인을 언제고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어떤 자세로 버려지게 될 것인가, 와이파이도 안 되는 내 아이폰은 어떤 SOS를 쳐 줄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안 해봤는데, 지구 반대편에서도 무심한 자식의 소식을 우리 엄마는 언제쯤 듣게 될까, 어쩌면 나는 위기 상황에 기적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그의 소굴을 탈출하고 기적적으로 와이파이를 잡아서, 등등. 파워 S인 엄마가 들으면 코웃음 치거나 등짝을 한 대 후려칠 류의 장면이 후루룩 스치는 동안 나는 안전하게 숙소에 도착했다.
한편 백록담의 확대 버전인 이스터섬 오롱고 분화구를 내려다보며 저 깊은 분화구를 통과하여 남태평양으로 마침내 진입하면 오랜 세월 새 친구를 기다려온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라는 상상을 했는데, 그 인물은 그로부터 1년여 뒤 혹독한 훈련으로 사이보그로 거듭나고도 우주가 아닌 바다로 뛰어든 재경 이모로 다시 떠오르게 된다. (재경 이모는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마지막 단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투병 생활을 들으면서는 안타까움이 스미는 동시에 이미 머릿속에선 불치병을 통보받은 한 젊은이가 스스로 삶을 정리하려 스위스나 네덜란드 등지로 떠나는 장면을 그려 넣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나쁜 자식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좀 더 희망찬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내 상상의 방향이 긍정적인 쪽으로 흘러가 주었으면 좋겠지만 아직까진 요원하다. 어제도 오늘도 내 N극은 비극에만 가 달싹 붙으려고 하는데 이게 현실은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온갖 가정이 혹여나 만나게 될 불운에도 잃지 않을 침착성과 결국 괜찮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건 욕심이려나. 이거야말로 지나친 비약인 것도 같다.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