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23
-장면 1-
에투알 개선문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기 위해 샤를 드골-에투알 역 비좁은 통로를 걸어가는 중, 내 작은 크로스백의 지퍼가 3분의 1쯤 열린 것을 알아챘다. 아무런 낌새도 부딪침도 없었는데, 게다가 난 동행이 둘이나 있었는데, 피해는 없었기에 얘네들은 참 과감하구나 하고 금방 잊어버렸다. 개선문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사사로운 일쯤 지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그 과감성은 한층 진화하여 내가 파리를 떠나는 날 다시 나타났는데, 끙끙거리며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가여운 관광객을 돕기는커녕 대담하게도 대놓고 가방 지퍼를 열려고 드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너무 대놓고 그래서 당혹스러움 사이 헛웃음이 나왔고, 그 당당한 녀석이 꽤나 힙한 차림새의 청년이어서 이 XX는 뭘까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째려보자, 네가 무고한 사람을 의심한단 표정으로 (분명 나는 그렇게 읽었다.) 나를 보는 그 눈이 꽤 오래 생각났으며, 경험치가 부족하던 나는 그때 한국어 욕이라도 갈겼어야 한다는 생각을 좀 더 오래 하게 되었다.
불쾌한 경험으로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공항철도로 환승하러 가던 중 만난 또 다른 그놈의 계단에서, 휴 한숨 한 번 내뱉고 발을 떼는데 이번엔 훔쳐 가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가방을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도와줄까? 말도 없이 성큼 가져가더니 계단 꼭대기까지 들어다 주고 쿨하게 그는 떠났다. 다소 무례한 이 친절에 앞선 더 무례한 이의 만행으로 인한 반대급부로 쓸데없이 과하게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잘 감동하긴 하지만.
-장면 2-
파리 콩코드 광장의 사인단도, 몽마르뜨언덕의 팔찌단도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던 내가 예기치 않게 집시들을 만난 건 바티칸 투어를 위해 이른 아침 탑승한 지하철 안에서였다. 십 대 소녀 무리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정신을 빼놓고 뭘 훔쳐 가려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정신을 뺄 정돈 아니게 의도가 빤했고 난 털릴 게 없는 가벼운 차림의 관광객이었으므로 뭐 그 자체는 나중에 풀 얘깃거리 하나 정도였다. 그 순간에 내가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포인트는 되려 그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구경하던 시민들, 관광객들이었다. 나중에 내가 그런 해프닝의 목격자가 되면 나는 그 애들을 꾸짖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괜스레 울컥했었다.
위축된 마음은 다음날 콜로세오 역에서 바싹 펴지게 되는데, 지하철 매표 기계 앞에서 헤매는 외국인 중년 부부가 내게 도움을 청해 그들의 표를 뽑아주게 된 일 때문이다. 누가 봐도 관광객인 내가 더 믿을만해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선뜻 베푼 가벼운 호의로 찜찜한 마음의 부스러기를 털고 콜로세움을 향해 가뿐히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관광객이 득시글거리는 유명 도시일수록 냉온탕을 오가는 경험을 더 맞닥뜨리게 된다. 많은 사람 속에서 갖가지 에피소드가 생성되고, 일회성의 우연이 일회성이라서 환멸과 냉소를 담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게 바로 반대쪽 뺨의 다정함을 내밀기도 한다. 그리고 불쾌한 상황이 단 한마디의 위로로, 격려로 부드럽게 희석되는 게 놀랍다. 무례한 리셉션 직원에 상처받은 마음을 친절한 버스 기사가 토닥여 주는 일을 여행 중에 빈번하게 만난다. 사실 일상이라고 다를까. 누군가의 불운한 경험이 어쩌면 나로 인해 희석될 수 있도록 내가 사는 커다란 도시에서도 작은 친절을 꺼내고 싶어 진다. 내가 받은 사사로운 다정에 그 도시들을 여전히 아름답게 기억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