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 새로운 장소 들이기

by 무재

내 고향은 여수인데, 나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여수가 특별한 도시여서도 아니고 우리 집안이 대단한 집안인 건 더더욱 아니고 단지 내 정체성의 절반쯤이 저 끝의 남해안 바닷가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만큼이나 장소는 한 사람의 구성에 영향을 끼친다. 지금의 내가 나로 보이고 읽히는 것에 유년의 한 시절이 그대로 누워있는 장소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경기도에 거주하며 서울의 직장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 윤슬 어린 바다를 품고 언제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지치고 삭막할 때 언제든 내가 뛰놀던 해풍 가득한 돌무더기로, 걸리적거림 없는 채도 낮은 풍경을 바라보던 학교 계단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삶은 반복이지만 그 반복 속에 변칙과 누락과 예상 못 한 재미가 끼어들 수 있는 시절이었다. 느슨한 그물 같았다. 팍팍함은 어른들의 몫이었고 어린 우리들은 그 그물 사이를 신나게 통과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미 오래전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원칙적이고 누락이 두렵고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 거주하는 곳에서 지낸 기간이 어느덧 나고 자란 장소에서의 기간을 추월했다. 내 인생 절반 이상의 기억이 이제는 현재의 장소에 있다. 이곳은 여수와는 아주 다른 생활과 거리감과 기온을 가졌다. 주말 나들이의 시간감이 달라졌고, 우리가 보는 풍경이 변했다.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고 독립을 하는 동안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나의 해변 뒤로도 무성한 나무가 자라고 소복이 눈이 쌓였다. 장소의 풍경이 마음의 전경을 그린다. 호숫가에 앉아 호수의 표면을 통해 등 뒤의 거대한 세계를 바라보듯이. 지나온 장소, 머무르는 장소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을 확장함과 동시에 한계 짓는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내려다보는 물 위의 풍경이 꽤 마음에 든다. 그래서 그 푸르고 목가적인 세상을 등지고 다시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이 두렵기도 하다. 늘 떠남을 꿈꾸지만, 익숙한 것에서 멀어지는 일은 어렵다. 생의 절반 이상을 지낸 곳을 벗어나 만나게 될 장소는 어떨까. 전혀 다른 풍경을 볼 수나 있을까. 내 안의 전경에 낯선 무엇이 들어올 수 있을까. 막연하지만 현재에 머무른 시간만큼의 시간이 지나 호수 위에 새로운 무엇이 덧입혀지기를 기대하며 갈 수밖에 없다. 나의 새로운 고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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