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24
안부부터 겉치레 인사, 위로와 격려의 말까지 밥을 넣어 표현할 수 있는 우리는 항상 먹는 일에 진심이다. 그곳이 손바닥만 한 소도시든 휴양지든 험지든 맛집부터 찾아내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
나는 식욕이 유독 왕성하거나 유명 식당의 대기를 30분 이상 참아내는 인내심을 가진 부류는 아니며, 입이 짧고 계절이나 컨디션마다 식욕이 돋기도, 입맛이 가시기도 하는 보통의 인간이다. 요리왕 비룡 못지않은 솜씨를 지닌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둔 덕에 특히 한식의 경우 맛집의 기준은 다소 높은 편이나 천연재료와 합성조미료를 구분할 정도의 뛰어나고 예민한 미각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철 따라 제철 음식을 먹고 맛집을 찾는 즐거움은 조금 아는 편이다. 향토적이고 어른스러운 입맛으로 가득한 집안에서 가장 초딩 입맛을 지녔지만, 간식과 패스트푸드, 디저트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빵의 경우 그냥 구운 식빵, 파운드케이크, 크루아상처럼 크림이나 속 재료 없이 단순한 형태를 선호한다.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건 알지만 기본형을 선호한다는 얘기다.
이 글은 중남미 여행에서 내게 장소의 매력을 플러스시켜 준 지극히 사적인 입맛과 취향에 따른 미식 기록이다. 과거의 맛집이 오늘날 쪽박집이 되고, 꼭 '맛'만이 맛있다의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며,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는 변했으므로 결코 추천의 글이 될 수 없음을 함께 적어둔다.
- 맛없는데 잘 먹고 다닌 쿠바
쿠바 음식은 다양성에서도 맛에서도 혹평받는다. 경제 제재로 부족한 물자의 영향도 있고 애초에 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역사 때문이기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경우 가장 잘 먹고 마신 나라는 쿠바였다. 흩날리는 쌀밥 위에 구운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덮고 옆에 감자튀김이나 오이, 토마토, 푸실푸실한 풀떼기 몇 개가 장식된 음식을 가장 많이 먹었는데 물론 예상 가능한 뻔한 맛이었으나 삼삼한 간이 꽤 잘 맞았다. (이걸 출레따(chuleta : 소금으로 간을 한 갈비구이)로 통칭해도 될지는 모호하다. 아바나를 벗어나서는 밥 옆에 육류 대신 생선구이가 자리하는 구성을 더 많이 먹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한 접시를 라이브 공연과 살사, 피아노 연주 등을 보면서 먹게 되니 청각과 시각이 미각을 압도해 버려서, 까사에서는 여행자들과 여행을 함께 곱씹으며 먹는 맛으로, 기억이 약간 미화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은 애초에 기대하지 말라는 와중에도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인정하는 것은 랑고스타(랍스터)와 다채로운 술이다. 맥주와 모히토와 다이키리와 칸찬차라와 쿠바리브레.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데 여기서 모히토와 다이키리를 신나게 마셨다.
- EMPANADA
엠빠나다(empanada)는 밀가루 반죽 안에 고기와 야채 속을 채워 굽거나 튀긴 만두 같은 음식으로 중남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간단히 먹기 좋은 일종의 고기파이다. 속 재료와 크기는 가게마다 제각각인데 특유의 반달 모양은 어디나 비슷했다. 아타카마에서는 파이를 먹듯 간식처럼 테이크아웃해 먹었고, 이스터섬에서는 손색없는 한 끼 식사로 칼질하며 먹었다. 이 흔한 음식을 나는 꽤나 좋아했던지 여행 책자나 구글에서 평점 높은 멋진 레스트로랑을 곳곳에서 안 간 게 아닌데 어째 엠빠나다, 노상의 감자크로켓 같은 음식이 더 기억에 남는다. 고급 입은 아닌 게 확실하다.
- 빈곤 속의 풍요 - 디저트
본고장에 뒤지지 않는 맛과 한 번 유행을 타면 다양한 변주로 끝을 보고야 마는 나라의 시민에게 남미에서의 커피와 디저트 선택지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적을수록 소중하달까, 되려 좁은 선택지가 편하기도 했고 트리니다드에서처럼 괜찮은 전문 카페가 돈페페 하나뿐이라면 그곳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루꾸마(lucuma) 프라푸치노처럼 페루에서만 파는 스타벅스 메뉴라고 하면 취향 생각 말고 일단 먹고 봐야 한다. 이렇게 멀리까지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
볼리비아 코파카바나는 정말 손바닥만 한 마을이고 트루차(송어구이)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지만, PIT STOP이라는 의외로 괜찮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라파즈 가는 버스표를 사고 들러 간만에 디저트 같은 디저트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얀 머랭 거품 모자를 쓴 귀여운 레몬크림치즈타르트 같은 것은 귀하다.
- 쿠스코
개인적으로 유럽의 주연 배우가 파리라면, 남미의 주연 배우는 쿠스코로 캐스팅하고 싶다.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이는 도시답게 맛집도 많다. 알파카 스테이크, 곱창, 버거, 펍, 산페드로 시장까지. 뷰도 맛도 분위기도 좋은 식당이 여럿이라 입 짧은 사람도 편안한 마음으로 며칠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감자종만 수천 종인 나라답게 사이드 감자튀김도 맛있고 서울의 핫플을 검색하듯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 한식은 고산병도 낫게 해
쿠스코에서 딱히 별로라고 느꼈던 음식도 간식도 없지만, 쿠스코에 오기 직전 고산병에 시달리고 다소 피로에 절어 있던 나는 한식을 먹고 나서야 다음 도시로 떠날 기운을 차린 듯하다. 내가 이민을 못 가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한식 때문일 거다. 한식을 사랑하는 나는 아플 때 더 절절하게 내 국적을 상기하며 엄마 음식을 그리워했다. 그럴 때 비교적 큰 도시의 한식당과 한인 민박의 소중한 한식 조식은 다시 여행하라며 내 등을 토닥여줬다. 배낭여행자들의 칸쿤인 멕시코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장기 여행 중인 분들께 대접받은 닭볶음탕도 잊을 수 없다.
번외로 일식이나 베트남 음식 등이 훌륭한 한식 대용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구 반대까지 날아가면 동아시아는 역사적 앙금을 잠시 잊고 위아더월드의 내적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데,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일식은 느끼하고 낯선 향료가 질릴 때 입맛을 한 번 돋워준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잔뜩 쫄면서 평점 높은 일식당을 찾아 야무지게 우동을 후루룩했었고, 현지인도 많이 찾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이공도 소고기 못지않게 맛있었던 기억이다.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