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 여행 27

by 무재

파란 바다를 담은 사진을 보면 눈이 시원해진다. 제주, 속초, 동해를 담은 사진들. 혹은 호주나 아이슬란드 같은 곳. 하얗거나 초록이거나 검게 푸른 선이 몇 개 그어진 단순한 구도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고 파도 소리가 출렁인다. 그곳의 햇볕이 지금 내 머리 위에도 내리쬐는 것 같다. 버석한 모래 위에 서 있는 내 눈에도 파란 물결이 들이치는 것만 같다. 바다는 모든 것을 안아준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이성과 감성, 수만 갈래의 감정.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킨다. 우리가 위로받고 떠받드는 수많은 책에서,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에게서 그 무한의 깊이와 넓이는 공허가 되고 절대가 되고 자유가 된다. 그 시린 푸름과 빛의 장난은 갖가지 아름다움과 경이로, 또 한계로 치환된다.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바다는 온몸으로 달려들어 모든 것을 가져간다. 바다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탈탈 털어버릴 수 있는 장소다. 비움과 망각과 이해의 장소다.


그곳은 강원도, 동해안의 어느 도시였을 것이다. 강릉, 묵호, 정동진 같은. 겨울 바다는 성난 짐승처럼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으르렁대거나 날카로운 바람에 찔려 시퍼런 몸을 뒤척였다. 그 거대한 움직임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한다. 나는 어느 작은 카페 구석에 앉아 그 요동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가장자리에 아지랑이 같은 김이 서린 큰 창은 차갑고 카페는 고요하다. 끝없고 위압적인 수평이 작은 공간 안에 숨은 그보다 더 작은 사람을 보듬는 것은 이렇게 간단하다. 거칠고 시끄러운 저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날카로운 감정들이 무뎌진다. 이따금 나는 의미 없는 말을 끄적거렸다. 지금 들리는 노래 가사나 의미 없는 낙서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망망대해 앞에서 지금 이 공간의 따스함에 기대어 긴 겨울의 하루를 보냈다. 그것은 위로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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