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절되고 싶거나 연결되고 싶거나
자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제각각이고 일터에서, 모임에서 우리의 공통분모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의 사적인 생각과 성향은 전혀 다른 법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지식의 구멍이 있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분야를 깊이 알아도 어떤 것에는 몇 마디 덧붙이기도 어려우니까.
가끔은 겉만 도는 대화가, 빙그르르 에두르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려 도돌이표가 되고, 의미 없는 단어만 남발인 대화가, 그래서 도대체 뭐 어쩌라고 싶은 얕은 생각이 참을 수 없어진다. 저만큼 가지도 못할 거 왜 이런 주제로 말을 꺼냈나, 본인 의견 하나 없이 금붕어처럼 뻐끔댈 뿐인 사람들 앞에서 무력해지고 시간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혼자 앞서 나가면 분명 후회하게 된다. 굳이 그럴 것 없는 사이에 감정적이었던 게 아닌가, 선 넘은 게 아닌가, 나에 대한 곡해만 마일리지처럼 쌓은 게 아닌가 싶어 진다. 후회는 밀물처럼 반드시 돌아와서 뒤끝 있는 내가 싫어지고 멍청한 타인은 더 싫어지고 알고 싶은 마음과 의지는 그만큼 사그라든다. 매일의 대화는 이런 일을 반복하게 한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자의든 타의든 매일의 대화 몫이 건네지고 우리는 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연결되니까. 가끔은 스몰톡조차 매끄럽지 않다. 무례한 손을 길게 뻗어 아무렇지 않게 내 구역을 침범하는 이는 당황스럽고, 이쯤이면 너도 하나 꺼낼만한데 한 번을 내주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상대는 괘씸하다. 작은 에피소드, 소소한 웃음과 경험 하나 꺼내지 못하는 상대에겐 불공평함을 느낀다. 그러면 상대는 그를 위한 광대가 된 기분이 든다. 비약이지만. 관심사가 지나치게 치우쳐 있거나 한 가지 이야기밖에 떠들지 못하는 사람 앞에선 내심 한심하다가 어쩌면 내가 그 정도 대화 상대밖에 안 되나 보다 싶어 진다. 그의 분류에서 나는 이 정도 위치여서 기승전 X로 반복되는 이 이야기 고리를 계속 타고 있다는 상상.
자신만이 옳고 확고한 이도 있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맞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 망설이는 말, 은폐한 생각, 본의 아니게 왜곡된 전달도 있다. 그 모든 게 지긋지긋하고 참을 수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 그러려니
금방 허무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은 상대도 내게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겠지. 어렵고 음흉하다고, 때로 가볍다고, 저만 아는 척 허세라고, 뜬구름을 잡는다고 등등.
그러니 더욱 자만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덕목인 불완전함을 상기해야지. 내가 가진 지식의 공백과 비합리성과 아집을 곱씹어야지. 거울을 보듯 상대를 바라보고, 내가 모르는 그의 가능성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내가 중요해져도 긴장하지 않고, 하찮아져도 서운해지지 않도록 그런 가능성을 전제할 것이다. 때론 쉽게 포기하게 되고 불쑥 화가 치솟겠지만 그 불을 끌 소화기를 늘 한편에 구비해 둘 것이다.
사금을 걸러내듯 흔하디 흔한 수많은 대화 속에서 가끔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뜻하지 않게 위로받게 될 수도 있다. 사금 채취가 목적은 아니지만 그런 선물은 종종 찾아오니까. 과한 의미 부여를 하지 말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훌훌 털어버리고 싶다. 너무 다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먼저 드러내는 연습도 필요하다. 약간은 흐트러지고 스스럼없어져도 좋다는 마음, 누군가가 나를 싫어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갖고 싶다.
이렇게 놓자, 다잡자, 이해하자, 솔직하자 되새길 만큼 대화를 원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 걸지 않으면 좋겠다는 태도 뒤에 실은 타인의 인생을, 나와 다른 일상을 듣고 싶다. 먹고 여행하고 사랑하고 일하는 그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한 꺼풀 벗겨내면 보이는 놀라운 생각과 일면을 보고 싶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것과 다른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 또는 겉으로 판단한 그것과 놀랍도록 닮아서 안도하거나 실망하고 싶다. 그러니, 그러기 위해서 포기할 줄도 마음을 열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가진 조건과 한계를 자꾸 넘으려 하고 고정관념의 줄을 느슨하게 풀어야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정과 비밀스러운 자아가 있다. 내가 그러하듯 재잘거리고 싶은 자랑과 유배 보내고 싶은 수치가 동시에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보여주고, 드러내고 싶은 만큼만 드러낸다. 이 의미 없고 어제도 들은 가십을 떠드는 이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꿈을 꾸고 있음을 그래서 떠올린다. 다섯 손가락으로 세어지는 소재만을 가진 것 같은 이가 한편으로 엄청난 사랑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린다. 그러면 짜증이 줄어들고 눈앞의 사람을 몇 그램이라도 더 좋아할 수 있게 된다. 각자의 슬픔만 끌어안고 각자의 한계만 걷는 우리를 애처롭게 보게 된다.
나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싶다. 그 페르소나들을 꽁꽁 숨겨두고 싶은 한편, 누군가에겐 비밀 얘기를
나누듯 속삭여주고 싶다. 또 누군가의 페르소나를 목격하고 그의 사적인 컬렉션을 조심스레 구경하고 싶기도 하다. 듣고 싶고 연결되고 싶다. 사실은 늘 그렇다.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