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의미와 죽음의 거리
우리가 살면서 수행하는 다른 역할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하나의 역할극이다. 거북한 생각이긴 하다.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면 그 어느 때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죽어갈 때 혼자이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지만 어디선가, 누군가는 죽음에 대해 독창적인 말을 해줬으면 하는 것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가족
사랑
옳은 일을 하는 것.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긍정적인 마음으로 꿈을 좇는 것.
삶의 의미는 삶이 끝난다는 것이죠. 물론 그 답을 생각해 낸 건 작가일 거예요. 당연히 그 작가는 카프카겠죠.
하지만 질문은 당신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거예요.
끝난다는 것이라고요. 카프카가 말했듯이요.
시그리드 누네즈 - <어떻게 지내요> 중에서
죄책감 드는 생각이지만, 갑자기 내가 죽어버리면 하는 상상을 종종 하게 된다. 걷어 차이게 흔한 주변인의 불행을 듣거나 어이없고 황망한 죽음들을 뉴스로 접할 때, 홀로 끙끙 앓던 어느 깊은 밤에, 한 번씩 그냥 삶이란 게 지긋지긋하고 그러지 말자 해도 아무 의미를 모르겠을 때, 결정적인 낙심이나 위기가 없어도 죽음을 상상하게 된다. 언젠가 죽을 것이란 사실은 확고하고, 디스토피아적으로밖에 그려지지 않는 근미래에 나는 홀로 또는 누구와 어떻게 죽음 앞에 서 있을지를 그려본다. 옆에 누가 있건 마지막은 고독할 것이니 떠들썩하긴 바라지 않지만, 너무 많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또 그런 상상도 해본다. 어느 날 시한부의 운명을 받아 들게 되면, 영화 Me Before You의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같은. 죽음은 죽음 자체보다 언제, 어떻게를 상정할 수 없는 불확실함의 공포 같다. 삶에 충실하다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죽음은 두려움이 될까, 아니면 되려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결말이 될까. 나는 삶의 의미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넘어서는 의미도 비전도 없었고 그런 것이 모두에게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너무나 개별적인 무엇이 아닐까. 크기나 양으로 재단될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들이 개별적인 방식으로 보편적인 사회에서 은밀하게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언젠가는 삶이 끝난다는 필연 또한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예행연습, 국가대표 선수가 시합 전 자신의 동작과 시퀀스를 그려보는 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역시 두려운 건, 미처 나의 허물과 과오를 정리하지 못할까 봐, 그 짧은 시간조차 없을까 봐서다. 죽는 마당에 수치심이 다 무엇이랴 싶지만, 그런 미래를 상상하면 살아있는 나는 충분히 부끄럽다.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망가지는 일도, 아무런 얼굴도 시간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두렵다.
죽고 싶다고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 잘 살아내고 싶고 허탈하게 무너지고 싶지 않고, 내 앞에 수많은 생의 갈래가 있음을 믿고 있다. 아직 걷지 못한 길들을 갈 것이다. 다만 어이없게도 한 번씩 오래 전의 친구를 떠올리듯 죽음을 떠올린다. 동시에 허무해하면서 망각하면서. 죽음을 목격하고 떠올리며 생을 다잡는 일은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는 늘 끝을 상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