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오늘의 내가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by 무재

어쩌면 습관적으로 밖으로 손을 뻗어 더듬었던 것 같다. 관성적으로 답은 저 너머에 있을 것이라 단정 지었을 수도 있다. 무엇의 해결인지 모르겠지만 그 열쇠는 저 멀리 있는데, 반복되는 일상을 걷어찰 용기는 없고 현실이란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와 순응을 양손에 잡고 오는 법이므로. 내 안의 안갯속 같은 답답함, 상실감,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슬픔 같은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을 찢고 나가야만 해소되리라 막연히 단정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멋지게 살아가는 주변인이, 많은 예술가가 모두 넓은 세계를 경험했던 것만은 아니다. 넓은 세계는 필요하지만, 필요로 하는 크기가 제각각 다를 수 있고 좁은 현실 속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자신만의 무엇을 쌓아가는 이들은 존재했다. 지긋지긋한 현실에 불평을 쏟아내면서도,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을 종종 느끼면서도, 권태와 무력감 속에서도 꾸역꾸역 하루치의 일상을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있다. 그 수많은 '나'들이 어딘지 모를 저 멀리서만 답을 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걸 자각하면 밖으로만 뻗는 손이 조금 멋쩍어진다.

하루치의 일, 내게 주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다른 내가 되는 일은 다른 말과 다른 사람과 장소가 필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어제와 결별하고 방향을 틀 줄 알아야만 가능하다고. 다른 내가 되지 않아도 덜 아플 수 있진 않을까. 덜 혼란스럽고 더 담담하고 매끄럽게 오늘을 받아들일 수 있진 않을까. 불만으로 투덜대고 회의감에 젖은 마음을 안고도 매일의 회반죽을 젓고 오늘의 그림을 그려내는 대가의 투박한 손처럼. 어떤 의미도 생각도 밀어 두고 한 땀 한 땀 형태를 갖춰갈 뿐인 바느질처럼. 그저 오늘을 살아내고 그 오늘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런 손을 떠올리면 나도 내 차가운 손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의미 없다 자책하는 일상을 토닥여주고 싶어 진다. 걸음을 떼고 멀리 나가야지만 발견하게 되는 세상이 있다. 내가 아는 세상을 벌리고 넓힐수록 최후의 후회가 줄어들 것을 믿는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의 내가 오늘의 일을 하면서도 괜찮은 내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상실과 번민을 구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손. 그것을 위대한 예술가들이 증언해 주는 듯하다. 비록 나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일 제곱미터, 아니 도화지 한 장도 위대한 결과로 채울 순 없겠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한 일을 통해 긴 슬픔을 스스로 걸어 나온 이 책의 화자처럼 말이다.


바로 의미라는 것은 늘 지역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피렌체, 심지어 미켈란젤로 시대의 로마마저 이런 면에서는 로레타 페트웨이가 살던 시절의 지스 벤드와 다르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 같은 개념을 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 - 페트릭 브링리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중에서 -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매일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