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 공산성과 궁남지

# 여행 28

by 무재

무령로 - 왕릉로 - 신관로, 무려 부흥주유소. 백제로 굴러간다, 이 고장은. 찬란했던 웅진, 사비 시대는 애초에 지나갔지만, 그 후손에 후손들은 여전히 그 시대에 기대어 먹고 일하고 여행한다.

푹푹 찌는 한여름. 공주, 부여를 여행하며 느낀 첫인상은 각 도읍을 대표하는 무령왕, 성왕의 흔적이 아닌 너무나 길고 길던 버스 배차 간격이었다. 제주, 부산, 강릉같이 사람들이 훨씬 많이 찾는 지방 도시들과도 또 다른 시간 감이다. 훨씬 느리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따가운 열기 아래 버티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게 되는 순간들이 생긴다.

농협이 있고 때때로 장이 서는 시장 중심가는 얕은 활기가 돌지만, 시장 자체도 나이가 들어버린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난다. 쇠락해 가는 지방의 거리는 마치 한 사람이 찍어 놓은 듯 죄다 생긴 모양이 비슷비슷하다. 빛바래 테두리만 허옇게 남은 간판과 빠지지 않는 스포츠 브랜드들, 이런 시장에 꼭 있는 여성복 매장, 백제를 요리조리 조합해 딴 음식점 이름들, 연령대 높은 주민들. 유서 깊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의 도시여도 그곳이 저 아래 떨어져 있다면 우리 정부는 관심이 없구나를 여지없이 느끼게 된다. 서울과 수도권이 크기를 넓히고 더 화려해질수록, 자신이 엮인 불행과 위기가 아니면 사람들은 참 무심하고 좀처럼 내다보질 않는다. 그런 씁쓸함을 박물관에서 시장 쪽으로, 거대한 무령왕 동상이 손을 뻗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으면서 느꼈다. 물론 소멸해 가는 쓸쓸함이 다인 것은 아니다. 이미 소멸한 과거의 부침과 영광은 역설적으로 이 고장들을 빛나게 하는 유일한 무엇이다.


공주 공산성에는 해가 저물 때쯤 숨어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총둘레가 2660M나 된다고 하니 반의반 정도만 돌아볼 뿐이지만 흙빛 섞인 잔잔한 금강을 내려다보며 성곽을 따라 걷는 산책이 힐링 자체다. 둘씩, 셋씩 앉아 드디어 선선해지는 여름 공기를 쐬고 따스한 물빛을 바라보고 공처럼 말린 구름을 올려다보고, 그 모두를 삼국 시대의 산성이 둥글게 감싸 안는 이 풍경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함과 위안을 준다. 용맹한 우리의 진묘수가 그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무덤을 지켰듯 든든한 마음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인 궁남지는 백제 무왕 시기보다 훨씬 축소된 규모라는데도 거대하다. 여름의 끝자락 8월에도 수련과 늦은 연꽃이 군데군데 보인다. 빽빽한 연잎과 늘어진 버드나무의 짙은 초록은 약간 흐릿한 날씨에도 한창때의 푸릇한 빛을 발산한다. 지베르니에 가 본 적이 없어도 모네의 그림이 절로 연상되고 결코 그곳의 풍경보다 덜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게 여름은 파란 바다보다 빽빽하여 어지러운 숲과 이리저리 휘날리는 초록이다. 숨 막히는 열기 속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건네는 이 초록이, 사람이 만든 것은 노쇠해도 먼 과거로부터 한 자리를 지켜온 자연은, 그 공간을 남긴 역사는 여전히 이렇게 생생한 오늘의 여름을 만끽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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