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라노 게이치로 - 나란 무엇인가
내가 보는 나와 가족이 아는 나와 친구 또는 연인이 안 다고 믿는 나와 어쩌다 스친 남이 보는 나. 어린 시절을 공유한 이가 기억하는 나와 지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타인이 아는 나와 나를 잘 안다고 믿는 사람이 보는 나. 그 모두가 정말 나일 수 있을까? 때로는 그 모두가 나인 듯싶고, 그 모두에 나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나이고 싶은 나는 내 상상이나 어떤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렇게 피부에 닿고 움직이고 먹고 쓰는 나는 누구일까.
일상을 살아가는 나는 물론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점점 내가 아닐 때가 많아진다. 내 생각과 다른 단어와 문장이 자주 튀어 나가고 나와 거리가 먼 나를 타인이 규정하도록 만든다. 오해받는 나, 일그러진 나로 생각하게끔 만든다. 그건 무서운 일이지만 어쩌면 그게 나일 수도 있는 일일까.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진짜인 내가 이 생각의 그물 속에 어디쯤 걸려 있는지 나조차도 잊어버린다. 내가 그렇다고 여겨온 나와 실제로 행동하는 나와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 판단하는 나 중에 실재는 무엇일까. 스스로의 확신만으로 자신이 규정될 수 있을까. 수많은 나 사이의 간극과 거기서 갈팡질팡하고 간극을 좁히려 허둥대며 설치는 나는 또 누구일까?
아주 오래된 질문에 대한 대답 같은 책.
인간에게는 몇 가지 얼굴이 있다. 상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내가 된다. 그것은 전혀 꺼림칙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나는 나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성가신 존재로 여겨질 뿐이고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은 절대로 유일무이한(분할 불가능한) 개인이 아니다. 복수의(분할 가능한) 분인이다. 인간이 언제나 수미일관하며 나눌 수 없는 존재라면, 실제로는 여러 얼굴이 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 그 모순을 해소시키려면 자아는 하나뿐이며, 나머지는 표면적으로 그때그때 활용하는 캐릭터나 가면, 페르소나에 불과하다고 가치의 서열을 매길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자기의 전부가 좋다는 말은 좀처럼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개와 함께 있을 때의 나(분인)는 좋다는 말은 의외로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다른 아무개와 있을 때의 나는 싫다는 말도. 그래서 만약 좋아하는 분인이 하나든 둘이든 있다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살아가면 된다. 그것은 꼭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분인이 좋다는 사고방식은 한드시 한번은 타자를 경유한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가 불가결하다는 역설이야말로 분인주의의 자기 긍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