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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Dec 16. 2021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30)

약속을 받아내다 / 선악과를 만지면 안 돼

5월 23일

# 약속을 받아내다


지퍼 달린 잠옷이 빨고 없을 때 시아버지가 또 기저귀를 찢었다. 침대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었다. 앤디가 짜증이 나서 소리를 질렀고 간호원이 아침에 간 침대보를 또 갈아야 했다. 그리고 저녁나절에 또 기저귀를 찢어 침대보를 또 갈아야 했다. 빨랫감도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궁리를 해서 기저귀 찢는 시아버지의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거의 어떤 문제에 있어서나 답을 찾아야 하는데 답을 찾다 보면 답은 대개는 찾아지는 법이다. 이번에는 아버지 수준에 맞춰서 연기를 해 시아버지 기저귀 찢는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 "오늘 아버지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기저귀를 자꾸 찢는 것은 기저귀를 싫어한단 표시잖아요? 기저귀를 싫어하면 문제없어요. 그러면 기저귀를 다시는 안차면 되잖아요. 그렇게 기저귀를 증오하신다면 말이에요. 그런데 기저귀를 안차면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떻게 하지요? 안 드려야죠, 뭐"

나는 아버지 잠옷 바지 속에서 찢어져 삼분의 이만 남은 기저귀를 빼내고 잠옷 바지만 입혔다 장롱에서 오래된 촌스런 꽃무늬가 있는 것과 줄무늬가 쳐진 잘 접힌 빳빳한 수건, 시어머니 때부터 쓰던 것들을 넉넉하게 일곱 개 내지 여덟 개를 꺼내 시아버지 손이 쉽게 닿는 침대 가장자리에 놨다. 

나: "용변을 보려면 기저귀 대신 수건을 사용하세요. 이제는 정말 갈 때까지 간 거예요. 기저귀는 절대로 안 드릴게요"

시아버지가 나를 놀란 토끼가 쳐다보는듯한다. 내가 이렇게 까지 나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앤디도 조금은 놀라고 자기 아버지가 안쓰러워서인지 눈빛으로 너무하지 않냐는 신호를 보내고 새 기저귀를 손에 들고 갈아 드리자고 했다. 그러자 시아 버진 나와 자기 아들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모른다. 내가 연극하는 게 조금 지나쳤나 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나도 소리나 지르고 속 알갱이가 없이 다 받아 주면 시아버지가 우리를 계속해서 버릇없는 아이처럼 힘들게 할 것이 뻔하다. 지금도 힘든데 앞으로 점점 더 해지면 어떻게 같이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악역은 내가 맡았지만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해낼 자신이 있다. 드라마를 보면 언제나 선한 사람 따로, 악한 사람 따로다. 선한 사람만 나오는 그래서 모든 게 순탄한 줄거리의 드라마는 시청률이 높지 않고 이야깃거리가 없다. 배우는 게 없고, 삶에는 높낮이가 있기 마련인데, 높낮이가 없어 지루하니까! 그러니 내가 악역을 맞는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아버지가 뭔가 배우고 아버지의 못된 버릇을 고칠 수만 있으면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면 나는 만족이다. 이 순간 그보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 "앤디, 안돼. 아버지 기저귀를 드리면 안 돼. 보면 몰라! 아버지 기저귀 싫어하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기저귀를 안 찢고 가만히 두겠지. 그러니 저기 기저귀들은 박스 전부 내일 돌려보내요"
그리고 우리는 응접실로 갔다. 일분도 채 안돼 아버지가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 이름을 번갈아가며 불렀다. 
시아버지: "앤디, 앤디 , 기옥, 기옥, 앤디, 기옥, 기옥"
우리: "왜 그러세요? 아버지"
시아버지: "나를 용서해! 나를 용서해! 나 앞으로는 절대로 기저귀를 안 찢을게"
나 : "정말이에요?"
시아버지: "그럼 정말이고 말고 내가 약속할게"
나: "그럼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약속하세요"
시아버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아버지는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 때 손을 들고 선서하듯 오른손을 치켜들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한다. 결의가 대단하다} "나 앞으로는 절대로 기저귀를 안 찢을게!"
나: "그럼 알았어요. 이제 기저귀를 드리죠"

머릿속에 입력이 돼야 할 것 같아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약속하라고 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글쎄 아버지의 약속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지만 그동안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처음으로 받아 냈으니 일차는 성공한 셈이다. 약속을 지킬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아버지의 표정이 꽤 심각한 것으로 봐서 내 연극이 성공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른이 기저귀를 찬다는 게 불편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뭔가 수치심? 같은 게 들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경우 기저귀 없으면 허전하고 더 못 살 것 같을 것이다. 시아버지의 제일의 관심사는 기저귀이고 제일 마지막 관심사도 기저귀이다. 하루 종일 기저귀 얘기만 한다. 다른 화젯거리는 없이 기저귀 얘기만 하자는데 그 성스럽기까지 한 기저귀를 뺏으니 허전해 발가벗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나 보다. 어쨌든 쇼크를 먹은 것이 틀림없다. 기저귀를 차 드리고 나서 

나: "뭐 드실래요?"
시아버지: "나 먹는 것 안 준대매?"
나: "먹고 마시는 것을 드리고 말고요. 이젠 기저귀를 차고 계시잖아요. 다음에 또 기저귀를 찢으면 기저귀 없이 누워 있게 할 거예요. 그러기를 원하세요?"
시아버지: "아니!"

아버지는 내가 한 말의 뜻과 문맥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그러니 이런 연극도 하지 , 유감스럽지만 아버지에게는 신사적으로 설명만 해서는 안되고 아이들에게 처럼 직접 피부로 느끼고 몸에 와닿게 해야 이해가 가는 모양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불쌍한 우리 시아버지 매정해야만 하는 나를 용서하세요., 하지만 이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당신을 집에서 모실 수가 없거든요 , 너무 힘들면 포기하게 될 것 같아서요.  


5월 26일

# 선악과를 만지면 안 돼

  

사일째 시아버지는 기저귀에 손을 안 댔다. 어쩌다 손이 기저귀로 가면 애써 얼른 손을 치우고 다른 것을 만지며  

시아버지: "나 기저귀 만지면 안 돼"

성서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악과를 만져서도 안 된다고 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우리가 기저귀를 찢지 말라고 했지 기저귀를 만져서도 안 된다고 한적은 없는데 기저귀를 만져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하긴 만지는 습관이 없으면 찢는 일은 더더욱 없을 테니 좋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일 몇 번씩 기저귀를 찢으면 어떻게 되는가 설명하고 남아일언 중천금이란 한국의 속담을 인용해가며 남자가 약속하면 지키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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