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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Dec 16. 2021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31)

내가 나빠

5월 30일

# 내가 나빠

  

시아버지가 기저귀를 안 찢겠다고 약속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오후에 엘리 할머니가 가게로 내게 전화를 했다. 심각한 목소리로 

엘리: "내 말 좀 들어봐, 네 시아버지가 기저귀를 찢어 발가벗은 채로 누워 있어, 짜증이 잔뜩 나서 안돼, 안돼, 소리만 연거 퍼하고 있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 "당신이 어떻게 하겠어요? 간호원이 곧 오니까 괜찮아요"
오후 여섯 시에 내가 집에 오니 시아버지는 연신 나를 힐끗힐끗 보며 아무 말이 없다. 
나: "기저귀를 또 찢으셨다고요? 우리가 뭐가 나쁘고 부족해서 우리를 화나게 하고 일거리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시아버지: "나 잘 알아 내가 나빠"
나: "그럼 우리가 당신한테 어떻게 해야겠어요?"
시아버지: "목을 잘라버려!"
손을 두 번씩이나 목에 갖다 대며 목을 자르는 흉내를 낸다. 
나: "목을 자르는 것보다 당신이 기저귀를 안 찢는 게 더 간단하지 않아요? 그럼 수건을 드리도록 할게요"
시아버지: "{깜짝 놀라며, 너무나도 강경하게} "나 수건 필요 없어!"
나: "그럼 기저귀가 필요해요?"
시아버지: "응"
나: "그럼 기저귀를 다음부터 찢지 않도록 하세요. 약속하실 수 있어요?"
시아버지: "그래 약속할게!"
시아버지: "나 앞으로 절대로 기저귀 안 찢을게"
나: "약속하셨으면 됐어요. 다음에 또 기저귀를 찢으면 기저귀 박스 돌려보낸다는 것 알고 계시죠?"

어린아이에게나 어린아이가 된 노인에게나 반복하는 게 최고의 교육방법이다.

삼십 분이 지나고 서로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나: "왜 기저귀를 찢었어요? 우리를 많이 불렀어요?"
시아버지: "응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잖아, 그래서 죽으려고 작정을 했지"
나: " 겁이 났었어요?"
시아버지: "응"

혼자는 오분도 안 있으려 하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언제나 이십사 시간 누군가 아버지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은 무리이다. 너무 겁이 나서 죽고 싶어서 될 대로 되란 마음으로 기저귀를 찢은 것이라고 해서 슬펐고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기저귀를 만지지도 않고 단 한 번도 기저귀를 찢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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