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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Dec 27. 2021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47)

발음 연습

7월 25일


시아버지가 말을 넨 넨넨 바바 바바 부정확하게 하며 밤새도록 2분이나 3분 정도 잠이 드는가 하면 또 깨어나서 뜻이 없는 소리만 되풀이 해 나는 한잠도 자지 못 하고 밤을 새웠다.  


7월 26일


나는 하루 종일 몹시 피곤해 오후에 집에 들어와 잠을 청했지만 시아버지의 이유모를 소음 공세는 여전했다. 진정제를 줬지만 약 효과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엘리 할머니: "말을 천천히 해봐요"

시아버지: "당신들 말은 잘해 안 돼는걸 어떻게 해, 내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아?"

밤새 혼자 얘기하고 나서인지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나: "누구랑 얘기하세요?"

시아버지: "나 혼자 그냥 얘기하는 거야"

나: "좋은 일 아님 나쁜 일?"

시아버지: "좋은 일"  


7월 28일  
나: "당신 오늘 조용하고 착하네요"
시아버지: "나도 맘만 먹으면 착해!"
나: "몇 살이에요?"
시아버지: "40살"
나: "나는 몇 살이고요?"
시아버지: "너는 32살"
나 : "어머나! 그럼 당신하고 나하고는 8살 밖에 차이가 안 나네요, 그리고 내가 어디서 왔죠?"
시아버지: "한국"
나 : "내 이름이 뭐예요?"
시아버지: "너는 기옥이지"
나: "잘 알아맞혔어요. '한스'할아버지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몰라요. 얼마 전에는 저더러 중국 여자라고 하지 뭐예요. 그 '한스'할아버지가 옛날엔 저만 보면 한국 한국 하며 한 얘기를 자꾸 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지금은 제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저더러 제 이름이 릴로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당신은 한스 할아버지보다 훨씬 똑똑해서 자랑스러워요. 그러니 머리를 쓰다듬을게요"

시아버지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 표정이 밝아진다. 순진한 병든 사람 사기라도 돋궈줘야지 속상하고 기분 나쁘고 슬퍼서 어디 살맛이 날까? 그래서 병들어 우리 시아버지보다 머리가 좀 더 나빠진 한스 할아버지와 비교해 칭찬해 준다. 속으로 '불쌍한 한스 씨 당신을 팔아서 미안합니다' 하면서 말이다.

시아버지 발음이 점점 나빠져 발음 연습을 하기 위해 우리가 아는 사람들 이름을 말하고 따라 하게 했다. 

나: "페트라 네링"
시아버지: "페트라 네링"
나: "카린 휘셔"
시아버지: "카린 휘셔"
나: "만후렡 부루벨 라이트"
시아버지: "안 해, 안 해, 그 이름은 안 해"
나: "왜요?"
시아버지: "그 남자가 나를 악을 올렸어!"
나: "아 참! 그 남자가 아버지 잠을 못 자게 침대를 올렸다 내렸다 했지요. 그럼 다른 사람 이름을 말해보죠. 헬뭍 크렙스"
시아버지: "그 사람 이름도 말 안 해"
나: "왜요?" 
시아버지: "난 그 남자가 싫어!"

시아버지는 건강할 때도 좋고 싫은 게 분명한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병든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이름도 안 부르겠다니 놀랍고 한편으론 유치하지만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기로 하였다. 그나마 연습하는데 재미를 잃을까 봐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 이름이라도 따라 해 주면 고마워하며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름만 계속 반복하며 연습을 했다. 

저녁에 아버지는 나를 자주 부른다. 

나: "왜 부르셨어요?"
시아버지: "그냥!"
나: "아무 이유도 없이요?"
시아버지: "응, 이유도 없이"
나: "그럼 좋아요.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저 하고 싶은 대로 할래요. 당신이 저를 다섯 번 부르면 한번 올게요"
시아버지: "그러는 것은 공평하지 않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배짱 좋고 솔직하면 어떤 때는 손해를 보는 법이지요,라고 말하면서 언제나 누군가를 부를 이유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던 이 가 오늘은 웬일인지 뭔가 이유를 생각하려 하지 않고 솔직 담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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