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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Apr 25. 2021

 [ 9만원 유홍준 ]

생애 첫 원고료는 9만 원이었습니다
정확히는 10만원에서 세금을 제한 9만 얼마였죠

대학 다닐 때
도서관 한 벽면에
독서 감상문을 모집한다는 안내문이 있더군요
텅 비어 있는 이력서에
수상 경력 한 줄 넣을 심산이었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한 귀퉁이에 있어
응모작이 적을 테고
그래서 어쩌면 상 하나
받을 수 있겠다 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리곤 며칠 뒤,
전혀 모르는 다른 학과 교수님이
전화가 와선 저를 보자고 하시더군요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밝은 해가 들어오는 상담실 같은 곳이었고
거기에 두꺼비가 생각나는 교수님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인사를 마친 저에게 대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에
나오는 내용들을 물어보시더군요
독서감상문으로 썼던 책
희미하게 무슨 무덤에 대해
물어본 기억이 나고
몇 가지를 더 물어보시더라고요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물어본 질문에 제대로 답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때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테스트 였던 것이죠
감상문을 직접 쓴 게 맞는지,
어디서 베낀 건 아닌지 말입니다
상을 받고 나서야
두꺼비 교수님이
나름 검증을 하신거구나 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답변 하나 못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버버 하는 모습에
어디 베끼지도 못할 위인이구나 라고
생각하신 걸까요
결과는 최우수상

부총장장님께 불려가 두꺼운 남색 커버의
가로로 여닫을 수 있는 상장을 받고
대학 교지 편집부에서
교지에 싣는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원고료도 준다는 말과 함께 말이죠

수많은 책 중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고른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당시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였고
담백한 사학과라는 이름을 버리고
겉치장을 한껏 한 역사문화학과 학생으로
학과와 연관이 있는 책을 고르는 게
상을 받는데 유리할거라 생각했고
마지막으로 책이 재미있어서 였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술집 사장님께 바친 원고료와
이력서 한 줄을 채울 수 있게 해줬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그 책을 쓴, 유홍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독서감상문 모집 안내문을 보고 있던 대학생은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방송 작가가 돼 선생님을 섭외했습니다

회사에서 매년 1년 단위로 진행하는
강의 프로그램을 작년부터 맡게 됐는데
올해 첫 강의를 유홍준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강의 전까지
일정 등을 도와주는 연구원과 통화를 하면서
사소한 내용들을 조율하는데
팬심이 발동되더군요

강의가 열리는 호텔 측에 미리
선생님을 위해 식사를 부탁하면서
도착 시간이 언제이니
음식이 식지 않게 해달라고 하고
강의 도중에 드실 생수를 치우고
따뜻한 물을 단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는 연구원의 전화를 받고
마중을 나가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쁜 감정은 마주해도
설레는 감정은 좀처럼 느낄 수가 없는데
이 날은 설레더군요
내 생애 첫 원고료의 주인공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드리자
손을 내미시더군요
코로나 세상에
주먹을 쥔 채 부딪치자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편 채 말입니다
선생님과의 악수
'영광' 이라는 평생 쓰지도 않을 무거운 말이
가벼운 일상으로도 들어올 수 있더군요

가까이에서 본 유홍준 선생님은
요즘 말로 '찐' 이었습니다

저녁에 있을 강의 전에
울산박물관과 옹기박물관을
둘러보고 오셨더군요
박물관과 그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제자들도 볼 겸 말이죠
그리고 강의가 끝난 다음에는
다음 날 경주박물관에 간다고
하룻밤을 묵고 가셨습니다

제자 사랑도 남다르셨습니다
내빈들과의 자리 대신
제자들과의 식사를 요청하셨고
강의가 시작되고 얼마 안되서는
강의 도중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 미안합니다
제 제자들이 여기에 왔는데
밖에서 못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코로나로 인원 제한이 있어
수강자들의 결석이 있어야
제자들이 강의실로 들어올 수 있다고 했는데
듬성듬성한 자리를 보곤
그게 기억이 나셨던 겁니다

'9만원 교지'와 <화인열전1>을 내밀면서
사인과 사진을 요청드렸습니다
늘상 있는 일인 것처럼
붓펜을 꺼내시더니
거침없이 써내려가시더군요
멋들어진 꽃 그림과 함께


'아침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나팔꽃처럼'

선생님
빛나고 영롱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아침 나팔꽃처럼 살겠습니다
부지런히, 게으름 피우지 않고
먼 길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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