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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주니어 Oct 12. 2022

게으름쟁이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2)

2022년 9월 26일 ~ 30일 | 가장 많은 사례와 특이한 사례 하나

필자, 닌 누고?

필자를 소개하기 전 우리 회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보겠다. 한류의 뜨거운 바람이 전 세계를 강타하기 시작한 이후로, 세계 곳곳에는 K팝을 사랑하는 해외 팬들이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굿즈까지 소유하고자 하는 K팝에 "진심인" 팬들이 있는데, 해외 팬들에게는 회원가입과 각종 인증 절차 등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 때문에 이런 상품들을 구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 회사에서는 각종 이들이 원하는 상품을 대신 구매해주고, 여러 상품을 한 상자에 합쳐주는 등 효율적인 배송을 돕는다.


고객의 연령층은 주로 10대에서 20대로, 전편에서 말했듯 필자는 이들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도중 어떠한 문제가 생겼거나 불만을 제기할 때 이를 상담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상담직이라고 하면 주로 콜센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화 문의는 하루에 한 통 올까 말까한 수준이고 주로 우리 회사 사이트에 올라오는 문의글들에 답변을 작성한다. 매일 아침 눈을 부시시 뜰 때는 출근하기 귀찮다며 속으로 아우성을 지르기도 하고, 회사에서는 퇴근 시간만을 바라보며 컴퓨터 화면과 시계를 번갈아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다보면 거부감은커녕 오히려 은근히 적성에 맞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자면, 첫째, 전화보다는 글을 많이 쓰기 때문에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멘탈도 상당히 약한 편에 속한다. 만약 전화 문의가 쇄도했다면 필자는 입사한지 한달도 되지 않아 사직서를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로 된 문의에는 그런 게 없다. 물론 필자는 사소한 일에도 과몰입을 하는 경우가 있어, 글에서도 어느 정도의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기는 하다. 이따금 느낌표를 예닐곱개씩 써놓는다던지, 대놓고 공격적인 어휘를 사용한 글을 읽어볼 때가 있는데, 그런 글을 볼 때마다 고요하디 고요하던 작은 사무실 안에는 필자의 코웃음 소리가 울려퍼진다. 하지만 글이니까 코웃음 나오는 해프닝으로 끝났지, 수화기 너머로 그런 고객들을 한두명이라도 마주한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둘째, 글쓰기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필자는 말을 굉장히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어렸을 적 말을 너무 아무렇게나 하는 바람에 낭패를 본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어떤 문장을 입으로 내뱉기 전, 단어 선택이라던지 조사라던지 하는 것들을 아주 심각하고 민감하게 고민한다. 의미가 비슷하더라도 어떤 단어를 내뱉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조사로 말을 연결하느냐에 따라 그 문장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도 결국 사람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전까지 얼마든지 검토하고 수정할 수가 있다. 또한,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독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아서 그만큼 필력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무념무상적이면서도 솔직담백한 글을 써내려가는 걸 매우 좋아해왔기 때문에 일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셋째, 키보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래 친구 한 명 살지 않는 외로운 산골 속에서 필자에게 세상을 향한 유일한 창구는 컴퓨터였고, 어렸을 적 처음 컴퓨터라는 물건을 만질 때부터 아버지께 야단까지 맞아가며 타자를 배웠기 때문에 필자는 요즘 말로 "키보드워리어"가 되어버렸다. (악플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타자 대회를 했다 하면 최고상을 휩쓸기 일쑤였고, 컴퓨터 책상 앞을 폐인 수준으로 오래 앉아 있었던 필자의 이 특기는 계속 유지되어 상담글을 빠르게 처리하는 데에 크게 한몫하고 있다. 대신 솥뚜껑만한 손으로 볼펜을 오래 쥐고 있는다던지, 혹은 휴대폰으로 그 작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면 답답해서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처음 입사할 때는 적성에 안 맞더라도 일단 살고 보자는 우격다짐식 마인드로 들어갔던 지라 그만큼 긴장도 많이 됐지만, 막상 해보니 저 3가지 이유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적성에 많이 잘 맞아서 무리없이 잘 다니는 중이다. 직원 수가 적어서 그런지 직급은 있어도 그냥 동네 형이나 누나 만나러 가는 느낌이기도 하고, 필자의 서투른 대인능력 탓에 우스꽝스럽게도 군대마냥 "다나까체"를 쓰고 있지만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아주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다. 즉, 아직까지는 순탄하게 잘 살아있다.


밥값은 잘 하고 있나? - 9월 26일


먼저 필자가 고객들에게서 많이 받는 문의 유형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이 물건 배송 신청을 취소해달라던지, 혹은 배송사를 바꿔달라던지 하는 것들이다. 상기했듯 고객들 대부분이 10대라, 자기네들 나라에 무슨 배송사를 써야하는지도 모르고, 혹은 배송비가 왜 이리 비싼지 납득을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가지 상황을 들어보자. 독자 당신은 미국에 거주 중이고, 방탄소년단의 열렬한 팬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쇼핑몰 사이트로부터 앨범을 두 권 주문했다. 그리고 배송사도 대충 다 비슷하겠거니 하면서 아무거나 선택했다. 그런데 고작 그 앨범 두 권 주문한 걸 가지고 배송하는 데에 무려 10만원 가량의 비용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한 치의 의아함이나 불만도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제아무리 해외 배송이라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날도 역시 그런 문의가 상당히 많았고, 이런 문의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처리해왔던 것들이라 비업무 시간에 복습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손쉽게 처리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하루에 몇 건씩 특이한 문의가 들어오는데, 그럴 때의 내 반응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완전 처음 겪는 유형이라서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난감한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진 최대한 알아보고 난 뒤에 내 사수에게 여쭤보거나 바로 답글을 달아드린다. 두 번째 경우는 그래도 예전에 한 번 겪어봤던 유형인 데도 어떻게 대처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난감한 경우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필자는 섣부르게 답변을 곧바로 게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접하는 문의글마다 그것을 파일로 옮겨놓았고, 예전에 한 번 겪어봤다 싶은 유형이라면 그에 해당하는 키워드를 가진 파일을 검색해 해당 답변을 참조한다. 일종의 업무 일지인 셈이다. 집에만 도착했다하면 업무 공부할 생각 따위는 차가운 밤공기 중으로 날려버리는 필자에게는 이만큼 훌륭한 대안이 없다.


이날도 어김없이 특이한 문의가 하나 들어왔다. 상품을 주문해서 우리 회사 창고에 보관 중인 고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글쎄 본인의 남편과 우리 회사를 방문해서 그것들을 직접 다 가져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내용을 읽어보니 이미 3년 전에도 이런 적이 있으신 분이었고, 이 이야기를 들은 내 사수 역시 잘 알고 있다는 듯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런데 대략 3주 전에 이와 아주 흡사한 사례를 겪었던 것이 떠올랐다. 캘리포니아에 산다는 고객 한 명이 우리 회사에 직접 와서 그 많은 물건들을 직접 가져간 일이었다. 혼자서 몇 십개나 되는 크고 작은 물건들을 비닐 가방에 담고서는 그걸 택시 트렁크에 싣고 떠났던 일이 여전히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때 내가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떠올리며 답변을 작성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회사에서 단체로 출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 고객님께서 회사에 도착할 즈음엔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할 거라는 것과, 이벤트를 준비 중이니 한국에 온 김에 꼭 참여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밥값은 잘 하고 다니냐?

이것이 소심한 게으름쟁이가 하루하루 직장 생활을 이어나가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눈을 또랑또랑하게 빛내고 불타는 의지를 보여주며 입사를 했건만, 막상 기나긴 퇴근길을 거쳐 집에 돌아오면 씻고, 밥 먹고, 침대에 누워버리기 바쁘다. 어쩌다 한 번 업무 복습을 해볼까 하고 노트북을 켜도 30분 이상 가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이따금 실수로 일을 잘못 처리하면 안 그래도 필자 스스로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도 안 서는데, 나중에 재계약도 불발돼고 해고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설 때도 있다. 살얼음판을 걷는 하루살이 같은 직장 생활이라고나 할까.  (적어도 이번 사례만큼은 잊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필자에게 "네가 그 회사에서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필자는 당당하게 "YES"라고 답할 자신은 없다. 


업무 시간 동안만, 지시받은 일만 하고 집에 와서 피드백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필자 말고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어떤 곳보다 편해야할 집에서 업무 생각을 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앞서 필자는 상담직은 회사에서 실시하는 모든 서비스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필자나 독자 여러분들이나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다가 불편한 점이나 궁금한 사항이 생기면 고객센터에 글을 올리거나 전화를 건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상담원들은 그 어떤 까다로운 질문에도 단 한 차례의 막힘도 없이 고객의 문의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세간에 상담직이라는 업무가 저평가될 때가 있는 경우를 생각하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난감한 질문에도 정확하게, 그것도 매번 친절하게 고객을 응대해야하니 그야말로 "회사의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독자 여러분이 천재가 아니라면, 필히 업무를 따로이 공부하는 것을 추천드리고 싶다. 하지만 필자 같이 천성부터 게을러먹었다면? 필자가 업무 일지를 작성한 것과 같이 따로이 대안이라도 준비해놓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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