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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주니어 Oct 12. 2022

게으름쟁이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3)

2022년 10월 7일 | 게으름쟁이에게도 열정은 있다

열정, 열정, 열정! (출처 : 피식대학 한사랑산악회)

회사에서 준비하고 있는 이벤트가 있어서 주 업무 처리하랴, 행사 준비하랴 바쁜 날이었다. 결국 이는 야근으로까지 이어졌다. 필자의 업무는 당연히 고객 상담지만, 어디까지나 주 업무일 뿐 다른 업무도 있다. 직원 수가 그렇게 많은 게 아니기 때문에 대표님으로부터 직접 별도의 지시가 내려올 때가 잦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물류창고에는 많은 폐기 물품들이 있는데, 고객님들이 우리 회사로 물건을 주문해놓고 배송 신청을 안 해서 방치된 것들이다. 물건값도 보통이 아닐 텐데 필자의 입사일 훨씬 이전부터 어마어마하게 쌓여온 이 폐기 물품들을 볼 때마다 구두쇠인 필자는 문득 "돈 아깝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물건 상태가 안 좋은가? 그것도 아니다. 유통기한이 있는 물품을 취급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방금 샀다고 해도 믿을 만큼 좋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방탄소년단 앨범에 유통기한이 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이렇게 폐기된 물품들은 이미 그 주인이 소유권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나가던 들고양이가 물어가도 아무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다고 진짜 고이 모셔두기만 하거나 들짐승에게 주기는 좀 그렇고, 우리는 이 폐기 물품, 정확히 얘기하자면 중고 물품으로 이익을 창출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양의 중고 굿즈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사내 시스템에서는 아직 폐기처리가 되지 않은 물품들을 관리하고 있을 뿐, 나쁘게 말하면 쓰레기가 돼버린 이 물품들을 관리할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필자는 사내 시스템과 별개로 이 폐기 물품들만을 위한 재고 관리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고, 어렵지 않게 프로그램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사수에게 보여드렸더니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셨고, 이 프로그램은 필자뿐만이 아니라 전 직원이 쓸 줄 알아야 했기에 필자는 곧바로 매뉴얼 파일 제작에 착수했다.


여기서 발동한 것이 바로 필자의 열정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필자는 정말 지독한 게으름쟁이가 맞다. 집에 가면 씻고, 밥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래서 필자가 뭔가에 집중해서 몰두하는 광경을 보기란 우리 직원들을 제외하면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하지만 필자가 누구던가?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근성의 남자가 아니던가. 그놈의 시작을 안 해서 문제인 것일 뿐.


어릴 적, 인터넷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 시골에서 자라며 필자가 갖고 놀았던 것은 공교롭게도 "파워포인트"였다. 남들은 자격증 때문에 억지로 배우는 것을 필자는 게임하듯이 가지고 놀았던 지라 소요 시간과 별개로 이 작업이 지루하지 않았다. 매우 열정적으로, 그리고 누구라도 이 매뉴얼 내용을 머릿속에 쏙쏙 익힐 수 있도록 (어딘가 역설적인 것 같지만) 심플하면서도 꼼꼼하게 자료를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사내에서 가장 막내이자 말단 사원인 필자는 임원진들이 보는 앞에서 브리핑을 시작했고, 그 몇 안 되는 사람 수에 비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날다람쥐라는 동물을 아는가? 저 옛날의 중국 철학자 중 한 명인 '순자(荀子)'는 날다람쥐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며, 날다람쥐 같은 인간상에 대해 경고했다.

날다람쥐에게는 다섯 가지나 되는 재주가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하다. 날 수는 있지만 지붕까지 오르지는 못하고, 기어오르기는 하지만 나무 꼭대기에 이르지는 못하며, 헤엄을 치기는 하지만 계곡을 건너지는 못하는 데다가, 구멍을 파지만 몸을 숨길 정도로 깊이 파지도 못하며, 달리기는 하지만 사람보다도 느리기 때문이다.


필자도 딱 이런 사람이었다. 잘하는 것도 있고,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이 타인과의 경쟁력 싸움에서는 밀리는. 그래서 같은 일에 대해 필자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누군가를 볼 때마다 주눅이 들기도 했고, 필자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회의감을 갖기도 했으며, 필자의 게으른 천성에 자괴감을 갖다 보니 스스로를 비하하는 지경까지 가본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필자가 그나마라도 쥐고 있는 능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실력이 남들보다 좀 모자라면 어떤가? 물론 다른 능력자들이 500원 벌 때 자신은 100원을 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아하거나 잘하는 능력은 있게 마련이며, 그것은 절대 미천한 것도 아니거니와 제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바로 그런 곳에서 뜨거운 열정이 샘솟는다. 자신의 재주를 믿고 그 100원이라도 벌어내는 성취감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머지않아 필자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 여러분도 충분히 5배 이상의 가치를 낼 수 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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