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뤼미쌤 Oct 09. 2021

교사, 근데 이제 상담을 곁들인

‘상담, 근데 이제 교사를 곁들인’


(※ 긴 글 주의)


간단히 말하자면, 지난 몇개월 동안 두 가지 중에 무엇이 제목으로 적절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상담심리 교육대학원의 경쟁률이 치솟고 전문상담 임용 티오가 터졌던 근 몇년동안 전문상담교사를 꿈꾸는 이들이 많아졌기에, 그리고 내 안의 내적인 혼란이 너무 휘몰아치기에, 상담교사의 정체성에 대해 진솔하게 적어볼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내가 이 두 가지를 고민하는 이유는 정체성을 말로 표현해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이 소용돌이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다. 우선 상담교사의 정체성을 제대로 정리하고 언어로 표현하여 실체를 만들고 싶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으로 그 정체성이 나와 맞는지를 고민하고 싶다. 그런데 첫번째 단계에서 막혀서 실체없는 고민과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만 툭툭 튀어나오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적어보는 글이다.


제목을 ‘교사, 근데 이제 상담을 곁들인’이라고 고른 데는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사’라는 정체성이 ‘상담’ 보다 조금은 앞에 오는 것 같다고 느낀다. 초임 상담교사로서 내가 느끼기에는 교사로서의 정체성과 상담가로서의 정체성이 학교 현장에서 일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1. 내담자와 관련하여


학교 현장에서 마주하는 내담자는 대부분 미성년자, 아동, 청소년, 학생이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비자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아닐까. 병원이나 상담센터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해봤을 만큼 스스로의 심리정서적 어려움을 인식해본 적이 없거나, 정신증보다는 신경증적인 곡선에 위치하고 있는, 다시 말해 상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부재하고, 상담을 통한 변화의 의지가 미약하다는 특징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임상을 전공하지 않았고 ‘상담가’이자 ‘교사’이기 때문에 학생들을 만날 때 그 어떤 프레임이나 편견이나 진단명도 붙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관심과 수용만 있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툭툭 털고 나아갈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힘들고 혼자 버텨내기 버겁다고 느껴 숨어버린 아이들이 있다면 땅 속을 파 그들을 찾아내고 손을 내밀어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보다 전문적인 개입과 치료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발굴과 연계. 이 두가지가 상담교사가 하는 상담의 가장 큰 중심이 아닐까 싶다. 라포를 형성하고 스스로를 꺼낼 수 있는 안전한 장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상담의 필요성을 느끼고 나로 인해 상담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그래서 보다 더 전문적이고 안전한 상담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행정적, 경제적,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아이들이 마지못해일지라도 매일 올 수밖에 없는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배경그림처럼 존재하며 끊임없이 지지하고 격려하고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는 것. 조그만 변화라도 알아채고 긍정적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


그래서 초반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든다. 상담실에 오게 되는 경우도 대부분 검사에서 위기로 드러났거나 담임선생님이 의뢰하시는 것이기에, 뾰루퉁하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쭈뼛쭈뼛 들어온 순간부터 상담과 상담실에 대한 경계와 불신를 풀어내는 데만 두어 시간이 걸리고, 그리고 나라는 상담교사에 대한 믿음을 갖기까지 또 몇주가 걸린다. 그제서야 아이들의 솔직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까지도 아니고 겨우겨우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아이가 다른 상담센터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보이고 기대를 하게 되며 연결되길 바라게 된다면 아주 이상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같은 단계를 아이의 보호자인 학부모님과 반복해야 한다. 학생인 아동 청소년뿐만 아니라 보호자인 성인까지도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데, 대부분 모두가 비자발적이고 경계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걸 풀어내고 녹여내는 것까지만 해도 이미 녹초가 되기 십상이다.



2. 비밀보장에 대하여


상담윤리에서 비밀보장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비밀보장의 예외사항(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아동학대 등의 폭력상황, 자살 또는 자해의 위기, 타인을 해하려는 시도나 징후, 법원의 명령, 전염병 등등)을 제외하고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상담교사로 있으면서 학교는 비밀을 모두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라고 느낀다. 우선적으로 내담자인 아이는 아직 미성년자이기에 보호자가 존재하고, 보호자는 아이에 대해 알아야 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비밀보장 예외사항을 제외하고도 보호자에게 알려야 할까 고민이 되는 주제와 상황은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많다. ‘교사’ 역시도 학생을 보호하고 교육해야 하기에 학생이 교육적으로 옳지 않거나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이를 막고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호자가 상담한 내용을 알기를 바랄 때에도 ‘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보장이 원칙입니다.’라고 매몰차게 거절해버리기도 어렵다. 그러면 학생이 상담에 오지 못하게 될 것이고, 보호자와 협력체계도 구축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는 학교에서 그 학생에 대한 일차 책임을 지고 있는 담임선생님, 그리고 최종 책임을 지는 관리자 선생님들께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전부 다 모든 것을 자세히는 말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간략하게라도 말할 수밖에 없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함께 논의하고 학생을 지원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뭐 하나를 하더라도 모두 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결재를 올려서 결재를 받아야 한다. 말을 하거나 기록을 공유하고 나서는 비밀을 철저히 지켜주실 것을 강조하고 또 힘주어 강조한다.


학생 한 명을 외부 전문기관으로 연결시켜주는 과정에서 수많은 딜레마가 발생한다. 학생에게 보호자에게 알릴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 동의를 받고나서 진행하더라도, 보호자에게 상담내용과 관찰한 모습을 설명하고 연계를 제안드리는 상황에서 상담내용을 어디까지 비밀로 부치고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 수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학생과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 연계를 진행할 때에도 기관에 공문으로 발송하는 연계서류에 어디까지 자세히 적을 것인가 또 한 번 고민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학교상담은 정말 제한적이다. 내가 공부한 그런 상담은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라고 느낀다. 일단 비밀부터 지키기가 너무너무 어려운데, 어떻게 지속적으로 신뢰를 유지하며 상담할 수가 있겠냔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미 초등학교, 중학교 위클래스에서 비밀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상처받은 적이 많다. 또, 그래서 학교상담실과 상담쌤에 대한 경계와 불신이 가득찬 상태에서 비자발적으로 상담실에 보내지고, 그리고 위에 말했던 과정의 반복..


즉, 상담교사는 모든 비밀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말과 표현으로 학생과 보호자와 동료교사에게 부드럽게 바꾸어 설명할지 매순간 고민하고, 비밀을 서로서로 지켜줄 것을 계속 반복하여 강조하며, 청소년과 성인 모두와 동시에 대화하고 라포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말을 고르고 또 고른다. 상담교사는 정말 지혜로워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마음 한 켠으로는 경험의 부족함과 나의 어리숙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3. 교육과 지도 vs. 상담과 수용


교사로서 학생에게 생활지도를 해야하고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담자로서 학생을 품고 수용하며 기다려주고 상담해야 한다.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마치 원근법처럼 만날 수 있겠지만, 학교현장에서 마주하는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는 간극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교육의 시선에서도 교육은 아이들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로 그 결과가 몇십년 후에야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고, 상담의 시선에서도 상담은 버텨주고 지지하며 내담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일상을 살아내도록 기다리고 품어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아이들이 어떠한 일탈적이거나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을 할 것이고 하고 싶다고 예고를 할 때, 또는 이미 저질렀다고 고백을 할 때, 상담교사로서 정말 큰 딜레마를 느낀다.


우선 예고할 때의 경우, 상담자로서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그런 예고의 말의 뒷편에 숨겨진 아이의 진짜 마음을 알아채주기 위해 많이 노력한다. 말을 내뱉긴 했지만 아이 본인도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진짜로 그 행동을 할 것은 아니라고 믿어주며, 그 말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뒤의 마음을 찾아주고 다른 행동을 제안한다. 그런데 교사로서 아이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곧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아예 배제하기는 어렵다. 아이가 그런 행동을 실제로 하고 말았을 때, 더 단호하고 강하게 제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교사에게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행동은 옳지 못하고 위험하다고 강하게 경고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보호자에게 알려야 하며,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상담의 시선에서 이런 단호한 교육은 수용과 공감 이후에 천천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교육의 시선에서는 그 순간에 단호하고 강한 지도와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이를 기록에 남겨 혹시 모를 위험을 예방하고 교사로서의 책임을 지켜야 한다.


이미 저질렀다고 고백할 경우, 상담자로서 그 상황을 물어봐주고 어쩌다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면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미 행동은 저질렀지만 이를 솔직히 털어놓는 지금의 마음에 대해서도 함께 탐색하며 아이가 느끼는 죄책감과 후회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해주고자 한다. 과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숙고할 수 있도록 기회와 시간을 주고, 앞으로의 비슷한 상황에서는 보다 건강하고 바람직한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함께 준비하고 연습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사로서 어떠한 일탈적인 행동이 교칙이나 규정에 위반되고 학생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해야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 상담실 밖으로 알릴 것인지 매순간 고민하며, 아이에게 처벌을 내림으로써 상담교사가 애써 이루어놓은 신뢰관계를 깨부수는 위험부담을 안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에 빠진다.



4. 다중관계에 대하여


상담교사는 이미 그 이름에서부터 다중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상담자이면서 선생님인 것. 다중관계가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것은 상담교수일 것 같은데, 이 경우 내담자는 상담을 공부하는 수련생이기 때문에 다중관계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고 자신을 조절할 수 있으며 덜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상담교사의 내담자는 학생이며, 그것도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상담경험이 없으며 상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학교에서 상담쌤에게 느끼는 여러 전이의 감정을 명확히 표현할 수도 없고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받아들여 처리하기도 어려워 한다. 학생들은 상담선생님을 온전히 상담자로 보기보다 상담쌤으로 보며, 그들의 전생애에 걸친 경험 속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나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비록 위클래스나 학교상담실이라는 별도의 상담공간에서 만날지라도 크게는 학교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만난 상담쌤에게 학생이 진정 내밀한 내 속마음을 꺼내어 보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꺼내 보였더라도 혹시라도 다른 쌤들이 학교의 다른 애들이 알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혼란스러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걱정이 아예 근거없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학교상담의 비밀보장은 정말 한계가 크기에. 상담교사와 학생이 만드는 신뢰관계는 외부에서 상담자와 내담자가 형성하는 신뢰관계와 학교 안에서 교사와 학생이 형성하는 라포 그 어딘가 사이쯤의 애매한 것이 아닐까 싶다.



5. 자기개방에 대하여


상담교사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정보까지 학생에게 자기개방을 하는 것이 좋을까. 아직까지 나는 잘 모르겠다. 교사로서 학생을 대할 때에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한다. 평가를 해야 하고 중립을 유지해야 하기에 담임교사를 하든 교과교사를 하든 모든 것을 알고 개입하려고 하기 보다는 적정한 거리를 찾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상담교사는 상담이라는 걸 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학생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고 그러면 학생 입장에서는 상담쌤과 가까워진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마냥 가까워지는 것이 최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까도 말했지만 상담교사는 상담자이기도 하지만 교사이기도 하기에 보고를 해야 하고 기록을 남겨야 하고 보호자에게 공유를 해야 하기에. 그러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어떠한 순간에 학생은 상담쌤에게 실망하기 마련이고 어쩌면 상처입을 때도 있을 것이기에.


보통 교사는 평가자이기도 하지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 학생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개인적인 가족의 이야기나 학창시절의 이야기를 학생에게 하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사람 대 사람으로서 털털하고 진솔한 사제관계로 발전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담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더 많은 여러 사적인 전이감정을 받을 수 있기에, 다중관계를 조심해야 하기에, 자기개방을 현저히 꺼리게 되는 것 같다. 이미 독립된 공간에서 비밀이야기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학생과 상담교사의 거리가 좁혀져버렸기에, 상담교사가 사람으로서 나의 개인적 이야기까지 해버리면 적당한 거리를 찾을 수 없게 될 것만 같다. 이건 초임이기에 가지는 괜한 걱정이자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염려가 되어 아직까지는 나의 사적인 이야기나 개인정보는 거의 알리지 않고 있다. 고경력 교사가 되면 어딘가쯤에서 타협을 보며 동시에 상담자이자 교사이자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아직 그런 내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는다.



지금 이 시점에 드는 생각은 이 정도인 것 같다. 경험이 부족하기에 더 현명하고 지혜롭고 순간적이고 직관적이며 유연한 선택과 대처를 할 수 있었더라면 하고 되돌아보며 자책하거나 후회할 때가 참 많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고 순간적이고 직관적이며 유연'하다는 많은 수식어구가 붙은 것만 봐도 그런 완벽한 대처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정말 수 많은 딜레마를 마주하며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내가 두통을 달고 살 정도로 더 많은 생각을 한다. 선택불안이 높은 나에게 학교의 매순간은 딜레마이고, 결정과 판단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매순간 놓인다. 그래서 고민이 많이 되나보다. 말로 적어놓고 보니 속은 조금 후련한 것 같다. 초임상담교사로서 느끼는 이런 갈등들이 경력이 쌓이면서 조금씩 사라지고 저 멀리 어딘가 쯤에서 상담가와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통합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이런 작고 큰 갈등 사이에서 휘말려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시기의 내 고민을 적어두는 것은 미래의 나에게, 또 초임을 마주하게 될 후배 상담선생님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나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


'교사, 근데 이제 상담을 곁들인' 지금의 상담교사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 변화의 파도에 함께 올라타 수없이 서핑보드 위에 오르려다 떨어져 허우적대며 물을 먹고 매일밤 근육통에 시달리는 그 시기를 견뎌낼 자신감과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교사라는 타이틀을 포기하고 온전한 상담가가 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불안정한 시기를 견뎌내어야 하는데, 기회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민이 많지만, 우선은 살아내야 하고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지켜보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시간이 분명 필요할 거다. 내가 잘 버텨주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