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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쌤 Oct 08. 2021

그냥, 매번 처음 있는 일처럼

선배 선생님들이 이야기하시는 것을 듣고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구나 싶었던 건, 아이들이 선생님의 연락에 답이 없는 것. 출석체크를 위해서든 담임으로서 확인할 정보가 있어서든 그 이유와 무관하게 학생들이 교사의 문자나 전화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경우를 많이 보고 듣는다. 보통 부재중이 떠 있고,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문자가 와 있다면 무슨 일인지 묻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그게 당연하지 않게 느껴진다.

상담에 오지 못하게 될 때도 사전 연락이 없는 경우가 정말 많다. 조퇴를 하고 결석을 하고 까먹었을 수 있지만 나중에라도 따로 연락을 줘야 할 것만 같은데, 아이들의 시선으로는 모든 교사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상담시간에 오지 않아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것이 부지기수이고, 상담쌤이라고 문자를 남겨도 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로 인한 변화일까.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사람으로 보고 사람으로서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많이 흐려졌다고 느낀다. 자주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실 담임선생님이어도 상담 선생님이어도 심리적으로 안전하고 가깝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있을 때라면 연락이 안 될 때 직접 교실에서 특별실에서 복도에서 찾아내서 붙잡고 이야기할 수라도 있겠지만, 원격 기간에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의 연락이, 목소리가, 마음이 닿지 않는다. 마치 안 보이는 어둠 속에 숨어버린 느낌이다. 서로가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듯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척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가량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교감하고 나자 연락을 안 받던 아이들이 전화를 받고 문자에 답이 오기 시작했다. “넹” “감사합니다” “몇 교시에 상담 가능해요?” 등등. 어른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시간보다도 아이가 어른에게 가까워졌다고 느끼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라져 버린 숨어버린 아이들을 재촉하지 않고 나무라지 않고, “네가 나오면 언제든 쌤은 여기 있어”라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느낀다.

교사의 입장에서 ‘마침내’ ‘드디어’ 연락을 받았을 때, 대답이 왔을 때, “너 왜 이제야 받는 거야”, “쌤이 3일째 연락하는데 뭐하느라 못 받았니”를 따지고 물을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연락을 해서 받은 것처럼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차분히 전달하는 게 아이들에게 안전감을 주는 게 아닐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행동을 반복할 때, 우리는 그 행동의 과거력까지 끌어와 “너 몇 번째야”하고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아이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한두 번 실수로 그런 행동을 했더라도 아이 본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세 번째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이미 두 번이나 그런 적이 있으니까 모든 어른들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아마 자신을 비난할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걸지도. 그래서 해명할 의욕을 잃고 그냥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가 되기로 포기하고 마는 걸지도.

그런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비난받지 않고 말과 행동을 수정할 수 있도록, 안전한 기다림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이를 기다리는 것은 분명 속 터지는 일이겠지만, 매번 처음 있는 일처럼, 그렇게 아이들에게 미지근한 온도로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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